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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간부 성폭력, '가해자'는 곧바로 복직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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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간부 성폭력, '가해자'는 곧바로 복직신청했다

1심 유죄, 2심 무죄 선고…"가해자 징계 없고 피해자는 고통"

"차마 함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벌써 2년이 흘렀습니다. 고소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로 스스로를 책망하며 참 많은 날들을 허비했습니다. 고등법원에 출석해 모든 답변에 성실하려 애쓰고 담담하게 진술했던 것이 되려 피해자답지 않아 괘씸했던 걸까… 답을 낼 수 없는 막연한 후회로 너무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지난 2년, 켜켜이 일상을 살아내고 주어진 직무에 최선을 다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피해자의 글 중)

2010년, 성소수자 A씨는 해군 1함대 중위로 임관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불합리한 처우를 받을 수도 있지만 '떳떳하게 나 자신으로서 복무하기 위해' 직속상관인 박 모 소령에게 이같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박 소령은 A씨에게 "남자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며 성폭행했다. 이 일로 피해자 A씨는 임신을 했고 중절수술을 받아야 했다. 피해자 A씨는 또 다른 상관인 김 모 대령에게 성폭행 피해 사실과 수술 사실을 알렸다. 김 대령은 "위로해주겠다"며 피해자를 불러내 성폭행했다.

2018년 5월 해군본부 보통군사법원은 박 소령에게 징역 10년 형, 김 대령에게는 징역 8년 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항소심을 맡은 고등군사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이들에게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고등군사법원은 "피해자에게 '반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고 판단했다.

사건은 2심 판결에 불복한 군검찰이 상고장을 제출해 대법원으로 넘어갔지만 2년이 다 되도록 판결이 나오지 않고 있다.

▲19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에서 열린 해군 성폭력 사건 유죄판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가운데)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 "군의 약한 고리는 피해자 아닌 가해자들"

한국성폭력상담소·군인권센터 등 10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19일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해군 간부들에게 유죄를 선고해줄 것을 촉구했다.

공대위는 "고등군사법원의 무죄 판결 이후 2년이 지난 지금, 대법원은 여전히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다"며 "실체 없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며 성폭력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은 고등군사법원의 시대착오적인 판결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건 피해자는 기자회견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입장문을 보내 심경을 전했다. 입장문은 강현숙 젊은여군포럼 회원이 대독했다.

피해자는 입장문에서 "비열하고 치졸한 방법으로 저를 깎아내리려는 가해자들은 여전히 변함이 없지만 공대위를 비롯해 도움 주시는 분들과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일상을 살아낼 힘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이어 "군 조직의 가장 약한 고리는 여군 자체이거나, 체력 수준이나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아니"라며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고, 심지어 그것을 은폐하고도 괜찮을 것이라 안일하게 믿는, 그래서 유능한 부하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고 결국 조직과 자신의 가족들을 배반하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약한 고리이자 악한 고리"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관심 병사로 분류되고, 약한 고리로 취급받으며 조직에 남기보다 떠나야 했던 피해 생존자들이 기꺼이 군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희망과 역량껏 일할 수 있길", "생존자들이 살아남고 국민에게, 그리고 상호 간에 신뢰받는 자랑스러운 군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고등군사법원의 판단, 군대의 '상명하복' 문화를 놓쳤다

공대위는 고등군사법원의 무죄판결이 피해자의 성적지향과 군대 문화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고등군사법원은 무죄판결의 근거로 상관들과 피해자 사이에 성관계는 있었으나 "반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없었다"고 했다.

또 "남성인 가해자가 저녁에 독신 숙소로 불렀을 때 여성인 피해자가 이에 응했다면 찾아갈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 "티타임을 갖자는 말이 자신의 숙소에서 자고 가라는 의미로 이해됐을 것"이라고 했다.

