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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남친이 사귈 때 찍은 영상을 지우지 않은 것 같아요"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 2] 세 번째 이야기

사귈 때도 딱히 원해서 찍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24시간 같이 있는 게 아닌데 너무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을 때 보겠다고 우겼다. 처음엔 잠들어 있는 얼굴 사진에서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고 있는데 이불을 들춰내고 반라의 몸을 찍거나 샤워하고 나오는데 불시에 셔터를 눌렀다. 그러다가 관계하는 중의 '짤'같은 걸 찍기도 했고, 보여주기도 했다.

사랑은 영원할 것 같았고 그땐 그 사람이 더할 나위 없이 근사해 보였는데, 어느새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했던 사람과 다름을 알게 될 무렵엔 사랑도 끝났다. 그렇게 연애는 끝이 났지만, 그의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있을 사진이나 영상을 지울 방법이 없었다. 지워달라는 연락에, 어느 날은 답을 하지 않고 어느 날은 '지웠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지웠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애의 기억은 흐려졌지만, 불안함은 흐려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특별한 사연이 아니다. 주기적으로 온·오프라인에서 여성들로부터 받는 질문이다. 주로 10대부터 30대 초중반까지의 젊은 여성들의 고민이 집중되는 사건이다.

따로 사연을 구성하지 않은 것은 젊은 여성들에게 이와 비슷한 고민들, 상대가 몰래 찍은 것은 아니지만 헤어질 때 돌려받거나 삭제된 것을 확인하지 못한 촬영물에 대한 고민이 보편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많고, 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직접 겪으며 공감하는 문제지만, 정작 해결 방법은 요원하다. 상대방이 이런 촬영물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강제로 삭제하거나 압수할 방법이 없다.

상대방이 몰래 찍은 촬영물이거나 그 촬영물로 협박을 하였거나 그 촬영물을 유포 등 한 것이 아니라면, 처벌은 고사하고 쉽게 수사 대상이 되지도 못한다. 촬영물이 범죄의 도구나 결과물이 아닌 이상 내가 찍혀있고 언제든 내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더라도 그건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개인의 소유물이다. 연애하면서 추억을 만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위험한 재산'을 만드는 일이다.

가장 좋은 것은 나중에라도 찜찜할 촬영물은 찍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헤어질 것이 예정되어 있으니 찍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촬영물을 가지고 협박을 하거나 유포하는 류의 피해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상대방에 의해서만 이런 촬영물이 불법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촬영물이 저장된 기기를 제3자가 보게 되는 경우의 수는 얼마든지 생긴다. 핸드폰 잃어버릴 수도 있고 포렌식 등을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남이 보지 않길 바라는 촬영물이 일단 생성된 후에 다른 피해로 이어지는 일이 적지 않다.

동의한 것은 아니지만 사후 동의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는 촬영물이 꽤 많다. 상대가 돌발적으로든 계획적으로든 몰래 찍었던 촬영물의 존재를 사귀는 중간에 알게 되었던 사건의 경우, 다툼이 빚어질 때 종종 등장하는 것이 상대방이 그 직후에 피해자에게 촬영물을 전송해주며 애정을 속삭이고 이에 피해자가 갈등을 피하느라 같이 동조하고 좋게 좋게 넘어가는 상황들이 종종 등장한다.

분명 피해자의 기억 속에 몰래 행한 촬영이고 직접 버럭 하기도 했는데, 남아있는 SNS에는 공유하고 함께 즐긴 것으로 기록되는 순간들이다. 피해를 예방하는 것은 안 찍는 것이지만, 원치 않는 상황에서의 애매한 촬영물이 존재하는 경우 이에 대해 그 당시에 몰래 찍은 것임을 분명하게 문자나 카카오톡 등으로 표현해야 한다.

유포나 협박 등의 피해가 없는데 상대방의 휴대폰에 들어있을 것 같아 불안한 촬영물은, 이런 정도의 증거가 있고 고소 절차를 밟을 때 비로소 압수해서 확인해볼 길이 열린다.

디지털성범죄 영역은 수사기관이나 법원에게만 변화를 촉구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고전적인 다른 범죄들이 수천 년의 인류 역사와 함께 해왔다. 그 기간 만큼 그 범죄에 대한 사회의 고민이 축적되어 있다.

그러나 디지털 범죄와 같은 종류의 신종범죄들은 역사가 짧다. 더구나 성범죄는 오랫동안 가해자의 시선에서 수사되고 처리돼왔고, 그래서 그 객관성과 형평성에 대하여 고민과 변화가 요구되는 중에 있다.

그러니 디지털성범죄에 있어 범죄성립이나 죄질의 평가, 수사 방법 등에 대해 다방면에서 갈 길이 멀다. 입법기관도, 학계도 함께 노력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관심과 노력이 부족하다. 부족한 것이야 탓해야겠지만, 그것이 메워지는 때까지 생기는 피해가 보호되거나 예방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추억이니 사랑이니 하는 이름으로 둔갑시켜 언젠가 나를 향한 칼날이 될 소유물 형성에 내키지 않는 협조 같은 걸 할 필요가 없다. 동의하지 않은 촬영물 형성을 알았을 때에는 의사 표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연인이 내켜 하지 않는 일을 장래에 연인에게 해악이 될 수 있는 일을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원하지 않는 촬영물을 찍는 사람, 지워달라는 것을 굳이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그 시점에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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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는 이은의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이나 아래 전화로 연락을 주십시오. (평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 02-597-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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