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많은 여성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는 여성 중 누구도 특별한 계기 없이 '나는 페미니스트가 될 거야'라고 결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여성 대상 범죄 기사들,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혐오와 차별들. '여자이기 때문에'가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일들을 보고 겪으며 이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비난받고 죽는 일들은 흔하다. 책 <아주 오래된 유죄>(한겨레출판 펴냄, 김수정 지음)는 여성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감내해야 하는 일들을 '형량'이라고 표현했다. '여자로 태어난 죄'라고.
직장 내 성희롱과 가정 폭력부터 텔레그램 n번방, 낙태죄 폐지까지
이 책은 20여 년간 '여성 문제'에서 여성을 위해 변론해온 김수정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의 첫 단독저서다. <프레시안>과 <한겨레>에 '여성을 위한 변론'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칼럼을 중심으로 엮었다.
기존 글에 더해, 코로나 시대의 여성 노동권, 낙태죄 위헌 판결 등 최신 이슈에 관한 글을 새로 써 함께 실었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직장 내 성희롱, 가정 폭력, 아동·청소년 성착취 문제, 배드파더스 사건 등 저자와 동료 변호사들이 직접 변론했거나 현재도 변론 진행 중인 사건들을 주제별로 다룬다. 이런 사건들은 근래에 대두됐지만 오래전부터 지속돼왔다는 점에서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페미니즘은 종종 어렵게 느껴지곤 하는데, 이 책은 시사에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 쯤은 들어봄직한 일들을 다루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다.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지만 저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쉬운 설명과 담백한 표현 덕분에 독자는 사건의 논점을 쉽게 짚을 수 있다.
저자는 한국의 법과 그 법의 집행자들이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외면해온 사례를 짚는다. 그러면서 여성에게 중대한 범죄들이 일어났을 때 왜 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지, 우리 사회에서 여성 범죄에 대한 형량은 왜 이리 가벼운 것인지, 왜 법은 현실이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지를 법조인의 시각에서 풀어나간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돼있다. 1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여성 대상 성범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장에서는 성폭력의 피해자임에도 가해자가 되어 처벌당한 여성의 사연과 함께 성범죄를 피하기 위해서는 목숨 정도는 걸어야 한다는 사법부의 모순된 인식을 보여준다.
2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들리는 비명'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폭력을 다뤘다. 가정 폭력이 집안 일로 축소되는 데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이 있다. 이런 인식은 취약한 위치에 있는 이주여성들에게 더 위협적이다.
3부 '도구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자궁'에서는 여성의 임신 중단 권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장에서는 국가가 나서 여성을 인격을 가진 개인이 아닌 '자궁'으로 취급해오던 역사적 인식을 고발한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권리야말로 여성 인권의 가장 궁극적 권리라는 점에서 이 책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다.
4부 '용서받은 자들 뒤에 용서한 적 없는 이들'에서는 보다 국가적인 차원의 여성 인권 이슈를 짚어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국가 주도로 여성을 외화벌이로 이용했던 미군 기지촌 위안부 문제, 나아가 코로나 위기로 더 은폐되는 여성 인권 현실의 부당함을 밝힌다.
낙태죄에 담긴 의미
저자는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낸 공동변호인단 중 한 명이다. 낙태죄 이슈는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총체적으로 담고 있다.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하고 출산 이후의 모든 문제, 비혼모로 손가락질 받는 삶이나 과도한 양육 책임 등은 여성이 모두 감당해야 한다.
구체적인 통계는 없지만 연간 50만 건의 낙태가 시행된다는 보고가 있다. 반면 낙태죄로 기소되는 예는 10건 내외다. 사문화된 조항이니 굳이 폐지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사문화된 조항이지만 여전히 형사법상 범죄"라는 점을 지목한다. 이는 낙태하는 여성들이 불법적인 의료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이고 시술 뒤에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며 언제든 범죄자로 처벌될 수 있는 위치에 놓였다는 의미다.
실제로 낙태죄로 처벌받는 여성들의 사례를 보면 헤어진 연인, 이혼한 전 부인에게 복수하려고 신고하는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심지어 사망한 남편의 재산 상속 자격을 박탈하게 하려고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고발하기도 한다.
낙태죄 담론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돌아보면 과거 한국이 인구 조절을 위해 낙태를 종용했던 과거나, 횡행했던 여아 낙태를 빼놓을 수 없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정이 아니라 국가의 사정, 아들을 낳아야 하는 집안의 사정 등 저마다의 사정에 따라 낙태는 허용되고 종용됐다. 결국 여성의 사정, 여성의 결정에 의한 낙태만 금한 셈이다.
저자는 낙태죄 비범죄화 논의를 두고 2001년 사후피임약인 '노레보' 도입 찬반 논란을 끌고 온다. 노레보는 성관계 뒤 72시간 내에 복용하면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약이다.
낙태죄 폐지와 마찬가지로 노레보도 종교계를 중심으로 극심한 반대가 있었다. 성문란 야기, 무분별한 성행위의 증가, 생명경시 풍조의 확산, 청소년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 등 반대하는 이유도 같다. 이런 이유는 과거 호주제 폐지 논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과거의 일들을 언급하며 "사회가 문란해졌느냐"고 되묻는다.
거의 패배하지만, 그럼에도 싸워야 하는 이유
책에는 낙태죄 폐지 외에도 여러 여성 이슈가 담겨있다. 성폭력에 대항하다 남성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여성의 56년 만의 재심 청구 사건과 이주여성, 미혼모 등 취약한 위치의 여성들이 겪는 사회 구조적 문제, 그리고 때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우리 사회가 외면했던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의 이야기까지. 한 번 쯤은 들어봄 직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로 다룬다.
저자는 "이런 싸움은 아주 가끔 승리하며 대개 많은 경우 패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의 부제인 '그러나 포기하지 않은 여성을 위한 변론'이라는 말처럼 포기하지 않은 싸움은 어떻게든 한발씩 전진하게 된다. 그러니 싸움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저자는 "책을 쓰는 데 2년이 걸렸다. 힘들었던 사건의 기억을 끄집어내어 기록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는 것이어서 글쓰기를 포기했던 시간이 상당히 길었던 탓"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내 글을 읽은 한 젊은 남성독자가 자신이 '갱생'되고 있다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내게 계속 글을 써달라고 채찍질했고, 이는 내가 다시 쓰기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며 끝내 책을 완성한 이유를 말한다. 저자의 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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