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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가 말하는 '재생산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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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낙태죄 폐지가 말하는 '재생산권'이란 무엇인가

[페미니즘 용어 정리 ①] 재생산권

2차 가해, 재생산권 보장, 피해자 중심주의, 강간문화….

최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이 주요 화두 중 하나로 떠올랐다. 중요한 사건들도 많았다. 혜화역의 불법촬영 규탄 시위, 안태근 전 검사장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미투,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한 탈코르셋 운동 등. 페미니즘 이슈는 지금도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체입법이 논의되는 중이고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의 가해자들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여러 사건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언어가 되어 여성들에게 목소리를 주었다. 여성들은 '일상에서 당연했지만 동시에 불편했던' 경험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공감하며 연대했다. 여성들의 연대는 불편함을 호소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프레시안>은 그동안 페미니즘 이슈에서 언급되었던 용어들을 취합했다. 많이 언급되었던 용어 중 '알 것 같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용어, 혹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용어를 정리하며 이를 둘러싼 논점을 짚어봤다. 편집자

"정부 입법예고안이 여성의 자기결정권 존중이라는 법개정 취지에 반하는 명백한 후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상담 등의 절차를 통해 여성에게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여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돕겠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낙태죄를 존치하고 임신중지를 각종 사유과 절차로 규제하고 억제시키는 것이다. 임신중지를 국가에게 허락받지 못하면 죄인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명백히 퇴행적인 개정안이다.

정부는 형법상의 처벌 조항을 완전히 삭제하라. 새로운 낙인과 허용의 기준이 아닌 임신중지를 필수 의료행위로서 공공의료 영역에서 보장하는 법과 정책이 필요하다. 위기임신에 대한 예방 사업이 아닌 임신중지와 유지, 출산과 양육 전반의 성과 재생산의 권리에 대한 지원 사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라."

지난달 발표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 성명서의 일부다. 여성계는 그동안 꾸준히 형법상 낙태죄와 모자보건법상 낙태허용사유를 폐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성과 재생산 권리 보장"을 촉구했다.

여성계가 요구해온 '낙태죄 폐지'는 '합법화'와는 다르다. 형법을 폐지하는 건 더 이상 범죄로서 처벌하지 않는다, 즉 '비범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합법화는 제도적인 규율을 만들어 국가의 관리 하에 두는 것을 말한다. 비범죄화한 영역으로 '간통죄'가 있다.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란 무엇인가

이와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는 '성과 재생산의 권리'다. 정확하게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 SRHR)'다. SRHR은 구체적으로 △성 건강 △성 권리 △재생산 건강 △재생산 권리 네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성'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직관적으로 알기 쉽다. '성 건강(Sexual Health)'은 질병이나 기능 저하, 장애가 없는 상태뿐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사회적인 복지 상태를 말한다. 성 권리(Sexual Rights)는 인권으로서 모든 사람이 차별과 강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반면 '재생산'은 표현부터 낯설다. '재생산 건강(Reproductive Health)'에 대해 국제사회는 "생식기나 재생산의 기능과 발달 과정에 단지 질병이나 병약해지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상태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또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는 "모든 부부와 개인이 자녀의 수와 자녀를 가질 시기에 대해 자유롭고 책임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는 권리, 해당 선택을 이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하는 권리,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재생산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기반으로 두고 있다"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재생산 권리는 △차별과 강압,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생산 관련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 △사생활 보호 및 비밀유지, 존중과 동의를 받을 권리 △상호 존중하고 평등한 (젠더) 관계를 가질 권리를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기자회견 ⓒ연합뉴스

재생산권, 임신·출산을 포함한 권리

'재생산 건강'이나 '재생산 권리'의 정의에 비춰볼 때 재생산은 임신과 출산을 포함하여 인간의 생식 활동에 관련된 제반의 건강과 활동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유추된다.

나영 성적권리와재생산정의를위한센터 셰어SHARE 대표는 '재생산 건강'과 '재생산 권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로 reproductive rights 라고 이야기하는 개념을 '생식권'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생식권'은 좁은 의미의 해석이다. '재생산 건강'과 '재생산 권리'는 단순히 생식에 관한 기능적 차원을 넘어 한 사람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과 건강을 유지하고 또 다른 사회 구성원을 만나거나 양육하는 일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나영 대표의 말을 종합하면 '생식'이 개인 차원의 개념이라면 '재생산'은 공동체 차원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임신과 출산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동체가 유지·존속하기 위해서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임신과 출산을 위한 사회적 조건을 마련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따라서 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일은 단지 임신과 출산에 관한 개인의 권리가 아닌 사회 구성원들의 관계와 삶을 건강하고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공동체의 책임과 연결된다. 파트너십, 가족구성, 성관계, 피임, 임신, 출산, 임신중지, 양육을 포괄하는 권리이자, 이 모든 활동이 차별없이 보장되기 위한 노동, 교육, 보건의료, 환경 등에 관한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여성의 인권'에서 '보편의 인권'으로 확장돼 온 재생산권

국제사회에서 재생산권이 논의되기 시작한 건 1979년 12월 UN 34차 총회에서 '여성에 대한 모든 형태의 차별철폐에 관한 협약', 일명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을 공식 채택하면서다.

