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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가제라는 문화 가꾸기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11

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 일단 우여곡절 끝에 폐지하지 않고 현행을 유지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도서정가제의 쟁점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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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로서 나, 편집자로서 나

여느 출판인들처럼 나는 책을 사는 소비자에서 시작해 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한 달에 수십만 원의 책을 구입하는 ‘헤비 소비자’에 속한다. 결코 대단한 일은 아니다. 출판업계 평균 정도의 소비자일 뿐이다. 대부분의 출판인들은 책을 누구보다 많이 사들이는 충실한 소비자들이기도 하다.

출판인들이 책을 사는 소비자의 마음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자신이 만들지 않은 책을 구입할 때는 한 사람의 소비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출판인들은 생산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소비자 개인으로서도 도서정가제를 지지한다. 그 이유를 간단히 밝혀보려 한다.

도서정가제는 2003년에 처음 도입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발행 18개월이 지난 책은 정가제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었고 무제한 할인이 가능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서는 정기적으로 구간 도서의 반값 할인 행사를 진행하곤 했다. 온라인에서 책을 많이 사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했던 셈이다.

당시 출판인이 아닌 소비자이기만 했던 나에게도 그런 반값 할인 행사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당장 읽을 책이든 아니든 반값 할인 행사만 하면 마구 구입했던 기억이 아직도 흐릿하게 남아 있다. (그때 샀던 책들은 반의 반도 읽지 못했으므로 좋은 소비는 아니었다.)

그런데 출판인이 되고 나서 그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되면서 거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소비자로서 단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 출판 생태계를 붕괴시키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반값 할인 행사를 하는 책을 구입하면 ‘소비자로서 나’는 두 배나 많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겠지만, 같은 시간에 ‘편집자로서 나’는 힘들게 만들었던 책을 원래 공급률의 반값도 되지 못하는 20~30%의 최저 공급률로 온라인 서점에 공급해 푼돈이나 건져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내가 책을 싸게 구입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은 동료 출판인들이 푼돈을 받으면서 책을 헐값에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반값 할인은 할인 공급과 반품이 용이한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에서는 쉽게 가능하지만, 공급률을 쉽사리 변경할 수도 없고 반품 확인도 용이하지 않은 동네서점에서는 진행하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요컨대 구간의 무제한 할인이 만들어내는 실제 효과는 단순히 모든 독자들을 온라인 서점으로 유도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동네서점은 모조리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온라인 서점에서 한번 싸게 산 소비자들이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려는 마음을 점점 더 품지 않게 될 테니 말이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마치 손해 보는 것 같은 희한한 느낌은 모두 이런 이상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출판사들이 반값 할인을 미리 상정하고 도서 정가를 비싸게 매김으로써 책의 가격이 급속히 올라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식의 행태가 지속 불가능한 일이며 나아가 출판 생태계를 서서히 붕괴시키는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만한 일이었다. 소비자로서 나의 즐거움은 잠깐이지만, 한번 붕괴된 생태계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2014년에 강화된 도서정가제란 할인 제한을 통해 온라인 서점과 동네서점의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여 이와 같은 출판 생태계 붕괴를 막으려 한 최소한의 공통 규범이었다.

도서정가제라는 문화

엊그제 문화체육관광부가 도서정가제를 큰 틀에서 현행과 같이 유지하기로 결정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도서정가제가 출판산업 생태계에 미친 긍정적인 효과를 고려할 때 폐지하거나 크게 변경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출판단체에서도 같은 이유로 도서정가제의 개악을 반대해왔으며 대다수의 지역서점도 같은 입장을 표명해왔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그렇게 당분간 유지 존속되는 길을 밟는 중이다.

그러니 도서정가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이 글이 더 길어질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사족을 덧붙이고자 한다. 도서정가제는 이제 제도적 논란이 되는 단계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로 정착해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도서정가제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특이한 제도가 아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그리고 일본에서도 강력하게 유지하고 있는 제도이다. 그 나라들에서 도서정가제는 이미 오래된 문화로 정착되어 있기에 그 존폐에 대한 논란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도서정가제를 시행하지 않는 나라도 여럿 있으며, 각국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그 세부 내용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도서정가제를 통해서 각국이 확립하고자 하는 가치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그 가치란 바로 공존과 공생이다.

도서정가제는 그 세부 형태가 어떠하든 작가, 출판사, 책방, 독자의 공생을 도모하고, 작은 출판사와 동네책방을 보존하며, 도서의 다양성을 장려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공정한 경쟁 질서의 확립을 통한 공존과 공생이라는 취지에 동감하지 않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서정가제는 이 목적과 취지를 실제로 이뤄내고 있다. 도서정가제 이후 도서는 더욱 다양해졌고 동네서점은 곳곳에서 새로 들어섰다. 이 공존의 가치에 반대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를 긍정한다면 도서정가제라는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도서정가제가 이런 목적과 취지를 이루는 데 최선의 제도라는 점은 2019년 독일에서 발표된 도서정가제 평가보고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해외통신을 참고하라. 장성준, “도서정가제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하나의 제도는 어떻게 하나의 문화가 되는가? 물론 충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한 한 세대의 시간은 흘러야 제도는 문화가 될 수 있다. 본격 도서정가제가 시행된 지 고작 6년밖에 안 되었으므로 엄격한 평가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의 민주주의 문화가 제도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정착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처럼, 도서정가제도 제대로 정착되고 이해되려면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 따져보자. 도서정가제 시행으로 ‘소비자로서 나’의 후생은 줄었을까? 분명 반값 할인 도서를 구입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그 점에서만 보면 후생은 줄어든 것 같다. ‘할인의 추억’ 때문에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서 몇 개월 동안은 갑자기 비싸 보이게 된 책을 사는 일을 주저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수록 ‘할인의 추억’은 희미해지고 이제는 예전처럼 책을 사는 일이 점점 거리낌이 없어지고 있다. 예전보다 도서 구입에 조금 더 신중해졌는지 모르겠지만 필요 없는 책을 사지 않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혹시라도 중고책이 있으면 중고책을 사게 된 정도가 변화일까? 이제 도서정가제는 얼마간 정착기에 접어들고 있다.

하나의 제도를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키려면 많은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 이제는 도서정가제를 단순한 제도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문화로서 가꾸어야 할 시기다. 도서정가제 속에서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낼까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이번 개정 논의와 관련해서 문화체육관광부는 재정가 제도의 활성화를 다음 목표로 내걸었다. 정가변경 허용 기준을 현행 18개월에서 12개월로 완화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상상도 가능해질 수 있다. 신간 판매 이후 재정가를 통해 책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책 가격이 지금보다 좀 더 다원화될 수 있다면, 책 가격의 경직성에 대한 현재의 불만도 얼마간 누그러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 지키는 모든 법과 제도는 우리가 살고 싶은 문화의 미래를 만들기 위한 우리 자신의 결정과 바람을 담고 있다. 약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여전히 고쳐야 할 지점이 있더라도, 이미 도서정가제는 우리 문화의 일부로서 우리가 가꾸어야 할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전자출판물 등과 관련해 여전히 조정해야 할 사항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도서정가제가 추구하는 공생과 공존의 가치를 공유한다면, 어떤 개선도 가능하다.

박동수: 사월의책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재직 중이다. 현장 편집자들과 함께 ‘편집자를 위한 철학 독서회’를 진행하고 있다. 함께 쓴 책으로 <한편 1호 세대>가 있으며, 함께 옮긴 책으로 <리믹솔로지에 대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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