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왜 실패했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왜 실패했나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왜 실패했나] ②

전제 1. 토론은 인신공격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민주주의의 토론과 회의 문화를 성숙시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정치 토론의 경우에는 어떤 견해와 주장에 대한 찬반 의견이 곧바로 그 주장과 견해를 표명한 사람에 대한 격렬한 호오의 감정과 인신공격으로 전환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 토론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게 목적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정치 쟁점에 대해 회의하고 토론하는 것은 그 쟁점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견해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고 검토하고 논의하고 그리고 의결을 거쳐 실행에 옮기기 위한 것이다. 결코 그런 주장과 의견을 발표한 당사자의 인성과 이력과 사생활을 논의하는 게 아니다.

회의와 토론의 전제는 자유인이자 주권자인 인민 개개인에 대한 인정과 경청이다. 살인과 침략 전쟁을 선동하지 않는 한 어떤 주권자의 주장이든지 동등하게 인정하고 경청해야 한다.

정치조직과 정당, 단체 등에서 주장과 견해에 따라 형성되는 의견 그룹과 정파는 당연한 일이다. 어떤 한 사람이 정보와 지식의 습득에 따라 초기의 의견과는 전혀 다른 의견을 갖게 되는 것도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의견과 주장이 아니라 인간관계에 따른 파벌이 조직을 분열시키는 일을 부지기수로 목격한다. 조직 내 권력을 다투는 노선투쟁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파벌의 권력투쟁은 재벌의 행태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인신공격과 토론을 구분하고 파벌을 지양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필자에게도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민주주의 토론문화의 틀 안에서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백화제방의 갖가지 주장과 의견이 난무해야 한다. 격렬하고 때로는 첨예하기까지 한 논쟁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이다.

전제 2. 민주주의는 대의정이 아니다

대의정과 민주주의는 명백히 다른 정치 체제다. 대의 민주주의니 간접 민주주의니 하는 용어는 인민을 우매한 개돼지로 치부하는 일부 엘리트 정치학자들이 만들어 낸 명백한 교언영색의 사이비 이론이다.

정치 체제 가운데 하나인 민주정(democracy)을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로 끌어올려 사용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3개국뿐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왕의 나라에서 인민의 나라로 국가를 바꾸고자 했던 동양 3국 지식인과 정치인들의 열망이 그만큼 뜨거웠기 때문이다.(배병삼, <우리에게 유교란 무엇인가>, 녹색평론, 2012.)

민주주의는 주권자가 통치자이자 피통치자인 이중 정체성을 갖고 국가를 운영하는 인민의 통치 체제이다. 인민이 국가의 주요 정책을 발의하고 그것을 인민이 국민투표로 결정한다.

이와 달리 대의정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소수 엘리트가 국가 주요 정책을 발의하고 결정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핵심 지표는 선거가 아니라 국민발의와 국민투표다. 서구의 지방정부나 일부 연방정부에는 주민(국민)발의제가 도입되어 있고 대부분의 서구 국민국가는 이같은 민주주의와 대의정 의회 제도의 혼합 정치체제다.

정치는 쪽수다

쪽수: 신문이나 책 지면의 수효(국립국어원)

우리는 흔히 사람 숫자를 나타낼 때 쪽수란 표현을 쓴다. 낮춤말로 쓰기보다는 숫자를 강조하기 위해 강렬한 표현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강력한 강조의 의미로 정치는 쪽수다. 주권자인 인민의 숫자가 정치를 결정한다. 그게 사회성 동물인 사람의 사회, 근대 국민국가의 정치 현실이다. 현실 정치에 원칙과 정도란 없다. 만약 있다면 오직 하나. 정당을 포함한 정치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전체 주권자 가운데 다수 세력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의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러시아 사민당 내에서조차도 소수파였다. 그러나 레닌은 ‘이스크라’라는 당 기관지의 비밀 지하배포 조직망을 다단계로 밑에서부터 조직화 해 혁명 전위를 육성했다. 지역과 공장 등 인민이 모여 있는 곳의 세포 조직에서부터 시작해 점 조직으로 당의 중앙위원회까지 연결되는 조직 구성은 생명을 지닌 유기체처럼 일사분란하게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었다.

레닌은 이런 다단계 조직으로 당을 장악했고 혁명 시기에는 소비에트를 장악한 뒤 마침내는 쿠데타를 일으켜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레닌의 전위 조직론이다. 당의 전위 활동가가 대중 단체에서 프랙션(일명 프락치)으로 활동하면서 다단계로 당원을 확대하는 방식은 조직론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 역시 당 조직의 근간은 밑바닥의 일반 당원 조직이었고 다단계 조직론을 충실히 이행한 정당 조직이었다. 1920년 창당 당시 2천명의 당원은 1933년 집권 시에는 250만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이런 풀뿌리 당조직을 기반으로 선거에서 제1당을 차지했고 수상으로 집권하자마자 나치 독재체제를 향해 나아갔던 것이다.

풀뿌리 조직 확대 전략의 원형, 다단계

하필이면 레닌의 공산당과 히틀러의 나치당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 사민당과 독일 나치당의 선전선동과 조직 확대 전략은 대중정치 조직론의 전범이자 교과서다.

이들 정당이 개발한 다단계 정당 조직론의 원조는 종교 단체의 조직론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 조직론이다. 종교단체의 다단계와 폰지 사기의 다단계 차이는 하나밖에 없다. 종교단체는 신앙을 매개로 한 조직이고 폰지 사기는 돈을 매개로 한 조직일 뿐이다. 정당은 신념과 권력을 매개로 한 다단계 조직이다.

