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한국에서 자연생태의 원형이 그나마 남아있는 드문 땅입니다. 그리고 현재 난개발에 따른 갈등의 섬, 지구온난화로 인한 위기의 섬입니다. 살아야하고 살려야한다는 절박감에 동료 시민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환경부 장관에게 가 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류가 뭇 생명과 더불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노력만이 아니라 정책과 노선의 전환이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주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가 임박해 위기의식 가운데 연재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환경부가 동의하고 국토부가 기본계획을 고시하면 제주 제2공항 사업은 법적 지위를 갖게 됩니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한 환경부의 판단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매일 글을 이어갈 것입니다. 제주 제2공항 사업만이 시대와 지역의 문제는 아니지만, 이 구체적인 사안을 배경으로 우리의 제주발 문제의식은 펼쳐질 것입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존엄을 허락하신 이여. 그 인간으로 하여금 이웃 생명의 존엄도 품게 하소서. 인간의 무지로 꺽이는 한 송이를 보소서. 사람도 한낱 조물이니 만물과 평화롭게 공생하는 지혜를 주소서.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자연을 파괴한 댓가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하소서. 힘없고 소외된 모든 것들에 저지르는 무관심 또한 죄악임을 알게 하소서. 구럼비의 파괴가 인간성의 파괴임을 알게 하소서. 사회적 정의를 위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경제 논리와 국가의 공권력 앞에 결국은 패배 하고 말 승산 없는 싸움을 왜 하느냐는 질문에 양보할 수 없는 공동의 선을 깨우쳐주소서. 우리의 삶은 이전의 어떤 결과로 시작되었으며 현재에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 따라서 나의 사사로운 결정 하나가 나의 삶은 물론 후대의 삶과 이웃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두려워하게 하소서.
실패의 지도
2010년 겨울 어느 아침이었다. 나는 당시 수도권 2천만 상수원인 팔당 지역 4대강 사업을 저지하려는 운동에 네 살된 아이를 데리고 기웃대던 사람이었다. 경기도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유기농 농사짓던 농부들이 싸우고 있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만나서 새롭게 하나로 흐르기 시작하는, 그래서 이름이 두 물의 머리, 두물머리였다. 강 흐르는 방향으로 족자섬이라 부르는 작은 퇴적지형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 섬을 배경으로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하나 꽂아두었는데 그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서 나중엔 잎이 무성해졌다. 그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린 여름과 밀려오는 중장비 앞에서 강변 부들로 무장했던 사람들과 아스팔트에 모내기하던 날 들었던 북소리를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이 글을 쓰려고 숨을 고르며 앉았을 때 나는 어떤 아침을 기억하게 되었다. 다급한 연락을 받고 해도 뜨기 전에 도착한 겨울 강은 미치도록 추웠다. 열댓 명이 꽁꽁 언 강 위에 서서 입김을 피워 올리며 노래를 불렀다. 생명과 평화에 관한 노래,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였다.
눈물이 줄줄 흐르다가 콧물이 꿀꺽 넘어갔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 노래와 함께 떠오르던 태양을. 아침 볕에 물들던 그 얼굴들을. 나는 집으로 돌아와 생전 처음 저렇게 시를 썼다.
