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탄광도시 태백의 가치…'성역화?'로 되찾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탄광도시 태백의 가치…'성역화?'로 되찾는다

⓵석탄산업의 메카에서 폐광도시로 추락한 태백시

국내 유일의 ‘탄광도시’로 출범했던 강원 태백시가 ‘탈석탄’정책으로 석탄산업 붕괴 위기를 앞두고 ‘성역화’(성지화)작업에 본격 나서면서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1981년 7월 1일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쳐 ‘광도’()로 출범한 태백시가 오는 2021년 7월 1일이면 개청 40주년을 맞이한다.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1936년 개광한 장성광업소는 태백 탄광촌의 시발점이었다. ⓒ프레시안

국내 유일의 에너지자원으로 국가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석탄산업은 ‘국민연료’로 사랑 받았고 덤으로 ‘산림녹화’의 일등공신 역할도 했다.

그러나 ‘검은 진주’로 대우받던 무연탄이 ‘주유종탄’등 갈팡질팡 정책과 석유, 가스와의 경쟁력 상실로 하루아침에 ‘검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고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은 탄광촌의 ‘저승사자’였다.

이 때문에 탄광도시로 태어난 뒤 탄광으로 융성했던 ‘광도 태백시’가 폐광의 회오리에 휘둘리면서 태백의 위상과 존재 의미가 사라져가는 아이러니를 겪고 있다.

과거 국가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던 석탄산업에서 ‘탄광도시’ 태백의 가치와 의미를 재조명하는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하며 연재를 한다.

  1. 석탄산업과 탄광촌 태백

태백의 역사는 탄광의 역사이고 탄광의 역사는 대한민국 석탄산업의 역사다.

지금은 비록 정부의 ‘탈 석탄’ 정책으로 ‘미운 오리새끼’처럼 사라질 위치에 놓여있으나 과거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일등 공신이었다.

특히 탄광의 지하 막장에서 목숨 걸고 석탄(무연탄)을 캐낸 사람은 광부였기에 광부(산업전사)들이 없었다면 탄광(석탄산업)도, 태백도 없었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981년 7월 1일 태백시가 개청했지만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 장성광업소 개광이 탄광도시 태백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50년 11월 1일 대한석탄공사 창립은 광도 태백에 있어 새로운 도약의 기폭제가 되었다.

▲채탄작업. ⓒ프레시안

이 때문에 오는 2021년 태백시는 개청 40주년을 맞지만 실질적인 태백의 역사는 85년을 헤아리는 것이다.

태백 탄광촌은 85년의 세월을 지나면서 크고 작은 탄광사고와 온갖 평지풍파 등을 겪으며 가슴 시린 한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이는 사라지거나 잊혀질 수 없는 태백의 소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해방이후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은 국민연료의 안정적 공급을 위해 탄광개발을 가속화하면서 태백지역은 탄광촌의 중심지로 부각되었다.

장성광업소 개광으로 장성과 철암에 탄광촌이 들어선 이래 태백지역은 동점, 황지, 화전, 소도, 통리지역에 차례로 탄광이 개발되면서 전국 최대의 탄광촌을 형성하였다.

이어 태백탄전에서 수도권으로 무연탄을 대량 수송하기 위해 영암선 철도노선의 개통(1955. 12. 30.)에 이어 태백선 개통(1974.6.20.)등 철도노선이 확대되면서 태백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 갔다.

정부는 무연탄의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을 위해 ‘석탄개발5개년계획 및 연료종합5개년계획’, ‘석탄증산8개년 계획’, ‘산림보호강화대책’(벌목 금지)등을 정책적으로 추진해 석탄산업과 태백탄광촌은 ‘일취월장’했다.

아울러 두 차례의 ‘석유파동’과 겨울 성수기마다 ‘연탄파동’을 겪으면서 석탄산업과 탄광촌의 의미와 가치는 더욱 공고해졌고 효율적인 탄광개발을 위해 ‘석탄광육성에 관한 임시조치법’도 제정,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석탄생산이 증가할수록 탄광사고가 빈발하자 정부는 사고예방을 위하여 ‘광산보안법’(1963.3.5.)을 제정했지만 ‘증산정책’에 밀려 광부들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양심의 가책을 느낀 광업인들을 비롯해 강원도와 삼척군, 명주군, 영월군, 정선군 등 폐광지역의 성금(총 1300만 원)으로 1975년 12월 당시 삼척군 황지읍 바람불이 언덕에 산업전사위령탑을 세웠다.

국민연료 생산에 헌신해온 광부들을 산업전사라 칭송했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전사위령탑에 친필 휘호를 ‘헌사’해 의미를 높였다. 또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산 이은상’ 시인도 산업전사의 가치를 찬양하는 비문을 산업전사위령탑에 올렸다.

<~중략~ 영광된 사명을 어깨에 메고 있는 고귀한 산업전사들이다. 더욱이 어두운 땅속 깊은 곳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힘과 지혜와 용기를 다하여 피땀 흘리며 일하는 이들이라. 전쟁터에서 싸우는 장병들과 더불어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하물며 거기서 일하다 불행히도 희생된 이들이야말로 나라 위해 생명을 바친 제물이라 순국의 뜻이 있는 것이니 우리 어찌 옷깃을 여미고 명복을 빌지 않을 수 있을 것이랴.~하략>

.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1955년 2월 이승만 정권에서 19명의 모범 산업전사를 경무대(현 청와대)로 초청해 금일봉을 주고 격려하는 행사도 열었지만 광부들의 역할은 채탄도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들어 무연탄 수요 급증과 ‘국민연료’인 연탄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광업주들은 거부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광부들에 대한 복지제도에 차츰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복지제도는 석탄공사와 대형 탄광 위주였고 중소형 탄광은 사각지대였다.

