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50주기를 맞아 1983년 돌베개출판사 편집장으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평전>을 처음 출판했고, 전태일기념사업회 부설 구로노동상담소 간사, 전태일노동자료연구실 대표로도 일을 했던 박승옥 햇빛학교 이사장의 기고 글을 세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그는 지금은 박제된 기념이 아니라 고뇌하고 또 고뇌하다 직접 행동에 나섰던 1970년 당시의 전태일처럼 기후위기 시대 청년 민주주의 혁명과 전환의 직접 행동이 필요한 때라고 역설하고 있다.
한국의 대의정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1% 상층 엘리트들의 귀족정이다
민주주의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주권자인 인민이 스스로 인민을 통치하는 자치와 자율의 정치 체제다. 통치자이자 피통치자로서 인민이 교대로 통치자가 되는 이런 정치체제는 소수가 권력을 휘두르는 엘리트 대의정이나 왕정, 독재정과는 확연히 다른 정치질서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민주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대비되는 공화정이야말로 미국에 적합한 정치체제라고 생각했다.
건국 초기 5명의 대통령을 포함하여 55명의 미국 독립헌법 서명자들 대부분은 노예소유주, 부유한 상인, 대토지소유자, 변호사, 식민지 관리 등이었다. 이들 엘리트 기득권자들은 영국 식민지에서 해방된 독립국가의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의 도입을 적극 반대했다.
노예소유주였던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1800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미국은 지금의 트럼프 사태처럼 선거인단과 하원이 누구를 대통령으로 정할지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자칫 내전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공화당의 제퍼슨 지지자들은 더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의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일반투표에서 더 많은 표를 받은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미국 정치가들은 인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강력한 지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당도 당명을 주에서부터 바꾸기 시작해서 20년 뒤 민주공화당으로 완전히 바꿨다.
그리고 이때부터 미국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부끄러움도 없이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 민주주의, 선거대의정이란 교언영색의 사기꾼 언어로 인민들을 호도하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방 직후 3년 동안의 미군정 식민지 기간을 거친 한국은 미국의 강력한 영향 아래 제정한 1948년의 헌법을 통해 민주공화국을 표방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정치 현실이 그대로 민낯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대의정은 민주주의와는 멀어도 한참 먼 1% 엘리트 상류계급들의 귀족정일 따름이다.
그래도 19세기 말부터 임시정부를 거쳐 해방 직후 인민위원회에 이르기까지 조선 인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염원인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신을 헌법에 반영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을 의식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전태일, 한국 주권자 직접 민주주의의 시원
우리에게는 끈질기고도 오랜 인민의 민주주의 투쟁과 실천 역사가 있다.
1894년 동학농민들이 선보인 집강소 민주주의는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민이 스스로 선보인 놀라운 민주주의 혁명의 전범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30만으로 추정되는 동학농민군을 무참하게 학살하고서야 비로소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할 수 있었다.
왕정보다도 더 가혹한 억압과 착취체제였던 36년의 일제 총독부 지배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하면서 전국에 걸쳐 조선인민들이 좌우합작으로 만들었던 인민위원회의 민주주의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개화기였다. 8월 15일에서 미군정이 시작된 9월 9일까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인민위원회의 통치는 조선 인민들의 국가 통치 능력을 유감없이 증명한 생생한 사례였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한국전쟁은 남한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거의 모두 잘라버리고 말았다. 친일파와 결탁한 이승만 독재체제는 사실상 일제 식민지의 연장선상에서 미국의 유사 식민지 성격을 띠고 있던 참주정이었다.
그럼에도 중학생을 중심으로 기적처럼 일어난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체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다시 일본 제국주의 군인이었던 박정희의 쿠데타와 함께 기나긴 군사독재체제가 남한을 지배하였다. 지금도 식민지 잔재와 유산은 질기고도 끈질기게 남아 친일파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엘리트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 유럽국가들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가 모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한국 인민들로 하여금 선거와 대의정을 민주주의라고 오해하고 착각하게 만든 원흉은 맹목으로 서구 정치와 정치학을 추종하는 누런 피부 흰 가면의 엘리트 강단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초중고와 대학의 교육 현장에서 그렇고 그런 거꾸로 된 정치학을 교육하도록 교과서와 정치학 교재를 편찬하고 가르쳤다.
서구 근대화를 지상 명제로 생각하는 성장과 개발의 서구 근대화 추종 경제학자들, 친일 매국의 부역 학자들과 똑같이 인민을 개돼지로 여기는 친미 친서구 부역의 정치학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민주주의 혁명과 전환은 노동자 농민 등 주권자 인민이 자신을 둘러싼 착취와 억압의 현실을 깨닫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구조 자체를 스스로 바꾸고자 할 때 비로소 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전태일은 6.25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억압과 착취 구조를 인식하고 직접 행동을 통해 인민들의 의식을 일깨워 국가와 사회를 바꾸고자 했던 주권자 민주주의 혁명의 선구자였다.
4.19혁명은 선거 부정에 대한 항의로 시작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가와 사회구조를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배우고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노동부에 진정도 하면서 차츰차츰 거대악인 한국의 사회구조 자체를 인식해 나갔다. 설문지 조사를 통해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언론에 알려 여론을 환기시켜 보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과 삼동친목회라는 소수의 힘으로는 이 사회 구조와 국가 체제를 전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았다. 숱한 번뇌와 고민의 나날을 보낸 끝에 전태일은 자신의 온몸을 횃불로 태워 인민들에게 충격의 깨달음을 주고자 소신공양을 선택했던 것이다.