애초 정부는 팔당 유기농을 장려하였고 경기도는 '세계유기농 축제'를 유치하기도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4대강 사업 이후 유기농 농사가 수질오염의 주범이라며 몰아세웠다. 4대강 사업은 그 예산안이 국회에서 심의 통과되기도 전에 이미 강행되었다. 국책사업임에도 합리적인 검증 절차와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사업이다. 국가재정 투입의 합리적 검토를 위한 사전 예비타당성은 무시되었고, 환경적 영향 검토를 위한 사전 환경성 검토와 환경영향평가는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다. (4대강 사업 위헌·위법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 국민소송 취지문에서) 토건 공사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지자체의 4대강 사업권은 강제로 박탈되었고, 사업 예산이 2년 연속 날치기 통과되는 폭거가 자행되었다. 날치기 예산통과와 함께 토건개발 악법, 반(反) 생태 악법인 ‘친수구역 활용에 대한 특별법’도 통과되어 국가하천 주변 난개발과 부동산 투기, 수질오염 등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밤낮 없이 강행되는 무리한 공사로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강 생태계와 동물과 식물들은 죽어갔다. 강물이 피로 변하는 참담한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4대강사업저지 천주교연대 성명서 중에서) 급기야 공사 저지 투쟁을 위한 컨테이너를 들여놓던 날 우리는 용산 참사를 떠올리며 많이 울었다. 법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강제철거와 공사강행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댐 설치는 막았지만, 두물머리 그 비옥한 퇴적층 유기농지는 시멘트 발바닥이 되었고 애써 살아내던 나무 십자가 자리엔 비석처럼 큰 공공 조경석이 들어앉았다. 양수역까지 빙 둘러 자전거도로가 났고 인공의 정원들이 만들어졌다. 2012년에도 남아있던 딸기농장에서 할머니들과 잼을 만들었지만, 그분들이 어디로 떠났는지 모른다. 강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다며 친구들이 만든 생태 화장실과 퇴비를 만들어주던 지렁이 동무들의 안부도 모른다. 냉이가 많아서 겨울부터 캐 먹던 그곳은 시멘트 공원이 되고 나서도 블록 틈으로 냉이꽃이 봄마다 만발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서울 강서구와 경계를 이룬 김포 고촌읍 내 집 앞으로 별안간 운하가 생겼다. 작은 아이를 뱄을 때 논두렁길로 강서구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돌아오곤 했었다. 땅만 보고 걸어도 심심하지 않았다. 이따금 논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와 너덧 뼘 논둑을 건너 옆 논으로 풍덩 들어갔다. 땅만 파면 우렁이가 나오던 비옥한 땅이었다. 겨울에도 낱곡이 많아서 철새가 까맣게 들판을 덮곤 하였다. 수만 년 퇴적작용이 만든 천혜의 농토였다. 그런 곳에다 대형 선박이 드나드는 운하를 만든다고 땅을 팠다. 바닷물이 들이닥쳤다. 계절이 지난 돌아온 철새들은 무리 지어 방황하다 고층 아파트에 부딪혀 죽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운하에 중국 가는 화물선까지 온다고 대대적으로 선전을 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개장 당시 크레인은 엄청나게 움직였는데 컨테이너 트럭은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고 주민들 사이에 말이 돌았다. 게다가 몇 개 있던 컨테이너 가운데 대부분은 X - 레이 검사로 빈 컨테이너였음도 언론 취재를 통해 밝혀졌다. 그날 정박한 중국 배는 김포터미널 개장식에 맞춰 한진해운이 며칠 더 기간 연장으로 정박시킨 것이었다. 더구나 이 배에 선적된 짐들은 이미 인천공항에서 세관을 통과한 것들이었다.
그 운하를 만들기 위해 한강 하구 김포대교 인근 군사용 철책이 철거되었다. 50년 가까이 출입이 통제되었던 이유로 생물 다양성이 지켜져 온 곳이었으나 속절없이 사라졌다. 2012년 4월 9일, 북한의 광명성 3호 발사로 온 나라가 온통 뒤숭숭하던 날이었다. 한 달 전에 제주 강정에서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다며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구럼비 폭파가 시작되었는데, 북한 땅이 보이는 한강 하구 전호리에서는 군 장병들이 군사용 철조망을 뜯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토록 “안보! 안보!” 강조하던 메이저급 보수언론 하나는 “뻥 뚫린 한강, 속이 다 시원하다”라고 헤드라인을 달았다. 그 신문의 제목을 보며 재난의 실체를 깨달았다.
