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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슬픔'을 꺼내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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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슬픔'을 꺼내든 이유

[창비 주간 논평] 화려한 열병식 뒤 처절한 절규가?

지난 10일 열린 '조선로동당창건 75돐 경축 열병식'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른바 '꺾어지는 해'(끝자리가 5, 10인 해)의 기념일은 더욱 화려하게 치러진다는 점에서 북한의 현 상황을 잘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육성 연설에 담길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를 향한 메시지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서해 공무원 피격 사망사건 등 악화일로를 걸어온 남북관계에 관한 입장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대체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평이다. 신형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대미 메시지는 절제되어 있었고, 남한에는 코로나를 이겨내고 곧 만나자는 희망을 전했다. 미국 대선 상황을 감안하여 열병식의 규모나 연설 메시지를 세심하게 조정했다는 분석이다. 대북제재, 수해, 코로나19라는 삼중고의 상황에서 내부 결속에 집중했다는 평가도 많다.

메시지 자체는 상대적으로 '덜' 도발적이었다면, 이를 담는 형식은 파격적이었다. 과거와는 달리 당 창건일 0시에 시작된 것이 특히 흥미롭다. 한밤중에 열병식을 치른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북한은 창건일이 되는 순간 열병식을 시작함으로써 기념일이 지니는 시간적 의미를 극대화하여 연출했다. 이러한 경향은 2019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와 새해 경축 음악 공연에서도 확인된다. 모두 0시에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기념 의례의 상징성을 배가한 것이다.

한편 열병식이 조선중앙텔레비전을 통해 녹화 방송된 것은 당일 저녁 7시였다. 행사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2019년 신년사처럼 녹화 영상을 아침에 방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드론, 불꽃놀이, 불빛 등을 활용한 열병식의 장엄한 스펙터클이 인민들에게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저녁 시간 방영이 유리했으리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또한 열병식이 실제로는 당 창건기념일의 시작과 함께 개최되었다 해도, 방송을 통해 관객이 관람하는 그 순간 '현실'이 된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관객은 미디어로 재현되는 가상현실을 더 진짜 같은 현실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그의 에세이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The Gulf War did not take place)>에서 미디어로 보도된 걸프전이 ‘실제’ 전쟁을 대체하여 '현실'이 되었다는 주장을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다시 말해 2020년 10월 10일 0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의 열병식은 미디어를 통해 엄청난 스펙터클로 전환되어 북한 인민들에게 체현되는 것이다.

미디어로 재현된 열병식이 크고 화려할수록 관객은 그것의 스펙터클에 압도당하게 된다. 가능한 한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 체제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압도적 스케일이어야 한다. 북한이 그토록 군인과 무기를 크고 웅장하게 전시한 이유도 여기 있었을 것이다. 군인과 무기의 원래 목적이 전쟁에서 적을 무찌르는 것이더라도, 열병식에 도열했을 때는 그 규모와 크기만을 뽐낼 뿐이다. 군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만 진정으로 이들의 전투력이 위협적인지는 알 수 없다. 미사일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대의 몸집을 자랑한다는 ICBM은 엄청난 스펙터클이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열병식이라는 스펙터클로 전시된 군과 무기는 현실보다 더 사실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남한과 국제사회에는 '위협'과 '두려움'을, 북한의 인민들에게는 '자긍심'과 '성취감'을 만들어내곤 한다.

이번 열병식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관객에게 슬픔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연설 중 여러 번 울먹거렸으며, 그의 연설을 듣는 군인이나 평양 시민들 모두 눈물을 흘렸다. 기쁨보다는 회한과 슬픔이 뒤엉킨 눈물이 카메라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공적인 영역에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실패, 역경, 상실의 경험에서 슬픔이 하는 일은 고통을 애도함으로써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예컨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례식은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픔을 공유하는 집단적 의례의 대표적 사례였으며, 이는 북한 인민들이 함께 존재함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슬픔을 공유할 때 사람들은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공동체성을 감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도자와 인민들은 현실이 아닌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열병식에 참여한 모두가 진정 슬픔을 공유했는지, 그곳의 대부분이 눈물을 실제로 흘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긴 열병식의 실제 상황을 따질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북한 체제가 슬픔을 전달하기 위해서 열병식을 세심하게 연출했다는 사실이다. 이미지가 '현실'인 세계에서 지도자와 인민은 함께 눈물을 흘렸고, 이러한 스펙터클이 하는 일은 다른 인민들에게도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당 창건일이라는 '경축' 행사에서 모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재현해야만 한 이유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활용하지 않고는 북한 인민을 결집하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기쁨이 추동하는 힘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 때문인 듯하다. 게다가 이제는 지도자도 함께 울어야 한다. 교차편집까지 총동원해서 지도자와 인민이 함께 눈물을 흘려야만 냉담한 관객들에게 슬픔을 전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더 강도 높은 슬픔이 필요하다는 자백이자, 북한이 벼랑 끝에 서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일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화려하기만 했던 이번 열병식이 발신한 진정한 메시지는 눈물을 흘리는 방법밖에 남지 않은 북한의 처절한 절규가 아닐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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