생각을 바꾸고 그리고 생각을 바꾼 사람들을 조직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종교 조직이건 정당 조직이건 이것은 만고의 진리다. 코로나 사태에서 단연 주목받은 어느 종교단체의 조직 방식도 바로 다단계 조직, 전위활동가 조직 방식이었다.

예수의 12제자는 조직화 전략의 강력한 상징이자 핵심이다. 인간 행동의 최소 단위는 10명 안팎이다. 이것은 다른 동식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사회성 생물체가 지금까지 진화를 통해 그렇게 적응해 온 결과다. 군대의 분대원 수가 10명 안팎에서 운영되는 것도, 종교 단체의 기본 조직 단위가 10명 안팎인 것도, 공산당의 세포 조직원 수가 10명 안팎인 것도 이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인 로빈 던바는 사람이 사회관계를 맺을 수 있는 최대치를 150명이라고 보았다. 던바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 이를 ‘던바의 수’라고 명명했다. 아마존 원시부족 공동체의 평균 구성원 수도 150명 안팎이다. 구성원 수가 약 200명을 넘어서면 공동체의 일부가 따로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나간다. 조직론의 시금석인 군대의 중대 단위 구성원 수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약 150명 안팎이다.

에리카 체노웨스는 국제 비폭력 갈등 센터(ICNC)의 연구원 마리아 스테판과 함께 1900년부터 2006년까지 총 323개의 전세계 인민 저항행동 사례를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2011년 사람들 눈에 확 들어오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다.

인구의 3.5%가 저항에 참여하면 거대한 정치변화가 일어났다. 비폭력 저항운동이 무장투쟁보다 4배나 더 많은 참여를 이끌었고 성공률도 두 배나 더 높았다(☞ 관련 기사 : <비비시 뉴스(BBC NEWS) 코리아> 2019년 9월 22일 자 '3.5%법칙: 소수는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체노웨스의 3.5% 법칙은 사회성 동물인 인간의 세상, 지역공동체와 사회, 국가 운영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그 해법의 일단을 시사해준다. 3.5%의 법칙은 한국의 그 어떤 시군구 지역 단위에서도 소수가 지역사회를 바꿀 수 있는 전략의 기본 전제다.

장황하게 상식 수준의 조직이론과 숫자를 열거한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도원결의한 3명이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생각을 바꾼 수십 명의 활동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비폭력 평화의 촛불 쪽수가 전인구의 약 3.5%가 되었을 때 승리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네트워크 연결자 쪽수가 정치를 결정한다

오늘날 사람들의 무리생활은 다양한 결사체들과 네트워크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네트워크는 결사체와 달리 회의와 의결 절차를 거친 집행기구, 의결기구, 감사기구가 없다.

근대 국가와 사회 안에는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과 함께 다양한 결사체들이 존재한다. 기업, 군대, 학교도 있다. 동창회, 친목회도 있다. 각종 시민사회운동 단체와 정당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조직 이외에 21세기 들어 디지털 뉴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인스타그램 등 SNS 디지털 사회관계망이 등장했다. 이들 디지털 네트워크는 인간 인식과 생활 세계의 혁명과 함께 기존의 대면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엄청난 규모로 네트워크의 증가와 확산을 가져왔다.

디지털 네트워크의 시대에 네트워크의 쪽수를 결정하는 것은 지도자와 함께 노드라고 부를 수 있는 연결자의 활동력에 크게 좌우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의 현실 정당정치는 새로운 쪽수의 정치를 요구한다. 주권자 인민의 힘은 닫힌 오프라인 연대의 쪽수와 함께 온라인 네트워크 상의 열린 네트워크 쪽수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된다.

국가의 탄생 이래 지금까지 국가의 힘은 무력이었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에도 세상을 바꾸는 힘은 무력이었다. 합법화된 폭력인 군대와 경찰, 사법의 힘이 세상을 바꿨다. 그러나 21세기 세계화된 세상의 힘은 이제 폭력이 아니라 동일한 주장과 의견을 갖은 사람들의 쪽수다. 쪽수가 세상의 모습을 결정한다.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에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다름아닌 2016/2017년 한국의 비폭력 촛불혁명이었다.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왜 실패했나

4.15총선 결과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거의 붕괴 수준으로 참패했다. 정의당의 비례 지지도 9.67%를 놓고 그래도 선전했다는 평가도 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런 시각 안에 갇혀서는 앞으로 진보정당 운동의 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곧바로 말라 죽는다. 뿌리를 잘 내리지 못한 나무도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이윽고는 강풍에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가 버린다. 한국의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뿌리가 없는 창공이 공중전 정당 운동을 해왔다. 말이 좋아 민주대연합의 공생 전략이지 좀 껄끄러운 표현으로 지적하면 기생 전략일 뿐이었다.

진보-녹색 정당이 비례위성 정당을 주도해서 20석을 얻었다한들 과연 멀지 않은 시점에 진보-녹색 정당이 집권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다.

한국의 진보-녹색 정당 정치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권자 쪽수 확대 실패와 풀뿌리 다단계 조직구조의 부재가 그것이다. 풀뿌리 지역에서 쪽수를 확대하기 위한 그 어떤 정치전략, 지역정치 활동의 촉진 전략, 지역정치 조직화 전략이 없었기 때문에 실패는 필연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의 진보-녹색 정당운동은 대의제 선거정치 단위인 전국 230여개 시군구 지역의 정치활동 뿌리가 아예 없거나 극히 미약했다. 이것이 실패의 핵심 요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