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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약자를 향한 연대의 말, '피해자 중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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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약자를 향한 연대의 말, '피해자 중심주의'

[페미니즘 용어 정리 ②]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 재생산권 보장, 피해자 중심주의, 강간문화…

최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이 주요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중요한 사건들도 많았다. 혜화역의 불법촬영 규탄 시위, 안태근 전 검사장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미투,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한 탈코르셋 운동 등. 페미니즘 이슈는 지금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체입법이 논의되는 중이고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의 가해자들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여러 사건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언어가 되어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주었다. 여성들은 '일상에서 당연했지만 동시에 불편했던'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공감하며 연대했다. 여성들의 연대는 불편함을 호소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프레시안>은 그동안 페미니즘 이슈에서 언급되었던 용어들을 취합했다. 많이 언급되었던 용어 중 '알 것 같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용어, 혹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용어를 정리하며 이를 둘러싼 논점을 짚어봤다. 편집자

"피해자 중심에서 해결해야 한다."

'피해자 중심'은 반성폭력 운동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다. 가장 크게 언급된 때는 문재인 대통령이 위안부 합의를 재검토하면서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해결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던 때다. 여기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맥락상 '피해자가 원하는 방식의 해결', '피해자가 사건 해결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걸로 보인다.

'피해자 중심'은 성폭력 사건 보도를 비판할 때도 많이 등장한다. 가령 '텔레그램 성착취사건'의 조주빈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거나, '웰컴투비디오' 손정우가 집을 사려고 해당 사이트 운영을 시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해자의 서사,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자라온 환경이나 있었던 일들을 보도하는 건 사건을 가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가해자에게 이해의 여지를 남긴다거나 범죄에 당위를 부여한다.

또 가해자 개인에게 집중하는 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회구조적 원인보다 가해자 자체를 악마로 만들어 사건을 '사회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가 아닌 '개인이 겪은 불우한 일'로 끝나게 한다.

여기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의 관점에서 성폭력 사건을 해석하고 서술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고 가해자를 정당화하지 않으면서 '누구나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 피해의 사회구조적 이유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피해자 중심, 피해자 중심주의

개별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피해자 중심주의를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구체적으로 '피해자 중심주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구체적인 설명은 어렵다. 명확한 정의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인터넷 사전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란, 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과 주장을 우선시하는 관점으로 특히 권력차이로 인해 발생하고 가해자의 보복이 쉬운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에서 피해자의 진술과 관점을 중시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피해자의 진술과 관점이 언제나 옳은가'라는 물음과 함께 '중시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전문가들 또한 피해자 중심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A 여성운동 활동가는 "사건을 해석하는 데 피해자의 관점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해자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 "피해자가 인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 "피해자가 사건 해결 전반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스펙트럼이 넓은 말"이라며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언급된 기사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방어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2차 가해가 이뤄질 때다. 또 사건 해결에 피해자가 배제될 때, 피해자의 인격권이 침해될 때 등에도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사건 해결을 촉구했다.

명확하게 합의된 정의가 없고 상황, 맥락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은 종종 정부와 유관 단체, 언론 모두 자기 편의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가령 2015년 위안부 합의를 두고 박근혜 정부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등한시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에서 정의기억연대 사태가 터지니까 그동안 피해자 중심주의에 가장 회의적이었던 보수 언론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를 언급하며 공격하는 식이다.

때문에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용어에 회의적인 이들도 있었다. "정의된 언어가 아니라 반성폭력 운동의 맥락에서 만들어져 온 말"이라며 "실체가 없는 말"이라는 답변도 있었다. 혹자는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공동행동. 유튜브 중계화면 갈무리.

권력의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용어이기 때문에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등장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공동체 내의 성폭력, 그중에서도 '운동사회 성폭력'에 대한 문제제기 과정에서 제안됐다.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지난 2000년 '운동사회 성폭력 뿌리 뽑기 100인 위원회'(100인위 운동)에서다. 100인위 운동은 노동운동 등 진보 운동사회 내 성폭력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는 운동이었다.

