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특고 산재보험 당연가입 제도가 시행된 해는 2008년이다. 2019년 산재보험에 가입한 특수고용(특고)노동자는 6만 5000여 명이었다. 한국의 특고노동자는 22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11년간 특고노동자 중 3% 정도가 산재보험에 가입했다. 한국에서 특고노동자는 대단히 운이 좋아야 일하다 다쳤을 때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11년간 특고노동자 97%의 산재보험 가입을 가로막은 세 개의 관문이 있다.
먼저 직종이다.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특고 직종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현재 보험설계사, 학습지교사 등 14개 업종 77만여 명이다. 애초 특고 산재보험의 가입 최대치는 전체 특고노동자의 1/3 가량이다. 그나마도 방문판매원 등 5개 업종 30여만 명은 올해 7월 당연가입 대상에 추가됐다.
가입 가능 직종에서 일한다고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가 제시하는 '전속성'이라는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방문판매원을 예로 들면, 한 업체로부터 52만 1700원 이상의 수입을 얻는 방문판매원이라야 산재보험의 문을 두드려볼 수 있다. 대부분 플랫폼으로 일감을 얻는 대리운전기사는 특정 업체의 업무만 하거나 최소한 특정 업체의 업무를 우선해야 한다.
마지막 관문이 있다. 산재보험 가입을 허용하는 사용자를 만나야 한다. 현행법상 특고노동자는 자신이 원할 경우 산재보험 적용제외를 신청할 수 있다. 물론 저임금 특고노동자가 보험료를 아끼려 적용제외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업주의 강압으로 적용제외를 신청하는 경우도 있다.
코로나19 이후 특고노동자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키를 쥔 정부는 지난 8일 국무회의에서 특고노동자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기 위한 고용보험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어 11일에는 국회에 개정안을 제출했다.
특고 고용보험 정부 개정안의 핵심은 특고노동자를 '다른 사람의 사업을 위해 노무를 제공하고 대가를 얻는 계약을 체결한 노무제공자'로 정의한 뒤 대통령령으로 고용보험 가입이 가능한 특고 직종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것이다.
이 개정안을 두고 '특고 산재보험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는 것이다. 특고 고용보험의 주요 내용은 특고 산재보험과 거의 비슷하다. 산재보험의 적용제외 신청제도와 마찬가지로 고용보험 가입을 회피하려는 사용자에게 유리한 문구도 포함되어 있다.
이대로라면, 특고노동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산재보험에 가입할 때와 비슷한 어려움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특고 고용보험 기본설계, 가입률 3% 불과한 특고 산재보험과 비슷
이번에도 특고노동자는 우선 '대통령령으로 제시된 직종'에서 일해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고용보험 가입 가능 직종은 산재보험 때와 비슷하게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특고 고용보험 가입의 최대치도 전체 특고노동자의 1/3 정도가 된다. 간병인, 가사도우미 등 2/3 가량의 특고노동자는 또 한번 사회안전망에서 배제된다.
이는 그나마 상황이 나은 곳에 안전망을 덧대고,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곳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그로 인해 상대적 격차는 더 벌어지는 결과가 또 한 번 반복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난 7월 7일 특고 고용보험에 대해 "특고노동자는 다양한 직종과 관련 부처가 존재하고 각각의 전속성이 달라 직종별 접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노동부가 각 직종에서 산재보험에 적용하고 있는 '전속성' 기준을 고용보험에도 적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전속성은 '노동자가 한 업체에 종속되는 정도'를 뜻한다. 고용노동부는 택배업이나 방문판매업 등에 종사하는 특고노동자가 한 업체에서 일정 이상의 수익을 얻거나 한 업체에 일정 이상의 근무시간을 할애하면 전속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고노동자가 여러 플랫폼에서 일감을 얻는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기준'이라는 비판이 많다. 실제로 대리운전노조는 20만 대리운전기사 중 전속성 기준을 통과해 산재보험에 가입한 이가 3명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작년 12월에는 노동부가 한 라이더의 산재 신청을 '전속성 기준에 맞지 않다'며 2개월 간 보류했다 라이더유니온의 문제제기로 신청을 승인한 일도 있었다.