전태일은 개돼지였던 한국의 인민이야말로 낡은 구체제를 바꿀 수 있는 주체임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노동자 농민에게 있음을 한국 인민들에게 고한 생생한 웅변가였다.
6.25 한국전쟁의 남북 적대적 공존 아래 군사독재의 빨갱이 사냥으로 도무지 숨조차 쉴 수 없었던 한국 민주주의에 비로소 숨통을 열어 준 민주주의의 해방자였다.
전태일은 한국의 주권자 민주주의 지평을 비로소 활짝 열어젖힌,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폭발을 17년 앞서서 보여준 직접 민주주의의 폭발이었다.
기후위기는 정치위기다
기후위기는 치료해야 할 근대 사회와 국가의 질병이다. 탄소중독 국가와 사회는 성장과 개발의 근대 산업화가 낳은 기형의 체제다. 근 200년 이상 자연을 착취하고 수탈해서 풍요를 누려온 사회와 국가에게 자연이 되돌려 준 부메랑이다. 문제는 이런 국가와 기업을 바꾸고 산업화 체제를 바꾸어야 할 현실정치가 오히려 기후위기를 심화시켜 왔을 뿐이라는 데 있다.
서구와 한국의 엘리트 대의정 정치는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은 이제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1992년 185개국 정부대표단이 모인 리우정상회의 이후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국제회의가 있었다. 교토의정서와 파리기후협약도 체결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이산화탄소는 엄청난 속도로 증가하고 있을 따름이다. 기후위기는 정확히 대의정 체제의 한계와 종말을 보여주는 정치위기인 것이다.
기후위기의 해결책은 결국 정치에 있다. 결코 과학기술이 기후위기를 해졀해주지 못한다. 모든 기후위기 행동의 도착지는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정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기후생존 정치다.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인민이 멸종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격렬한 신기후 체제 전환과 이행의 정치투쟁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국가와 기업의 성장 정치, 가면을 쓴 음습한 여의도 극장정치를 끝장내야만 하고 끝장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주권자에 의한, 주권자를 위한, 주권자의 풀뿌리 민주주의 기후정치, 그것이 기후위기에 적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탈출구다.
1987년 노동자와 농민, 학생, 재야민주화운동, 야당 정치인 등은 연대연합의 운동정치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직선제 헌법 개정과 함께 6공화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그 직후 다시 돌아온 선거정치는 운동정치의 연대연합을 허망하게 무너뜨리고 말았다.
무너졌던 운동정치가 다시 연대연합을 통해 부활한 것이 2016/2017 촛불혁명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운동정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선거정치의 냉엄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촛불을 통해 시민에서 주권자로 한 차원 높게 각성한 인민들은 이제 극장정치의 단순한 관객으로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는다. 주권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운동정치는 노동현장을 비롯한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이전과는 사뭇 다른 연대와 연합의 운동정치 무지개를 꽃피우는 중이다.
역설이지만 대의정의 선거는 주권자의 연대연합 직접 민주주의 정치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폭넓은 정치 무대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특히 풀뿌리 지역에서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연합정치 전략을 지역 실정에 맞게 무궁무진하게 펼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 전략은 성공한 연합정치 전략의 대표 사례다.
기후위기 시대 기후정치의 중심은 여의도가 아니라 밑바닥 풀뿌리 지역이다. 지역 주민들이 기후비상행동에 나설 때 비로소 혁명에 가까운 온실가스 감축은 가능해진다.
주권자인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주민을 조직하고 지역정치의 권력자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후정치 운동이다.(☞ 참고 :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왜 실패했나', '한국 정치의 현장은 시군구 지역이다')
지금은 좌우가 아니라 좌고우면하지 말고 상하를 뒤집어엎어야 할 때
1994년 부자들만 납치해 잔인하게 살인하고 아지트에서 화장한 충격의 지존파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부자들을 증오하고 죽이자는 강령까지 만들었다. 21세기 한국 사회는 수많은 지존파가 속출할 수 있는 여건이 성숙되어 있는 위험천만한 사회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벌과 언론, 검사와 판사, 여의도 정치인, 관피아 등 대한민국 1% 상류계급의 대를 이른 부와 갑질은 이미 혁명이 아니고는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확해지고 있다. 대한항공 일가족의 행패,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손녀의 행패는 빙산의 일각이다.
촛불 정부를 자처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는 이미 실망과 분노로 점점 기울어가고 있는 중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거의 없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아 주식에 투자한다는 '영끌'이라는 말은 이를 표현한 말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청년이 미래가 없다고 자포자기할 때 혁명은 일어난다.
지금 한국의 절반에 가까운 무주택소유자들의 골방과 원룸과 지하 단칸방, 공장과 택배회사의 물류센터 등 우리 사회 '밑바닥 인생'들이 사는 곳에서는 고삐 풀린 시베리아의 메탄가스처럼 혁명이 보글거리는 중이다
1960년대 비틀즈는 시대를 앞선 문화운동이었다. 비틀즈의 노래는 68혁명의 전주곡이었다. 방탄소년단의 위로와 소통, 평화의 노래말은 다가오는 청년과 밑바닥 인민들의 비폭력 민주주의 혁명 전주곡으로 들린다.
전태일은 넘을 수 없는 벽과 싸웠고 마침내 민주주의 혁명을 옥죄고 있던 감옥 문을 무너뜨렸다. 기후를 위한 '금요 결석 시위'를 벌이는 청소년들은 성장과 개발의 기득권 정치와 싸우고 있는 21세기 전태일들이다. 과연 기성세대는 이들 주권자 기후혁명과 전환의 결사대들 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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