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학교에서 외투 착용을 금지하는 규정은 학생들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침해한 것이며, "학생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할 기본권의 향유자이자 권리의 주체"라며 학교에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면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학생의 복장을 규제하고 특정 복장을 강요하는 관행과 문화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도 학생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학칙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2016년에는 교육부에서 교복 위 겉옷 착용을 규제하는 학칙을 개선하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부의 공문 정도로 학교는 변하지 않은 셈이다.
학생인권에 관한 거의 유일한 제도, 학생인권조례의 의미와 한계
학생인권 관련 이야기를 하다보면 "요즘 학교는 많이 좋아졌다"라는 반응을 접하게 된다. 학생인권이라는 말이 더 이상 낯설지 않고, 또 학생인권 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두발규제와 체벌 같은 문제는 거의 사라졌다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학생인권에 관한 법률은 몇몇 지역에서 제정된 학생인권조례 외에는 없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 인권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학생의 인권이 존중되고 보장될 수 있도록 구체적 권리들을 명시했고, 한국 사회에서 최초로 학생인권 보장 내용을 담은 제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2010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광주(2011년), 서울(2012년), 전북(2013년)에 이어 최근에는 충남(2020년)에서 시행되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전국 5개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학생인권에 관한 최소한의 제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는 분명하다. 해당 지역의 학생인권 상황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했기 때문이다.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학교생활에서 학생의 인권 보장 실태조사'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시행 지역 학생들의 두발규제나 체벌 경험이 다른 곳보다 10~30%p 정도 적게 나왔다. 2019년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진행한 '학생의날 90돌 맞이, 전국 학생 인권 실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례가 시행 중인 지역에서는 체벌이 전혀 없다고 응답한 비율이 71.2%로 학생인권조례가 없는 지역에 비해 약 20%p 많았다. 두발규제도 조례가 있는 지역이 없는 지역에 비해 14.6%p 더 적게 집계되었다. 학생인권조례 시행 여부가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학생인권조례 시행 여부와 상관없이 전국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조사에서, 교사에 의한 욕설, 비하, 혐오 등 언어폭력 경험은 자주 또는 가끔 있다는 응답이 26%였고, 특히 성차별적이거나 성별/성정체성에 대한 모욕적 언행도 20.4%가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스쿨미투 운동을 통해 교사의 성추행만이 아니라 성차별적 언행 등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으나 여전히 상당수의 학생들이 이러한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다. 성적을 이유로 모욕감을 주거나 차별하는 것에 대해서도 응답자 19.4%가 자주 또는 가끔 있다고 답했다. 학교 현장에서 학업 성적으로 학생을 차별하거나 모욕하는 비교육적인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주며, 학생인권조례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른 지역 간 차이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신체와 자유를 억압하는 학교 규칙을 개선하는 효과는 컸으나, 그 외의 영역에서는 효과가 별로 없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 결국 '조례'라는 것은 결국 해당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법률이다. 또 시행 지역에서도 같은 학생인권조례라고 해서 그 내용이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다. 비슷한 학생인권침해를 겪더라도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대응과 해결 방안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지 않고 있는 지역에서는 두발규제나 체벌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학생인권 문제조차 해결되지 못했다는 상황도 크나큰 한계이다. '스쿨미투' 고발, 학생인권 대나무숲 등 SNS를 통한 제보와 두발규제와 체벌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지역에서도 소지품 압수, 두발규제, 체벌, 강제야간자율학습 등을 고발하고 문제제기하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는다. 즉, 학생인권조례의 효과와 의미는 분명히 있으나 학생인권의 이슈 중 어느 하나라도 완전히 해결했다고 할 수 없다.