상황이 이런데도 노동부 장관에게서 특고노동자에 대한 '전속성' 기준을 포기하기는커녕 고용보험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정부 개정안과 이 장관의 말을 종합하면, 특고노동자는 우선 '대통령령으로 정한 가입 가능 직종'과 '노동부가 제시한 전속성 기준'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갖춰야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거대한 사각지대를 두고 있는 특고 산재보험과 매우 비슷한 설계다.
노사간 힘 차이 무시하고 '계약 체결'을 고용보험 가입 조건으로 둔 정부 개정안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 개정안에는 특고노동자의 고용보험 가입을 대폭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다. '계약의 체결'을 고용보험 제도의 적용을 받는 특고노동자 정의의 한 요건으로 둔 부분이다.
노동시장에서 계약 체결 여부나 계약 내용은 갑인 사용자의 뜻대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에서는 계약 체결 여부를 근로자 정의의 요건으로 삼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계약서를 쓰지 않았어도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자에게 실제 '근로'를 제공했다면, 법은 그 사람을 '근로자'로 보고, 임금, 노동시간 등과 관련한 보호 장치를 모두 적용한다.
그런데 정부 개정안에는 고용보험에 가입이 가능한 특고노동자의 정의에 '계약 체결'을 포함하고 있다. 별도 법적 장치가 없다면 사용자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특고노동자와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 것으로 고용보험 가입 의무를 피할 수 있다. '노사간 힘의 불균형을 고려해 계약이 아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우선한다'는 노동관계법의 기본 법리를 정부 개정안이 무시한 데 따른 결과다.
게다가 특고 고용보험이 시행되면 사용자에게는 특고노동자와 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유인이 하나 더 생긴다. 보험료를 아끼는 것이다. 저임금 특고노동자 중에서도 보험료를 아끼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둘 중 어떤 식으로든 고용보험 가입이 불발하면 갑작스러운 고용 단절이나 소득 감소에 따른 위험 부담은 온전히 특고노동자가 지게 된다.
결국 이번에도 특고노동자는 고용보험에 가입하기 위해 고용보험 가입을 허락하는 사용자를 만나야 한다. 이에 더해 특고노동자와 사용자의 계약이 법적으로 사업주 대 사업주의 계약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근로게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사용자에게 벌칙을 주는 것과 달리 특고노동자의 사용자에게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데 대한 법적 불이익을 주기도 쉽지 않다.
특고노동자 고용보험 가입 범위 넓히고, '계약 체결' 부분 삭제해야
위와 같은 문제들 때문에 노동계와 전문가들에게서는 국회 입법 과정에서 정부 개정안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정비되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이정훈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고용보험에 가입이 가능한 특고노동자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야 한다고 전했다. 이 국장은 "전속성을 기준으로 한 직종 열거 방식은 특고 산재보험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문제를 드러냈기 때문에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된다"며 "그래도 대통령령으로 가입대상을 정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처음 시작할 때 최대한 많은 특고노동자를 포괄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애림 서울대학교 고용복지법센터 연구위원은 특고노동자의 정의 중 '계약 체결' 부분을 삭제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 위원은 먼저 "2018년 고용보험심사위원회에서 특고 고용보험 적용 방안을 의결할 때도 적용대상은 '타인을 사용하지 않고 노무를 제공해 대가를 얻는 사람'이었다"며 "그런데 정부개정안에 '계약 체결'이라는 말이 갑자기 들어갔다"고 말했다.
고용보험심사위원회는 노사 대표와 전문가가 참여해 근로자의 고용보험 피보험자격, 실업급여 수급 등을 논의하는 고용노동부 소속 위원회로 전국민고용보험이 전사회적 관심을 받기 전부터 특고 고용보험 적용 방안을 논의하던 곳이다.
윤 위원은 "보통 사용자와 노동자의 계약은 강자의 입맛에 따라 쓰이게 마련이고, 간병인이나 골프장 캐디 등 수많은 특고노동자가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한다"며 "'계약 체결'을 고용보험 가입 조건으로 두면, 이를 적용받는 특고 노동자는 10% 정도밖에 안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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