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법률사무를 하다 보면, 잦은 간격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사건들이 있다. 명확하게 콘돔을 낀 성관계에 동의를 했는데 상대방이 성관계 중에 일방적으로 콘돔을 뺐다거나 또는 1차 성관계가 끝난 후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콘돔 없이 상대방이 성관계를 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사건들이다. 또 처음부터 콘돔에 구멍 등 하자를 일부러 만들고 성관계를 하게 되었고 임신하게 되었는데 신고할 수 없는지를 묻는 경우도 있었다. 소위 '스텔싱'(stealthing, 성관계 중 상대방의 동의 없이 콘돔 등 피임기구를 제거하는 행위)이라고 불리는 사건들이다.
스텔싱 사건 상담의 경우, 대부분 피해자가 원하는 해답이나 방향성을 제시해주기가 어렵다. 한국에서 강간죄나 준강간죄로 의율(擬律)되는 범죄들은 당사자의 의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간음을 전제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저항하기 어려운 폭행·협박에 의한 것이든 술·약물·기타 원인으로 인한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에 의한 것이든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데 성기를 삽입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스텔싱의 경우 '콘돔을 장착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성관계에 동의했는데, 문제는 이후 성관계 과정에서 발생한다. 성관계에 대해서는 양자 간에 동의가 된 상황이므로, 현행법상으로는 성범죄로 처벌할 방법이 없다. 가해자가 콘돔을 빼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이를 알아차리고 저항했는데, 가해자가 폭행·협박으로 이를 제압하고 다시 삽입했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이렇지 않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대개 행위가 끝난 후에야 알게 되거나 중간에 이를 알게 되더라도 당황해서 기껏해야 "싫어", "뭐 하는 거야"와 같은 외마디 의사 표시 정도가 전부다. 심지어 일부러 콘돔에 (구멍 등) 하자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는 변태성 가해자를 만나게 되면, 나중에 임신을 하고 나서야 의심하지만 그마저도 콘돔의 자체적 하자 문제인지 고의에 의한 하자 문제인지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렇게 해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경우, 그 임신을 '상해'라고 할 것인지 또는 '민사상 불법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물론 개별 사건마다 다른 과정과 결과가 있으니 통칭해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스텔싱 자체만으로는 현행법상 보호받기란 어렵다.
위에 언급한 사건도 특별한 예외가 아니다. 스텔싱은 연인 간에도 종종 발생하지만 연인 관계가 아닌 경우에 더 빈번하게 발생한다. 연인 관계에서는 스텔싱보다는 애초에 소위 '노콘'(no condom)이라고 불리는 '콘돔 없이 하는 섹스'의 강요가 문제 된다. 연인 관계에서는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는 스텔싱이던 노콘이던 우기는 쪽이 행동을 교정하거나 피해자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포기'하고, 그도 아니면 헤어진다. 물론 심신이 건강한 남자라면 스텔싱이고 노콘이고 자기 연인이 고통스러워하는 일을 할 리가 없다.
위 사건도 '그날만 안 사람'으로부터의 피해다. 낯선 사람으로부터 입는 스텔싱 피해는, 피해자에게 '임신'이라는 두 글자를 세상 최악의 공포로 각인시킨다. 덜컥 계획에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 임신을 해도 난감하지만,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까지 피해자가 갖는 마음고생이란 타인이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옆에 있지도 않은 가해자와 이런 마음고생을 나누기도 어렵지만, 설령 임신했다거나 임신 우려가 있다고 이렇게 무책임했던 상대와 사귀는 것이 답도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건의 피해자 역시 임신 테스트를 하거나 생리를 할 때까지 혼자 마음 앓이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무분별한 스텔싱을 한 가해자의 답변은 무책임했다.
"그나마 저런 X와 덜컥 사귀게 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냐" 말로 피해자와 법률 상담을 마쳤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텔싱이 한국에서 처벌되는 날이 언제가 될지, 그런 날이 올지, 현재로서는 가늠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피해자들에게 이런 일이 생기면 그저 운이 나빴다고 여기고 똥 밟은 셈 치라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작일 때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일방적인 욕구로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짓을 하면 그것이 폭력이다.
성폭력 사건을 주로 담당하고 있는 변호사로 스텔싱 관련 입법 수립과 정책 방향은 임신과 양육에 대한 엄격한 쌍방 책임 부여다. 양육비는 물론이고 임신해서 출산을 하게 되는 비용도, 임신했지만 출산이 여의치 않아 낙태하게 되는 비용도, 남녀가 함께 부담할 책임을 지워야 한다. 양육비의 현실화는 물론이고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일방에 대해 아이와 양육자의 입장에서 쉽게 집행할 수 있는 법과 정책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신체와 인생보다 자신의 쾌락이 중요한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책임은 당연하지 않나. 스텔싱은 당장 처벌하기도 어렵고 법을 도입한다고 해도 스텔싱을 입증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인 임신은 쌍방이 같이 지는 게 맞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나 책임 의식도 없는 가해자의 가해 행위를 그런 사람을 만난 대가인 양 피해자에게 미루는 것은 옳지 않다. 도의적인 책임을 무겁게 느끼지 않은 사람들을 규율하는 방법은 간단하지 않나. 현실적인 책임을, 법적인 책임을 부여하면 규율될 일이다.
* 예시로 기재한 상담내용은 실제 상담 사실들에 기반할 뿐 여러 사안들을 아우르는 내용으로 각색되었습니다. 비슷한 경험을 한 후 비슷한 상담내용을 접하면서 혹시 나의 이야기가 돌고 돌아 여기 나왔나 할 수도 있는데 피해 사실들이 갖는 맥락이 비슷하다 보니 생길 수 있는 현상으로 실제 특정 사실이 아닙니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