운동사회는 "진보의 가치를 추구한다"면서도 퇴행적인 가부장성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녔다. 내부에서 성폭력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피해자들은 '대의를 위해' 침묵을 강요당했다. 100인위는 이런 노동운동계 전반의 가부장성을 비판하며 성폭력이 이런 가부장적 구조의 연장선에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운동사회의 실질적 변화를 위해 성폭력을 공론화한다.

당시 100인위는 입장문을 발표하며 "그동안 은폐되어 온 성폭력 사건을 드러내고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고자 "성폭력을 바라봄에 있어서 어디까지 성폭력인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피해자 중심에서 사고되었을 때만이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라고 했다. 즉, '그게 성폭력이야?'라는 가해자식 사고방식에 제동을 건 것이다.

즉, 피해자 중심주의는 가해자 중심으로 정의되고 해석되던 성폭력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됐다.

100인위는 성폭력을 "피해자의 관점에서 판단된 모든 종류의 성적 자율권 침해"로 정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반성폭력 운동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것이기도 했다.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등장한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면 △성폭력 발생 여부를 판단할 때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판단해야 하고 △공동체는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시작됐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물론 명확한 정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00인위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피해자 중심주의의 의미도 조금씩 달라졌다.

반성폭력 운동·공론화 작업의 영역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성폭력 판단 기준에서 피해자의 관점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의미와 성폭력 문제 해결에 있어 피해자 편에 서야 한다는 당위로 귀결됐다.

의미가 모호하다는 문제는 성폭력 문제 해결 절차의 과정에서 드러난다. 피해자 중심주의적 해결이 무엇이냐 할 때 '피해자의 권리가 온전히 회복되고 완전히 치유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회복과 치유의 판단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라는 점이다. 이에 따라 성폭력 사건의 해결 또는 미결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는 오직 피해자라는 주장으로 이어졌고 피해자 중심주의는 사건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의 요구사항을 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안 모색으로 표현됐다.

이런 주장은 물론 개별적인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에서 피해 당사자 개인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절대주의' 아니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오해와 몰이해는 피해자를 절대화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피해자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를 의심하는 건 2차 가해라는 논리에서다. 이런 방식은 피해자를 '고통의 호소자', '보호되어야 할 존재' 등에 머무르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문가들이 가장 경계하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은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이런 해석은 '여자의 말이면 다 믿어줘야 하느냐'는 백래시를 유발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를 피해자다움에 갇히게 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피해자가 자신의 절대성, '순수하고 완전한 피해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이런 이유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표현에 회의적이다. '피해자 관점'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중심주의'라는 표현은 강력하고 명확해 보이지만 오히려 페미니즘의 지향을 드러내는 공통언어로는 부정확하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에게 사건의 판단 기준 전체를 위임하는 것도,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도, 피해자에게만 피해 경험을 해석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아니"라며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기억하고 어떤 경우 기억은 왜곡되기도 한다. 이건 성폭력 피해자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권김 활동가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공동체 내 성폭력 공론화 운동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론의 장에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진술의 검증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피해자가 절대적으로 옳고 피해자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면 2차 가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사건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물론 공론장은 평평하지 않다. 그는 "여기에 권력의 불균형이 작용한다. 예를 들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별장에 가지 않았다'고 수십 번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밝혀져도 그를 거짓말쟁이라 비난하거나 그의 모든 진술을 부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이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나온 일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가해자의 거짓말에 놀랄 만큼 인간적인 반응으로 이해해주는 편이다. 그런데 피해자가 진술 과정에서 한두 가지 실수를 했을 때 피해자의 진술 자체를 부정해버린다"면서 "이런 권력의 불균형 속에서 피해자에게 연대하는 건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 전에는 피해자의 말을 불신했다면 이제는 "신뢰하되, 검증하라"라는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피해자의 진술이 있고 이에 배치되는 가해자의 진술이 있을 때 당시의 정황과 다른 증언 등을 바탕으로 누구의 진술이 더 합리적이고 믿을만한지 가려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이미 법정에서 이런 방식으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이 합리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거쳤을 때에야 유죄로 결정되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그런 합리성 획득의 과정이 없는 것처럼 오인하게 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이런 과정 속에서 피해자 또한 피해를 당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고 공동체 안에서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으로 매우 역동적으로 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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