이 협약은 제16조에서 결혼과 가족관계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한 권리로서 '성과 재생산 건강 및 권리'가 포함됐다. 당시에는 임신과 출산에 있어서 여성의 신체적 자기결정권과 건강권, 출산과 성에 대한 양성 평등권을 중심으로 각 나라의 문화와 전통이 불평등한 젠더 역할과 가족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생산권은 1994년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ICPD)에서 채택한 카이로 행동강령에서 좀 더 구체화된다. 이 강령은 재생산권을 '모든 부부와 개인이 자녀의 수와 이에 관한 시간적, 공간적인 환경을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 그리고 그들에게 최고 수준의 성적, 재생산적 건강 상태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과 차별, 강압,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재생산에 관한 결정을 내릴 권리를 포함'한다고 정의한다. 이 강령을 계기로 재생산권은 포괄적인 인권의 틀로 인정받게 된다.

재생산권은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세계여성회의에서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채택한 베이징 행동강령은 재생산권을 '임신과 출산의 여부와 시기 및 빈도와 관련한 개념뿐만 아니라 성 관계의 여부와 시기 및 대상에 대한 여성 스스로의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권을 의미하는 성 건강 및 권리 개념'을 포함한다

주목할 점은 '여성 스스로의 자유롭고 책임감 있는 결정권'이라는 부분이다. 재생산권은 임신과 출산, 양육 환경에서 나아가 여성의 만족스럽고 안전한 성생활, 재생산 능력 그리고 그 시기와 방법을 결정할 자유를 포함해 재생산 활동과 관련해 어떠한 강제와 차별, 그리고 폭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방향으로 확장해왔다.

이후 2003년 유엔인권위원회가 건강권 측면에서 '모두가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 성과 재생산 건강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결의문을 채택하며 인권으로서 재생산권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나 2003년 이후 각국의 문화적 입장 차이로 재생산권은 잠시 논의가 중단된다. 그러다 2016년 유엔의 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 22호에서 다시 등장한다.

유엔은 국가가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모든 개개인이 성과 재생산 관련 의료시설과 정보 및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차별 없이 권리를 행사하도록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낙태의 범죄화는 개인의 성과 재생산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어 이와 관련한 법과 정책은 폐지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8년, CEDAW는 대한민국 정부에 낙태죄 비범죄화와 함께 임신중절을 한 여성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촉구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의 낙태죄 완전 폐지 촉구 퍼포먼스 ⓒ연합뉴스

낙태죄가 아닌 재생산권 보장이 필요하다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활용하는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SRHR)에 대한 통합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단지 질병이나 기능 저하, 장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안녕한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섹슈얼리티와 생식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은 자존감 증진과 전체적인 안녕 상태의 즐거운 성 관계와 상호간의 신뢰와 소통이 전제가 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자율적인 선택을 할 권리가 있으며 해당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서비스로의 접근 또한 보장돼야 한다. 성·재생산 건강은 성·재생산 권리의 인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성과 재생산 권리는 모든 사람들이 다음의 권리를 보장 받는 것을 의미한다.

△신체에 대한 온전성, 개인정보 및 자율성이 존중될 권리 △성적 취향, 성 정체성, 성적 표현을 포함하여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정의할 수 있는 권리 △활발한 성생활 추구 여부와 시기에 대한 결정 권리 △성적인 관계를 맺을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즐겁고 안전한 성경험을 가질 수 있는 권리 △혼인 여부와 누구와 언제 결혼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자녀를 가질 여부와 언제, 어떠한 수단으로, 몇 명의 아이를 가질지 결정할 권리 △살면서 위에서 명시된 모든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서 강압, 차별,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필요한 정보, 자원, 서비스, 지원을 받을 권리.

형법상 낙태죄는 SRHR을 침해한다. 현행 낙태죄는 어느 개인이나 커플이 자유롭고 책임감 있게 출산 여부,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고 이를 위한 정보와 수단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와 상충된다.

임신중지 허용 사유를 규정한 모자보건법 제14조 1항도 마찬가지다. 이 조항은 우생학적으로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의 임신중지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그러나 장애나 질병이 있는 사람에게 임신중지를 강요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재생산권의 정의나 그 취지를 봤을 때 장애나 질병이 있더라도 임신과 출산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이들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양육을 보장해야 한다.

이번 낙태죄 관련 정부안은 임신 주수, '사회·경제적 사유'에 따라 제한적으로 임신중지를 허용한다. '처벌과 허용' 방식에서는 재생산권은 어떤 방식으로든 침해된다.

'어떤 상황에 있으면 임신중지를 할 수 있다'가 아니다. '개인이 어떤 사회적 조건 아래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재생산권 논의의 핵심이다.

'낙태죄'의 벽을 넘지 못한 한국은 재생산권 관련 연구가 임신과 출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임신중지 비범죄화는 재생산권 연구의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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