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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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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른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기고] 지난 28일 시행된 '산업현장 일학습병행 지원에 관한 법률'의 문제점

개인과 기업간 자유로운 계약을 전제로 한 시민법이 사문화되는 결정적 이유는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경제적, 시간적 절대적 우위에 있는 우리나라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이 대등한 위치에 제대로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동등한 계약을 기초 위에 만들어진 시민법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 균형을 잡아주는 사회법으로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다.

'살아 숨 쉬는 일학습병행법을 기대하며’라는 김동만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의 글(바로가기 ☞ : [한겨레 왜냐면] 살아 숨 쉬는 일학습병행법을 기대하며)은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기본적인 시민법조차 사문화되었던 이유를 간파하고 있지 못하다.

이 글에서 언급한 "중소기업 인력 양성과 청소년일자리 문제 해소를 기대"하는 법률(산업현장 일학습병행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병행법))의 기본 골격은 '학습근로자'를 노동자로 규정하여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용하여 간접적으로 보호하던 직업계고 현장실습생을 근로기준법 체계에 직접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한마디로 법적 근거가 없어 보호받지 못한 현장실습생들을 '노동자'로 규정한 뒤, 근로기준법으로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지난 2019년 8월 통과된 뒤, 1년간 이 법의 하위 법령을 구체화하는 작업을 거치고 지난 8월 28일 시행됐다.

우선 이 법의 효용 유무는 차치하더라도 이 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는지는 언급해야겠다. 대법원은 1987년, 사용자와 종속관계에 놓여 있는 실습생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더라도 근로자성을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열악한 처우에 놓인 실습생도 노동권 보장대상으로 보호하려는, 최소한 사회적 의무를 다한 결과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대법원 판결 결과를 시민법 차원으로 법률화하는데 속절없이 33년의 세월을 보낸 셈이다.

그나마 대법원 판결이 있고나서 1997년 직업교육훈련촉진법(이하 촉진법)이 제정됐으나, 현장실습생들의 권리를 보호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청주 김동준, 경기 김동균, 전주 홍수연, 제주 이민호 등 현장실습에 참가한 많은 학생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죽음에 내몰려야만 했다.

▲ 서울 소재 모 특성화고의 실습실 모습. ⓒ프레시안(허환주)

김동만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의 글에 따르면 '병행법'은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 발생 사업장은 학습기업에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 현장실습생들의 야간·휴일 현장훈련도 제한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권리보호에 힘을 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늦게나마 직접적인 근로기준법 대상자로 실습생을 포함시키는 법률 제정 조치를 환영해야 할까. 세 가지 지점에서 김 이사장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일과 학습을 병행' 하는 것이 가능한지 따져보자. 법률은 임금노동을 전제로 학습활동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학생 신분이 아닌 노동자로서 현장실습을 하는 구조를 만들 뿐이다. 자연히 이런 구조는 학생의 학습보다는 일의 숙련도를 높이는 데 무게추가 기울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노동자가 노동생산 전 기간에 걸쳐서 높은 수준의 숙련노동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사 전에 일정 수준의 '개인 발달'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학교에서의 학습, 즉 교육이 이를 뒷받침하는 장치다. 그런데, 학습보다는 숙련도에 방점이 찍힐 경우, 교육은 뒷전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임금노동자의 수명을 깎아먹게 된다. 어느 정도 수준의 노동능력도 겸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되는 임금노동은 일과 학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야기다.

둘째, 법률 발달면에서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법률 발달은 시민법이 우선되고 있다. 이는 대부분 근대국가 법률에서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노동조합이 발달하거나 높은 수준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나라에서 대등한 계약을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를 강력하게 보호하는 법체계가 잘 실현되어 있다. 우리도 노동운동과 수많은 산업재해 희생자들의 ‘권리 찾는 위한 노력’들이 모여서 한단계 높은 사회로 진일보해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노동조합의 규모와 협상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기업에 유리한 자유주의 체제가 공고하게 지배하고 있는 사회이다. '병행법'에서는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 발생 사업장은 학습 기업 참여"를 제한한다고 하지만 노조가 있어도 산업재해 인정받기 힘든데, 현재와 같은 노조의 협상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실현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근로기준법이나 촉진법이 그랬듯이 ‘학습 기업 제한’ 또한 문자로만 남게 될 수 있다.

셋째, "능력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직원을 기업현장교사로 지정해 기업 주도로 현장훈련이 이뤄지도록 한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기업직업훈련실태 기초분석 보고서(고용노동부 2015.12)'에 따르면 교육훈련시설을 운영하는 기업은 전체 1%이며, 교육훈련을 전담하는 부서는 전체 기업의 4.9%(2014년 7.8%)이다. 1995년 고용보험 교육훈련 분담금 정책 이후 기업은 직업훈련에 직접 투자를 하지 않는 경향이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생존경쟁에 내몰린 중소기업은 더욱 훈련체제가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 우리나라 중소기업 실태를 봤을 때 사실상 ‘중소기업 인재양성’체제라는 병행법의 설명은 허구일 뿐이다.

일터기반 학습 제도는 교육적으로 인간 발달에 정점에 이르지 않는 노동자를 산업현장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으로 학습근로자 보호조치가 현실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훈련과정이 체계화되지 못한 공간에서 임금노동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가 몇 년이 지나면 노동생산성은 떨어진다. 졸속적인 병행법이 이대로 시행된다면 97년 촉진법이 그랬듯이 우리는 또 다른 희생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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