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 후인 2017년 5월 31일, 문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의 딕 더빈 원내총무를 면담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인사와 덕담을 나누는 것으로 어울릴 법한 자리에서 더빈은 예민한 문제를 꺼냈다. 바로 사드 배치였다. 더빈은 조속한 사드 배치를 요구했고 문 대통령은 환경영향평가와 같은 민주적 절차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전임 정부의 결정이지만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해서 결코 가볍게 여기지는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새삼 이 장면을 거론한 이유가 있다. 미국 야당 정치인의 오만한 태도도 문제지만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저자세도 문제였다. 더빈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99년 3월 미국 상원은 국가미사일방어체제(NMD) 구축을 촉구한 공화당 주도의 법안에 97 대 3이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런데 더빈은 당시 이에 반대표를 던진 3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또한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2001년 5월 탄도미사일 방어(ABM) 조약 탈퇴 의사를 밝히자 "ABM 조약 파기는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ABM 조약은 미사일방어체제(MD)를 사실상 금지한 것이었다.
그렇다. 더빈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내 대표적인 MD 반대론자였다. 그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말한 미국의 ABM 조약 탈퇴가 없었다면, 미국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더빈에게 '왜 입장이 바뀌었냐'고 물었어야 했다. 잠시 불편함은 있었을지라도, 세계를 감동시킨 촛불 혁명 덕분에 등장한 문재인 정부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 촛불에는 박근혜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사드 배치 결정을 재검토해달라는 시민적 열망도 담겨 있었다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바이든에겐 물어야 한다
오늘(27일) 정부는 경찰 600명을 동원해 경북 성주 사드 기지에 또다시 자재 반입을 시도했다. 저지에 나선 70여 명의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내면서 말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절실한 상황에서 사드 공사는 예외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미국은 정권교체기에 있다. 그런데 임시 배치 상태에 있는 사드는 정식배치 수순을 밟고 있는 것 같다. 한미연례안보회의(SCM) 합의 사항이 그렇고, 문재인 정부가 사드 관련 3불 입장은 중국과의 합의가 아니라 협의이며 그래서 번복 가능하다고 밝힌 것에서도, 그 이후 오늘까지 두 차례에 걸쳐 자재 반입을 강행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징후를 읽을 수 있다.
정부가 국민에게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사드 배치 강행이 남북관계와 한중·한러관계에 미칠 악영향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 묻고 싶다. 성주 소성리 주민 및 이들과 연대해온 시민들의 울분과 고통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도 묻고 싶다. '사드 배치 재검토'라는 국민과의 약속을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묻고 싶다.
사드 배치 결정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부통령으로 있었던 오바마 행정부 때 결정된 것이다. 그래서 코로나 광풍 와중에도 정부가 사드 기지 건설을 강행하는 것이 이와 연관된 것은 아닌지 의문도 든다. 문재인 정부가 한미동맹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사드를 통해 바이든 진영에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의 착각이길 바란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곧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를 상대로 사드 재논의에 착수하길 바란다. 바이든은 더빈과 마찬가지로 상원의원 시절에 ABM 탈퇴 결정을 강력히 비판한 인물이다. 핵문제는 군비통제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는 외교 철학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바이든에게 물어야 한다. ABM 조약이 사라진 이후 바이든이 걱정했던 미래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미국이 동맹국들과 함께 MD 구축에 박차를 가하면 군비통제는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지, 사드 정식배치를 강행하면 바이든도 피하고 싶다는 신냉전을 재촉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북핵 문제 해결은 더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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