인권 보장의 책무를 방기하는 정부
2019년,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학교, 가정, 시설 등에서 이뤄지는 모든 형태의 체벌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체벌 금지를 비롯한 학생인권 보장에 있어 지역 격차를 줄이라"라고 권고하였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학생인권조례 시행 지역과 미시행 지역에서의 학생인권 실태 결과에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역에 상관없이 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의견은 일부 지역에서만 기본권 제한이 금지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우리 사회 안팎에서 요구되는 학생인권을 보장하라는 외침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 교육부나 일부 국회의원들은 법률이나 시행령에 학생인권의 구체적인 내용과 학생인권침해 금지를 명시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교육부는 학생인권법 제정 요구에 대해 각 교육청들의 소관이라고 답한 적도 있다. 지역 교육청이나 개별 학교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 동불보호법,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같은 법률에서는 차별과 폭력을 막기 위하여 금지되는 행위를 나열하며 법의 취지를 명확히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물보호법에서는 "누구든지 동물에 대하여 다음 각 호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며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상해, 질병을 유발시키는 것 등 구체적 행위를 명시하는 식이다. 그런데 왜 학생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학생인권침해에 해당하여 금지하는 행위를 명시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처럼 이야기되는 걸까. 또한 몇 년 전, 교육부는 서울, 전북 학생인권조례 등에 대해서 무효 소송을 제기하고, 초·중등교육법 및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악한 적이 있다. 그런 교육부가 학교의 자율성을 위해 학생인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법을 만들기 어렵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는 사회 구성원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힘써야 할 책무가 있는 정부가 국제사회를 비롯한 시민사회 안팎의 외침을 외면한 채, 단위 학교와 지역교육청에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는 셈이다. 학생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에 각 교육청에서 알아서 하라는 식의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학생인권침해 문제를 가볍게 여기며 사실상 내버려 두고 있다는 의심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10년 넘도록 미뤄진 학생인권법, 정부와 국회가 함께 나서야
2006년, 17대 국회에서 학생인권법(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되었다. 당시 초·중·고에서는 '교문 지도'라는 이름으로 머리카락이 가위로 잘리고, 복장을 규제당하고,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교사에 의해 학생이 구타당하는 일이 매우 흔하게 일어났다. "인권은 교문 앞에서 멈추는" 현실에 맞서 "학생도 인간이다!"라는 외침이 전국적으로 터져나왔던 그 때,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발의되었던 학생인권법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체벌 금지, 학생회 법제화, 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 보장, 학생인권침해시 구제 절차 명시 등의 내용이 담긴 법안의 내용 대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제18조의4 (학생의 인권보장) 학교의 설립자·경영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하여야 한다"라는 한 문장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학교에서의 체벌 금지나 두발자유, 표현의 자유, 차별 금지 등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학생인권법이 제대로 논의되거나 발의조차 되지 못한 현실이 낳은 비극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선언을 넘어 보편적이고 온전한 학생인권 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요즘 학교에선 그런 거 별로 없다면서요?"라고 이야기되는 수준을 넘어서, 학교에서 체벌, 성차별, 소지품 압수 등 인권침해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법칙과 상식이 자리 잡게 해야 한다.
2017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는 체벌 금지, 학생회 법제화, 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 보장 등에 동의하며 학생인권법을 임기 초에 제정하겠다고 답변했다. 2020년 현재, 대통령 임기는 3년 반을 넘어가고 있고, 제21대 국회가 구성된지는 6개월 가까이 되어 간다. 정부와 21대 국회는 지금이라도 오래된 약속을 지키고 10년 넘는 시간 동안 '나중'으로 미뤄져 온 학생인권법 제정을 위해 논의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와 인권에 친화적이라 내건 여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 때, 이 정도의 기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선거권 연령 하향도 이뤄냈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시민.정치적 권리, 표현의 자유, 학교 운영 등에 참여할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청소년들의 참정권을 온전히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학생인권법 제정은 기본이다. 학생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고 학생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중받을 때, 학교에서의 반인권적·비민주적 통제가 사라지고 학교 운영과 교육 정책에 대한 민주적 참여 또한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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