1975년 ‘석탄장학회’가 만들어지고 사택 제공, 탄광촌 상하수도 정비, 목욕탕 건립, 광부 양곡 지급, 교육기관 및 의료기관 확충에 이어 ‘탄광도시’ 태백시의 승격 여론도 생겼다.

특히 1978년 1월 에너지와 자원을 전담하는 동력자원부가 신설된 뒤 ‘광도 태백시’ 추진에 탄력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1981년 7월 1일 삼척군 황지읍과 장성읍을 합쳐 태백시를 출범시켰다.

▲탄광도시 태백의 상징 산업전사위령탑. ⓒ프레시안

태백시 개청 당시 광부의 숫자는 1만 7812명에 무연탄 생산량은 600만 톤이 넘었다. 전체 광부 6만 3000명과 전국 무연탄 생산량 1986만 톤과 비교하면 전국 최대 탄광도시로 손색이 없다.

당시 태백역 인근 도로를 가로지른 철제 아치에는 ‘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는 표어처럼 광부를 ‘산업역군’, ‘산업전사’로 치켜세웠다.

정연수 탄전문화연구소장은 “석탄이라는 단일 산업으로 시 직제를 형성한 태백시는 맑고 밝은 광도 새태백 건설이라는 슬로건까지 내세울 정도로 탄광도시로서의 자부심이 높았다”며 “한국의 산업발전의 동력은 우리나라 최대 탄광도시인 태백시를 통해서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백시 개청 7년 여 만에 석탄산업과 탄광도시 태백은 벼랑 끝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 단초는 여당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시작되었다.

1987년 12월초 당시 노태우 민정당 후보는 탄광도시 태백시를 찾아 “(대통령에)당선되면 광부 임금을 2배로 인상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발표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자 노태우 정권은 석탄산업과 탄광촌의 숨통을 조이는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시작하면서 광부임금 2배 인상 공약은 탄광촌 태백과 광부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결국 태백은 1989년부터 급격한 폐광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직광부들의 ‘엑서더스’로 최악의 폐광도시로 추락했다.

한편 황지 중심에 위치한 황지연못과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던 절골천은 광부와 부녀자들에게 상수원 및 빨래터로 숱한 애환을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태백을 중심으로 도계, 고한, 사북 등 탄광촌의 상수원 해결을 위해 1986년 착공해 1989년 생활용수를 공급한 광동댐은 안타깝게도 ‘폐광촌의 젖줄’로 빛이 바랬다.

▲불타는 연탄. '서민연료' 연탄 1장에는 광부들의 피와 땀, 눈물이 얼룩져 있다. ⓒ프레시안

또한 1970년대 후반기부터 1980년대의 탄광촌 노동운동도 탄광촌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유신정권의 서슬이 퍼런 1979년 4월 태백산 입구의 함태탄광에서 지부장 선거 무효, 어용노조 퇴진을 요구하며 촉발한 파업으로 탄광촌 최초로 1주일간의 채탄생산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석탄증산이 국가정책목표의 최우선을 차지하던 당시 2000명의 광부들이 일하는 대형 탄광에서 1주일간 채탄을 중단한 것은 국가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었다.

노조 사무실 대신 탄광 소장실에서 노조지부장 선거를 치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된 ‘함태사태’는 주모자들을 경찰이 불법 연행해 폭행과 고문을 가하는 등 사북항쟁의 전초전을 방불케 했다.

아울러 ‘함태사태’ 1년 뒤 발생한 사북항쟁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국에 들불처럼 번지게 하면서 광주항쟁에도 방아쇠를 당긴 ‘민심이반’의 시발점이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임금은)주는 대로 받는 것’으로만 알았던 탄광촌 광부들이 일으킨 사북항쟁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새로운 이정표라는 평가를 받았다.

근로기준법 등의 노동법이 막장에 버려진 탄광촌에서 발생했던 노동운동은 광부들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 수호’ 라는 원초적인 문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절박감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1988년 탄광촌 태백에서의 4.26총선은 광부들의 단결된 힘이 어떤 역사를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류승규 함태탄광노조위원장(무소속)은 태백 탄광촌 광부와 부녀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막강한 집권여당의 후보를 누르고 국회에 진출하면서 전국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류승규씨는 1979년 ‘함태사태’ 뒤 1982년 노조지부장으로 당선된 뒤 어용노조 간판을 버리고 조합원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은 최초의 ‘민주노조’를 건설하면서 국회에 진출한 케이스다.

▲2019년 4월 19일 장성광업소에서 열린 대한석탄공사 파업. ⓒ프레시안

그러나 1988년 6월 어용노조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강원탄광의 성완희씨 분신사건은 태백 탄광촌 어용노조의 부조리한 모습을 끊어내고 민주노조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원기준 광산지역사회연구소장은 “1988년 6월 29일 발생한 성완희 열사 분신사건은 부당해고 복직을 방해하는 어용노조의 만행을 바로잡기 위해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이라며 “탄광촌 노동운동은 성완희 열사 분신이후 노조민주화를 가능케 했다”고 말했다.

박종찬 전 전국광산노조연맹 부위원장은 “광산연맹은 폐광정책 수립 과정에서 일본과 독일보다 나은 폐광대책 조항을 만들어 광업주보다 훨씬 많은 이직광부 보상이 가능했다”며 “탄광촌 노동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에 한 몫을 했다”고 말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홍춘봉

강원취재본부 홍춘봉 기자입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