박지영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군 조직은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전장의 혼란을 통제하기 위해 상관에 대한 상명하복 즉, '명령 불복종'에 대해 군형법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장교 양성 교육을 마친 뒤 처음 근무하게 된 피해자가 직속상관에게 쉽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군의 위계질서가 몸에 밴 '중위' 피해자가 '소령'인 직속상관 1차 가해자와 배의 총괄자인 함장이자 '중령'인 2차 가해자에게 느꼈을 절대적 위력은 상상 이상일 것"이라며 "한번 항해하면 20일 이상 협소한 공간에서 24시간 밀착 생활해야 하는 근무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아무 조치 없는 해군...가해자는 되레 피해자 2차 가해

무죄판결 이후 피해자는 해군 함정 병과의 장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른 부대에서 복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가해자들은 판결 직후 곧바로 복직신청을 했다.

공대위는 해군의 안일한 대처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해군은 가해자들에게 기소 휴직 처리만 해둔 상태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은 "2심 재판부가 가해자의 손을 들어주긴 했으나 범죄의 사실이 아예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며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고 짚었다.

국방부 군인·공무원 징계업무 처리 훈령에 따르면 성폭력 사건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징계권자는 반드시 징계 의결을 요구해야 하며 수사기관에서 혐의없음 또는 죄가 안됨 결정이 있다 하더라도 징계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되는 경우 징계가 가능하다. 특히 성폭력의 경우, 징계 양정 기본 사항이 중징계에 해당하는 '해임'인데 피해자가 군형법상 부녀(여군 및 여성인력)인 경우 상급자의 지위를 이용한 폭력에 대해서는 더욱 가중하여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방 팀장은 "이런 처리가 가능함에도 해군은 가해자를 엄단하긴커녕 기한 없는 기소 휴직으로 가해자들의 군인 신분을 연장해주고 있다"며 "가해자들은 일정 수준의 봉급을 해군으로부터 받으며 피해자를 옥죄는 탄원서를 취합하고, 악의적인 의견서 제출하는가 하면 피해자의 신상이 담긴 자료를 언론에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늘어나는 군대 내 성폭력, 조직적 은폐

군대 내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피해자가 조직으로부터 2차 피해를 겪고 군 생활을 어렵게 이어가는 반면 가해자는 제대로 된 처벌도 없이 복직을 노린다.

지난달 더불어민주당 송기헌 의원실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부터 2020년 6월까지 5년간 성폭력 관련 범죄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909명 중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단 106명으로 나타났다. 장교 신분으로 재판을 받은 119명 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9명, 7.56%에 그쳤다.

동일기간 성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장교는 총 444명인데 징계 항목의 구분 없이 파면 징계는 5년간 16명, 해임은 57명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총 징계 중 성폭력 징계 비율을 감안하면 실제 성폭력으로 파면·해임 징계를 받은 인원은 훨씬 적을 것으로 보인다.

군 조직의 안일한 대처는 피해자에게 신고도 꺼리게 만든다. 2019년 국방부 성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 중 피해 발생 후 기관에 보고 또는 신고한 경우는 32.7%에 불과했다. 보고하지 않은 나머지 응답자들은 미보고(신고) 사유로 '아무 조치도 취해질 것 같지 않아서'(44%)라고 답했다.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는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을 때 상관 보고나 신고에 대해 여군들은 '고민하지도 않았고 상의나 보고나 신고할 계획도 없다'가 47.1%일 정도로 신고를 기피하고 있다"며 "이번 사건의 피해자도 가해자 상관들이 진급 등 인사상 불이익을 줄 것을 우려해 7년이라는 오랜 기간동안 고민한 끝에 신고했다"고 했다.

이어 "이 사건은 군 지휘부의 관심 속에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음에도 2심에서 뒤집혀 무죄판결을 받았다. 여군들에게는 충격 그 자체"라며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험난한 진술 과정과 대법원 판결가지 오래 기다리는 상황을 보면서 '신고해서 법정 싸움까지 가기보다는 조용히 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여군들 사이에서 번져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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