신석기 때부터 농사짓던 한강 하류 비옥한 평야였다. 지평선에 나란하던 마을마다 농악이 달랐고 품앗이 두레 문화가 다 달랐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이제 알 수 없다. 무엇이 사라졌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같은 때, 변경의 섬 제주는 군사주의 세력의 오래된 욕망으로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파국에서 배우기”
정부와 해군은 역대 어느 기지 건설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며 자랑을 했다. 그러나 현장의 진실은 달랐다. 군사주의의 욕망과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은 뉴스에서 직책 높은 이들의 인터뷰 배경 정도였고, 그때 그들은 고함을 치거나 경찰에 끌려나가는 것이 전부였다. 강정에서 해군과 정부가 했던 방법은 현지 공작으로 마을회의 유치 결정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근거로 기지건설을 강행하고 있었다. 주민들 가운데 찬성파를 지원하고 정부가 직접 마을 일에 개입해 ‘민주적 절차’라는 합리성을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자 '공동체 회복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발자금 지원을 미끼로 다시 일부 주민을 추동하는 중이다.
이렇듯 군사기지 문제는 그들의 밝히듯 외교나 안보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안전, 민주주의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절차적 합리성은 실제 민주주의를 방해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힘의 관계에서 패배하고 앞으로 올 이웃 강국의 적대 조치와 기지 이용까지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싸움을 끝낸 국가가 자국 시민을 협박해 패배를 받아내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재난이 된 건 국가의 방식을 믿을 수 없게 된 시민사회의 심리적 공황상태였다. 깊은 불신이야말로 절망의 표상이니 말이다.
재난은 운하나 해군기지, 공항에서 오는 게 아니다. 그것들이 오는 방식에서 오는 것이다.
나는 폐허에서 도망쳐 제주에 왔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출발한 그곳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여기서 만난 많은 사람이 ‘지키고 싶다’라고 했다. 지켜야 한다는 말은 빼앗기는 광경을 배경으로 하지만, 아직은 지킬 것이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제주도는 하나의 공동체라고 느낀다. 그 이유는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숙명’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숙명이란 것은 ‘운명의 당연한 몫’이 아니라 ‘이 현실’을 응시하는 자들의 통각 같은 것이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빼앗긴 것들과. 빼앗긴 지도 모른 채 빼앗긴 것을 깨달은 자의 뒤늦은 통각들이 모여들었다.
2015년 겨울, 강정마을에 여덟 살 아이와 강정마을에 살러 왔을 때,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곳에 아이까지 데리고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강정엔 분명 절망이 흔하지만, 그 절망에서 도망치지 않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에겐 이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세상의 문제점을 일찍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상처를 견딜 만큼 자랐다고 생각하기 전엔 미리 말해주지 않는다. 그 방법이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그들을 미래세대라는 가상의 역할로 밀어두곤 하였다. 그러나 여기 강정에선 미뤄둔 현실을 ‘지금 여기’로 끌고 와서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강정은 사실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자본과 명분으로 무장한 거대 공권력에 비하면 한 줌도 안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수 년을 싸우고도 건강한 정신력을 갖고 우아하게 사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 궁금증으로 그들과 한솥밥을 먹게 된 것인데, 이후에 이 광경을 ‘재난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두물머리 짧은 투쟁의 기억 속에도, 내 집 앞에 들어서던 4대강 부스러기 경인운하 사업을 고민하는 과정에서도 경험했던, 재난 속의 미래, 재난 상황 속에서 재난의 본질에 질문하며 미래의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했던 얼굴들을 알고 있었다.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사람들은 재난이 닥쳤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1980년 광주를 항쟁이라 할 수 있는 이유 역시 그가 말한 ‘재난공동체’ 즉 외부의 거대한 폭력에 맞선 공동체 결속이 만들어 낸 미래적 상태, ‘재난유토피아’에 있다. 강정마을이 해군기지에 맞서 싸우는 긴 시간 동안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로 그 재난공동체가 일상에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제주도청 앞에 천막을 치고 2년 가까이 제주 제2공항 문제에 질문하며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더이상 갈 곳 없으니 여기서 세상을 바꾸자. 우리가 먼저 바꾸자"
