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3일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판을 뒤흔드는 일이 일어났다. '진보의 상징'으로 불리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 대법관이 지난 18일 사망했다. 종신직인 연방 대법관은 대통령이 지명한 뒤 상원에서 인준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긴즈버그 대법관(이하 직함 생략) 사망 이전에 연방 대법관들의 이념 성향은 '보수 5 대 진보 4'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긴즈버그 후임으로 보수 성향의 대법관을 지명하고, 현재 공화당이 다수(53명)인 상원에서 인준까지 받을 경우, '보수 6 대 진보 3'으로 보수 절대 우위의 대법원이 탄생하게 된다. 게다가 대법관이 종신직이기 때문에 이런 보수 우위는 꽤 오랫동안 유지 가능하게 된다.
의료보험, 낙태, 성소수자 인권, 이민정책 등 현재 미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많은 이슈들이 대법원의 판결로 결론이 내려진다. 때문에 대법원 구성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이슈다.
워싱턴 정가에서는 이전부터 트럼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에게 밀리는 상황을 뒤집기 위해 '옥토버 서프라이즈'(10월 깜짝 카드)를 내놓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었다. 그런데 긴즈버그의 사망이 예기치 않은 '셉템버 서프라이즈'(9월 깜짝 카드)가 됐다.
긴즈버그 후임 인선과 관련한 정치적 쟁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선거를 불과 40여일 앞둔 시점에서 트럼프가 후임 인선을 강행할 것인가?
둘째, 트럼프가 지명한 대법관 후보가 선거일 전에 상원에서 인준 절차를 마칠 수 있을까?
셋째, 후임 인선 절차를 강행하는 정치 행위가 결과적으로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 지지자들을 결집하게 만들까?
쟁점 1. 트럼프, 후임 인선 강행할까?
첫 번째 쟁점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듯 하다. 트럼프은 후임 인선을 강행하겠다고 밝혔고, 공화당 지도부는 이를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트럼프는19일(현지시간) 노스캐롤라이나주 페이엇빌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서 "다음 주에 (대법관) 후보를 지명할 것"이라며 "아주 재능 있고 훌륭한 여성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그는 이날 앞서 백악관에서도 취재진에게 염두에 두고 있는 후보자들도 공개했다. 그는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고등법원 판사에 대해 "매우 존경받고 있다"고 평가했고, 바버라 라고아 제11연방고법 판사에 대해서는 "비범한 사람이며 히스패닉"이라고 소개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배럿 판사는 낙태 반대론자로 트럼프의 핵심 지지층인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이 선호하는 후보이며, 라고아 판사는 쿠바계라는 점에서 주요 경합주인 플로리다의 쿠바계를 포함한 히스패닉 유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트럼프는 이날 트위터에도 "우리가 이 중요하고 강력한 위치에 있는 것은 우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선출한 사람들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라며 "미국 대법관 선출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결정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왔다. 우리는 그럴 의무가 있다, 지체 없이!"라고 강조했다.
후임 대법관 인선은 트럼프 입장에서 매우 유용한 정치적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 1973년 낙태 합법화를 가능하게 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뒤집는 것은 복음주의 신자들을 포함한 '낙태 반대론자(Prolife)'들의 오랜 정치적 소망이다. 때문에 긴즈버그의 자리를 보수 성향의 대법관으로 채우려는 움직임은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킬 수 있다.
또 대법관 인선이라는 유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빅 카드'를 던짐으로써 트럼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코로나19 사태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는 효과를 꾀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이번 대선에서 '상수'이긴 하지만, 대법관 인선이라는 대형 이슈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관측이다.
쟁점 2. 11월 3일 전에 상원 인준 절차를 마칠 수 있을까?
두 번째 쟁점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11월 3일 전에 후임 인준 절차를 끝마치기는 어려워 보인다. 공화당 내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당의 반격을 따져보면 트럼프가 원하는 것처럼 마구 밀어붙인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단 공화당은 최대한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 보수성향의 대법관 한명이 늘어나는 것이 가져오는 정치적 이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19일 트럼프가 지명한 후임 대법관에 대해 상원이 투표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소속 의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올해 '인준 싸움'을 진행할 것이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당부했다.
