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현대카드·캐피탈 본사 로비 정 중앙에는 영국의 팝아티스트 줄리안 오피가 만든 2m 높이의 LED 설치 작품 '사라, 워킹, 브라 앤 팬츠'가 있다. 작품 속 '사라'는 어디론가 하염없이 계속 걷고 있다. 밤에도 낮에도, 평일에도 공휴일에도. 제목 그대로 상의에는 브래지어만 걸친 여성의 모습으로.
설치 작품을 설치된 그 장소와 완전히 분리하여 해석하거나 감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광화문 흥국생명 건물 앞에 설치된 해머링 맨을 보자. 작가 조나단 보로프스키는 노동자 계층에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앞에서 복직 투쟁을 해야 했던 흥국생명 해고자들은 쉬는 날 없이 망치질을 하는 해머링 맨을 바라보며 마치 망치가 자신들을 찍어내는 듯한 비정함을 느꼈다. 재직 중인 흥국생명 노동자들은 해머링 맨을 보며 '한시도 쉬지 말고 일하라는 회사의 의도'를 읽어내기도 했다. 설치 작품에 전시 공간의 메시지가 덧씌워진 탓이다.
현대카드 '사라, 워킹, 브라 앤 팬츠'로 다시 돌아와 보자. 지난해 9월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 산하 현대캐피탈지부가 설립됐고, 그 뒤를 이어 올 2월 현대카드와 현대커머셜지부가 설립됐다. 이렇게 노동조합이 생겼지만, 현대 금융 3사는 단체교섭 내내 거의 유사한 사측안을 제시하면서 시간만 끌고 있다.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현대커머셜 대표이사는 교섭장에 얼굴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바꿔내기 위해 사무금융노조는 지속적으로 현대카드 본사 앞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투쟁 과정에서 '사라, 워킹, 브라 앤 팬츠'가 불편하다는 문제 제기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노동의 공간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이 작품과 마주한 이들의 감상은 다를 수 있다. <서울경제> '건축과 도시-현대카드 사옥/겉모습 밋밋해도 속에는 창의성 자극하는 '다른 세상'' 기사에서 기자는 해당 작품에 대해 "어디론가 계속 걷고 있는 인물(사라)을 LED로 표현한 것으로, 방향을 잃고 하염없이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의 공간에서 이 설치 작품과 마주한 노동자들은, 상의도 입지 않은 채 끝도 없이 걷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며 모욕감과 압박감을 느낀다. 개별 노동자를 상징하는 듯한 이 작은 LED 점선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 결국 대상화된 여성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물론 이건 줄리안 오피나 사라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현대카드는 언제나 '세련'이라는 키워드를 마케팅 전략의 전면에 내세워왔다. 정태영 부회장이 평소 예술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브랜딩 전략에 예술과 문화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내용의 찍어낸듯한 기사도 철마다 나온다. 이런 류의 기사에는 그가 활발한 소통과 수평적 기업문화를 강조한다는 평가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동자 보호를 요구하는 노동조합을 대하는 태도, 본사 로비 정 중앙의 설치 작품만 봐도 현대카드의 기업문화, 정태영 대표의 철학이 보도자료, 협찬 기사와 얼마나 다른지는 짐작 가능하다. 그 괴리를 견디며 노동자들은 오늘도 묵묵히 일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흥국생명 앞 해머링 맨은 주말과 공휴일에는 망치질을 멈춘다고 한다. 노후한 부품 등의 문제로 가동 시간을 단축한 영향이다. 기계식 설치 작품도 장시간 노동에는 지치는데, 인간인 노동자의 피로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LED 사라, 그리고 사라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함께 존중받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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