일방적으로 달려가는 국토부의 제주 제2공항 기본계획 중단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는 제주도청 앞으로 왔다. 처음 시작은 제주 제2공항을 반대하며 무기한 단식 열흘째를 지나던 동료 시민 곁에 천막을 짓는 것이었다. 며칠 지난 2019년 1월 3일이었다. 국토부가 기습적으로 제2공항 용역 기본계획 용역에 착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입지선정 타당성을 재조사하면서 사실상 중단됐던 관련 절차를 국토부가 임의로 6개월 만에 재개한 것이다. 도청 바로 앞에서 제2공항 문제로 천막 농성 중이던 우리에게 그 소식은 말 그대로 날벼락이었다. 사람들은 도청 계단에 주저앉았다. 사람이 계단에 앉자 건장한 도청 공무원들이 달려와 에워쌌다. 절망에 활활 타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밤, 우리는 보았다. 오늘 이 광경을 만든 원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밤이 새도록 계단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진압은 도청 출입문을 백여 명의 사람들이 수 겹으로 막는 것으로 시작됐다. 계단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포위되어 밖에선 보이지도 않았다.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팔다리가 들려 누군가는 치마가 올라가고, 겹쳐 입은 옷 네 겹이 다 벗겨지고, 떨어져 머릴 다친 채로 내동댕이쳐졌다.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관청 마당이 울음바다가 됐다. 그렇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시작한 행정대집행은 끝날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다시 그 계단으로 달려가고, 달려가고, 달려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제주 공권력은 시민의 도전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 광경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참아온 분노가 축적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밤, 많은 시민이 모여들었다. 천막을 다시 세웠다. 더 세웠다. 계단 위 웅크린 밤샘도 다시 시작됐다. 아침이 밝았다. 천막이 또 늘었다. 그렇게 제주도청 앞 천막촌은 시작됐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우리에게 닥친 재난을 응시하고 현실로 받아들인 다음에야 가능했던 선택이다. 도주하지 않고 싸우기로 한 이유는 나 역시 폭력을 묵인하고 체념하는 방식으로 폭력에 가담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일종의 스펙타클로 소비해버린 일이 나에게도 있었다. 나의 권리가 누군가의 착취를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기도 했다. 내가 사용하는 전기에 석탄이 묻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를 생산하다 죽은 비정규직 젊은 노동자의 피가 당장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제주 섬에서 일어나는 난개발 이면엔 국가가 동원하는 주민이 있다. 이때 주민은 국가가 발부하는 자격이었다. 마을을 깨뜨리고 들어온 핵 함선보다 두려운 것은 ‘안보’라는 간판만 쓰면 어떤 일도 묵인된다는 것이었다. 소수 특권층이 안보 이슈를 독점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한 그 어떤 논의에도 포함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우리의 구호는 적들로 타자화한 이웃의 고통 위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 파국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 이를테면 천막촌 사람들은 강행되는 제2공항 논리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인류의 이름으로
며칠 전 재판을 준비하며 제주도청 현관 옥상에 올라가 기자회견 했던 날의 성명서를 찾아 읽었다. 이미 이 사람들은 제2공항이라는 사건만으로 싸우지 않는다. 이 집단은 제2공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공권력의 ‘관성적 안이주의’와 ‘기계적인 절차이행’이 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 주범이라는 인식 위에서 싸운다. 목적을 위해 ‘과정의 다양성을 일축하는 권력의 위험’에 맞서는 것이다. 국토부를 비롯해 국가가 한 일은 그들이 하던 대로 국가사업을 밀어붙인 것이었으나 이제 그 방식의 유효기간은 끝난 것 같다. 전 지구적 위기와 절멸의 실감 앞에 인류는 분명 더 큰 인류가 될 것이 자명하다. 여기 이 사람들이 인류로서의 책무로 싸우는 것처럼.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너무도 중요해서 옮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