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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시국선언하다 "인간들아, 동정이 아닌 공존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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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시국선언하다 "인간들아, 동정이 아닌 공존을 바란다"

'절멸 선언' 퍼포먼스..."인간이 멈추지 않는다면 '절멸' 뿐"

"나는 정혜윤이고 오늘 나는 박쥐다. 나는 니파,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 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니파 바이러스 때는 110만 마리의 돼지가 사살되었다. 사스 때는 사향고양이를 끓는 물에 던졌고, 코로나 때는 밍크와 천산갑을 죽였다. 인간은 죽을힘을 다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인 힘으로 산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돼지와 사향고양이와 천산갑과 밍크와 그리고 다른 동물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오늘 나 이수현은 혹등고래로서 말한다. 내가 태어난 후 줄곧 바닷속은 조용할 때가 없었다. 고래들은 물속에서 저주파를 써서 대화하는데, 인간이 타고 다니는 기계와 설치해놓은 기계들이 내는 소음 공해가 엄청나다. 올해는 소음이 줄어 편해졌다. 알고 보니 육지 전역에 바이러스가 돌면서 선박 이동량이 줄었다고 한다. 다른 많은 동물들에 비하면 고래들이 나아 보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이제 고래를 잡는 일을 금지했다. 혹등고래는 수가 늘어 멸종위기에서도 벗어났다고 한다. 내가 고마워해야 하나. 나는 동정이나 환호가 아닌 공존을 바란다."

30여 명의 동물권 운동가·예술가 등이 동물의 모습으로 분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동물의 경고를 전하며 쓰러져 죽었다. '절멸 선언' 퍼포먼스다. 인간과 자연(동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탈성장·탈육식이 이뤄지지 않으면 인간과 동물 모두 공멸한다는 의미다.

▲창작집단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 생물다양성재단이 20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절멸-질병X 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 퍼포먼스를 열었다. 퍼포먼스는 코로나19 확산 우려에 따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지 않고 참가자마다 각기 다른 시간, 정해진 위치에 혼자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프레시안(최형락)

20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절멸-질병X 시대, 동물들의 시국선언' 퍼포먼스가 있었다. 창작집단 이동시(이야기와 동물과 시), 생물다양성재단이 주최했다. 퍼포먼스는 코로나19 확산 우려에 따라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지 않고 참가자마다 각기 다른 시간, 정해진 위치에 혼자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질병X'는 세계보건기구(WHO)는 2018년 2월 발표한 '추후 세계 대유행을 일으킬 바이러스 8가지' 중 마지막 '미지의 바이러스'를 말한다. 앞으로 출현할 것으로 예측돼 대비해야 할 요주의 신종 질병을 총칭한다.

▲20일 서울 중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절멸-질병X 동물들의 시국선언' 퍼포먼스가 진행됐다. 동물의 모습으로 분장한 30여 명의 예술가·동물권 활동가들은 동물의 입장에서 쓴 선언문을 읽고 쓰러지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김한민 씨는 천산갑으로 분했다. 그는 "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밀렵당하는 존재"라며 "이제는 우리가 코로나의 '중간 숙주'라며 우리가 코로나를 옮겼다고 한다"고 호소한 뒤 쓰러졌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들은 '절멸 선언'을 발표했다. 한편의 시였다. 동물이 된 이들은 "현대 인류는 절멸의 재료이자 레시피", "인간이 품는 욕심마다 지구의 암으로 번졌다", "지금 하는 것처럼만 하면 절멸의 성찬이 완성되리라"고 했다.

인간을 향한 경고와 분노가 이어졌다. "당신들은 우리 피난처까지 쫓아와 숲을 불태우고 약탈하다가 바이러스에 걸렸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선언한 지금이 아닌) 1760년부터 당신들이 팬데믹!", "당신들(인간)이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잃어갈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런 퍼포먼스를 준비한 데 대해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비치하는 것보다 좀 더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팬데믹의 근본원인으로 동물에 주목해야 한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박쥐에서 기인해 중간 숙주 동물을 거쳐 인간에게 '스필오버'했다는 설명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야생동물거래가 전염의 확산에 기여했다고 판단한 중국·베트남 정부는 해당 시장을 규제하고 있다.