상원 법사위원장인 린지 그레이엄 의원(노스캐롤라이나)은 20일 인준 절차를 강행할 것이며, 상원에서 다수결로 결정이 나기 때문에 민주당이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 등 이를 막을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레이엄은 대표적인 친 트럼프 인사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특히 2016년 동일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야당인 공화당이 퇴임할 대통령이 대법관을 지명해서는 안 된다며 후임 인준을 반대하고 나선 전례를 이유로 들고 나왔다. 2016년 2월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타계하면서 공석이 생겨 오바마 당시 대통령이 중도 성향의 메릭 갤런드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자 공화당은 인준을 거부했다.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끝까지 청문회를 열지 않았고, 결국 대선 이후 트럼프가 닐 고서치 대법관을 그 자리에 임명하게 만들었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20일 <NBC>와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공화당은 새로운 선례를 만들었고, 그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옹호한 선례는 다음 대통령을 기다리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은 20일 <ABC>와 인터뷰에서 "우리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 위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화살을 사용할 것을 요구 받는다"면서 트럼프와 공화당이 후임 인선을 밀어붙일 경우 대항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내에서는 1) 대선 후 레임덕 기간(2021년 1월 20일)에 트럼프와 법무장관인 윌리엄 바에 대한 탄핵을 추진하는 방안 2) 대법원 구성을 보수 6 : 진보 3으로 바꿀 수 있는 후임 인준 절차를 선거 전에 밀어붙일 경우, 11월 선거를 통해 상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면 대법관 숫자로 13명으로 늘려서 4명의 진보 성향의 대법관 임명을 강행하는 방안 3) 힐러리 클린턴을 대법관 후보로 지명하는 방안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또 긴즈버그가 "차기 대통령이 내 후임을 임명해주기 바란다"는 유언을 남긴 것을 강조하며, 트럼프와 공화당이 이를 밀어붙일 경우 도의에 어긋나는 것임을 강조하고 나섰다. 상원 법사위 소속인 코리 부커 의원(민주당, 뉴저지)은 19일 <CNN>과 인터뷰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공화당은 긴즈버그 후임 문제와 관련해 도덕과 진정성 시험에 들게 됐다"고 주장했다. 긴즈버그는 정치적 노선과 무관하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대법관이기 때문에 공화당이 후임 인선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경우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점수를 잃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화당 내 '이탈표'도 표결을 강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다. 11월 3일엔 대선 뿐 아니라 하원 전 의석, 상원 3분의 1 의석에 대한 선거도 치러진다. 공화당 지지 성향이 분명한 지역의 의원들은 대법관 이슈가 선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퍼플 스테이트'의 공화당 의원들의 경우 후임 인준을 밀어붙이는 것이 오히려 선거에 불리하다. 이미 2명의 공화당 상원의원(수잔 콜린스, 리사 머커우스키)이 인준 표결을 대선 이후로 미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이들 2명 이외에 밋 롬니(유타), 코리 가드너(콜로라도), 마르코 루비오(플로리다), 로이 블런트(미주리) 등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과거 대법관 인준에 걸린 평균 기간은 71일이었다. 선거일까지 40여일 밖에 안 남았다는 시간적인 촉박함도 공화당 입장에선 난감한 문제다.
쟁점 3. 공화당과 민주당, 어느 쪽 표가 결집할까?
트럼프가 긴즈버그 후임을 지명하고 공화당이 상원 인준을 추진하고 민주당은 이에 맞설 경우, 결과적으로 선거에서 어느 쪽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냐는 세 번째 쟁점은 아직 결론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공화당 지지자들과 민주당 지지자들 모두에게 '유인 효과'로 작용할 수 있는데, 어느 쪽의 구심력이 더 강할 것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공화당 입장에서 낙태 반대론자 등 보수 성향 유권자들에겐 강력한 투표 유인 효과가 있겠지만, 중도 성향의 표를 오히려 잃어버리는 효과가 발생할 수도 있다. 대선 못지 않게 상원에서 다수 의석을 유지하는 게 공화당에겐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자칫 '퍼플 스테이트'에서 오히려 의석을 잃어버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임신 6개월 이전 여성의 낙태를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로 대 웨이드 판결'과 관련된 여론조사 결과도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지난 6월 CBS 여론조사 결과,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는 응답이 63%, "뒤집어져야 한다"는 응답이 29%로 나타났다.
<WP>는 19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에서 조기투표가 시행되자 투표를 하려는 유권자들로 장사진을 이룬 모습에 대해 보도하면서 긴즈버그 사망이 오히려 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20-30대, 진보성향 유권자들이 긴즈버그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는 점에서 이들에게 투표 참여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반면, 긴즈버그 후임 인선과 관련된 여론조사는 이 사안이 보수 유권자들에게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론조사 기관인 유고브가 지난 19일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51%가 트럼프가 대선 이전에 새 대법관을 임명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고 답했다. 42%는 새 대법관을 임명해야 한다고 답했으며, 7%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새 대법관 임명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어느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고 보기 어려운 결과다. 특히 공화당 유권자의 86%는 트럼프가 후임을 임명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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