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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생태계를 교란하는 약탈적 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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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생태계를 교란하는 약탈적 할인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9

2014년 마련된 현행 도서정가제, 일단 우여곡절 끝에 폐지하지 않고 현행을 유지하기로 잠정 결론이 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앞으로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까요. 도서정가제의 쟁점은 책 판매 가격만이 아닐 것입니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는 동안 신생출판사, 신간발행종수, 독립서점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기획하고, 작성하고, 제작하고, 유통하고, 독해하고, 논의하는 ‘책의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도서정가제 개정이 촉발한 사회적 논의에 책의 생태계에 속해 있는 출판사노동자, 책방운영자, 작가들도 고민을 보태고자 합니다.

도서정가제와 책의 생태계 연재 바로가기

조금 지난 시절의 기억이다. 당시 나는 이제 막 문학장에 진입을 시도하려는 신인이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힌 나는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집과 도서관을 하릴없이 오가던 내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른들이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법의 원리를 어린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물들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새로운 생각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이른바 스토리텔링 기법을 이용하여 어려운 개념을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들은 많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서사와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이 화학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세심하게 연결시킬 수 있다면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내가 어린이도서에 대한 이해도가 그리 높지 았았다는 점이다. 다행히 이는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이가 어린이도서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그를 찾아가 내가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참을 듣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공동작업을 수락했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좋은 작품을 써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업은 그리 쉽지 않았다. 판례에 기입된 형사사건들은 어린이들의 정서와 잘 어울리지 않았으며, 고도의 추상화된 사고를 요하는 법논리는 주된 대상독자의 발달단계에서는 조금 이른 편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와 내가 머리를 맞대고 밤을 지새우는 시간들이 늘어났다. 판례집과 학설들이 담긴 이론서들과 외국의 입법례를 찾고 또 찾아 읽고 토론을 나누었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는 마침내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물은 나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꽤 근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원고는 출판사로 넘어갔다.

담당 편집자에게 원고를 송고한 후 나는 곧 책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나는 간단한 편집작업이 완료되면 책이 완성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지난한 출간과정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첫 미팅에서 편집자는 우리의 원고를 성실히 읽은 후 수정해야 할 부분과 개선해야 할 부분들을 차근차근 짚어주었다. 놀라울 정도로 세밀한 지적에 몇몇 의견은 수긍하고 몇몇 의견에 대해서는 서로가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차후에 논의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편집자와 우리는 수차례의 메일을 통해 원고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나름 자신이 있었던 맞춤법과 띄어쓰기 능력에 대해 약간의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은 예기치 않은 후유증이었다. 편집자가 그처럼 꼼꼼히 원고를 살핀 까닭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 또한 우리 못지 않게 원고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원고가 완성되었다. 나는 이번에야 말로 곧 책이 나올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이었다. 원고에 그림을 그리기로 한 화가에게서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편집자가 약속한 기일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약간의 원망과 함께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원고작업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공장의 기계로 제작하는 제품처럼 2교대로 돌리며 다그친다고 해서 즉각적으로 생산이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림과 원고가 결합된 판면파일을 받아든 나는 그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그림을 통해 원고의 내용을 보다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해주면서도 등장인물에 대한 고유의 해석을 덧붙여 원고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고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가지게 된 판면에 감탄하고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메일이 날아왔다. 디자이너가 보낸 표지시안들이었다. 표지의 정면에 어린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동물캐릭터들이 와글와글 모여있고 표제는 홀로그램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이 책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살피고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책이 출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영업부의 시간이었다. 영업자는 전국 각지의 서점과 인터넷 서점에 책을 배송하고 홍보를 위해 언론사와 서점의 MD들에게 이 책이 가진 미덕을 충실하게 옹호해주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책은 곧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인터넷 서점들의 메인 페이지에 MD의 추천으로 노출이 되었고 주요 언론사들에 이 주의 신간으로 단독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평단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고 독자들의 리뷰도 좋았다. 출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스트셀러 차트에도 진입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긍정적인 신호들은 우리를 설레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우리의 일과는 매일 아침 인터넷서점에서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순위를 살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곧 한숨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책은 일정 정도 순위에서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당시 차트의 상위권을 점유하는 도서들은 저자의 표시도 잘 보이지 않는 한참 전에 출간된 전집들이었다. 저자의 표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이른바 공장식 생산품으로 저자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아 아무나 써도 상관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 책들이 차트를 점유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책들의 유일한 셀링포인트는 책의 내용도, 저자의 이력도 아닌 70%이상의 할인율이었다. 그리고 자본이 주도하는 질서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압도하는 셀링포인트였다. 동시에 이 책들은 밴드웨건 효과로 인해 지속적으로 차트의 상위권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이상의 할인율을 제시하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의 책은 곧 차트의 아래로 밀려내려갔다. 내심 우리가 마음 속으로 경쟁상대라고 생각했던 다른 훌륭한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차트의 끄트머리에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의 코스를 밟은 새로운 책들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차트의 상위권은 여전히 할인율을 앞세운 그들의 몫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그 동안 책이 출간되까지의 과정이 슬라이드 환등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새로운 책을 쓰려던 열정은 어느새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내가 도서정가제를 지지하는 이유를 이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책이 탄생하는 과정은 저자 뿐 아니라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이 자신들이 관여한 책에 애정을 기울이는 이유는 수익창출의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전언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에 있다. 그래서 책은 다른 상품과 단순히 비교할 수 없다. 오로지 수익만을 위해서라면 상기한 바와 같이 당장 독자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까다로운 절차들을 축소하고 비용을 절감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서정가제가 사라진다면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책의 부당염매, 이른바 덤핑은 가격을 제외하고 책이 가진 다른 모든 경쟁요인을 압도한다. 부적격한 저자 또는 초벌 수준에 지나지 않는 번역, 교차검증되지 않은 내용과 교정/교열도 제대로 되지 않은 불성실한 편집도 약탈적 가격 앞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성실한 저자와 편집자 들이 자신의 열정을 잃고 도서계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양서를 찾는 독자들에게 큰 피해로 돌아온다.

도서정가제는 책을 가격이 아니라 내용으로 경쟁하게 한다. 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른바 ‘가성비’와 같이 가격에 비례하여 성능이 작동하는 상품이 아니다. 가격이 저렴하다고 해서 일부에 곰팡이가 퍼진 빵을 사지 않는 것처럼 책의 내용 중 50%가 신뢰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50% 할인된 가격으로 나머지 50%의 내용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책 전체를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의 내용이 아닌 할인율로 독자를 유인하는 것은 건전한 도서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서정가제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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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문학평론가

2011년 <플랫폼> 문화비평상, 2012년 <실천문학> 문학평론 신인상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당신의 징표 - 이름의 존재론과 姓의 정치학>, <불온한 제국>, <법정에서 만난 역사(공저)>, <너구리 판사 퐁퐁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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