▲ '양'의 모습을 한 양다솔 씨. ⓒ프레시안(최형락)

▲ 양다솔 씨는 "나는 오늘도 거꾸로 매달린 채 커다란 가위에 발목이 잘리는 꿈을 꾸었다"며 "당신들은 나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서는 털을 깎아내고, 가죽을 벗겨내고 거꾸로 매달라 목을 갈라내 피를 쏟게 한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들은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뿐만 아니라 새로 창궐하는 모든 전염병의 75%, 이미 알려진 전염병의 60%가 동물에서 유래했다"며 "앞으로 도래할 미지의 '질병X'도 인수공통감염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T.H. 챈 공중보건대학 연구진의 지난 7월 논문을 언급하며 "코로나19의 원인을 동물 서식지 파괴(벌채) 및 야생동물 거래로 규정하고 이를 규제할 때 약 10년간 드는 비용은 220억 달러(한화 26조 원)"이라며 "코로나19 팬데믹에 의학 피해액으로 추산되는 10조 달러(한화 약 2만 4000조 원)에 비해 약 2% 수준"이라고 했다.

▲ "나 이슬아는 오늘 돼지로서 말한다. 나에게서 새로운 병이 발견되었다며 당신들은 대책을 준비한다. 이 병은 나를 통해 왔지만 내가 만든 병이 아니며 나에게서 시작된 병이 아니다. 아주 여러 명의 당신들이 힘을 모아 만든 병이다. 나는 태어나 꼬리가 잘리고 이빨이 뽑히고 생식기가 잘린다. 나는 갇힌 채 먹기만 하며 빨리 자란다. 뒤돌아볼 수조차 없는 감옥 같은 공간에서 수없이 주사를 맞으며 자라 당신들에게 온갖 방식으로 먹힌다. 간혹 산 채로 묻힌다. 고통은 돌고 돌아 모두를 아프게 할 것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순록' 정다연 씨. "전방을 끝없이 뻗어나간 도로와 철책, 국경선처럼 이어진 송유관이 모든 것을 끊어놨다"며 "가죽에 덕지덕지 달라붙는 기름 찌꺼기, 더는 마실 수 없는 검은 강, 서식지는 줄어들고 있지만 검은 연기를 뿜는 공장은 멈추지 않는다"고 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이들은 코로나19의 피해를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시각에도 우려를 표하며 팬데믹의 최대 피해자로 동물을 꼽았다. 이들은 "인간으로 인해 감염병을 전염시키는 동물, 역병에 걸려 살처분되는 동물, 전염병에 취약한 공장식 축산 체제 속의 동물들이야말로 이번 팬데믹의 최대 피해자"라고 했다.

'동물과 환경'의 관점에서 이뤄진 퍼포먼스의 끝은 '기후위기'와 '지속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에서 "10년 남았다"고 경고한 부분을 강조했다. 이들은 "한국 정부는 '기후악당'이라고 불리면서도 이번에 발표한 그린뉴딜에서까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 "현희진은 침팬지고, 끌레오의 딸이다. 끌레오 외에 다른 암컷은 없었으며 침팬지 외에 다른 신은 없었다. 끌레오의 마지막 산책을 생각하는 날이면 나는 중얼거린다. 까메룬 남동쪽 구석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 사람들은 거울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크고 둥근 귓바퀴 선명한 지문. 그들은 끌레오의 우아한 육체를 맨손으로 발라먹었다. 부스럼이 자라나 무고한 연인의 밤까지 간지럽혔다. 감기에 걸린 날에도 나는 머리를 빗고 집을 잃어버린 날에도 나는 눈동자를 닦는다. 나무를 베고 구토를 하는 여행자를 훔쳐보기 위하여 아픈 눈에 내 얼굴을 주사 바늘을 찌르는 벌건 눈에 나를 비추어본다." ⓒ프레시안(최형락)

▲"내 이름은 최용석, 닭이로다. 치맥에 치킨, 너희가 물건 찍어 내듯 공장에 가둬 기르고 죽이고 마구 만들어 잡아먹는 닭이다. 학살의 고통을 어찌 알겠느냐. 수백 마리 수천 마리 한곳에 다닥다닥 가둬두고선 병이라도 번지면 방역, 살처분, 그럴듯한 말을 하며 학살하니 주사 놓고 산채로 파묻고 찔러 죽이고 태워 죽이는 일은 이제 그만하라. 산 생명 그만 먹고 화석연료 그만 때고, 원자력발전소 그만 짓고, 엔간히 X먹고 엔간히 X돌아다니고 엔간히 버리고 엔간히 부시고 제발 같이 살자." ⓒ프레시안(최형락)

이들은 또 "전 세계가 한국인 평균 수준으로만 살기 위해서는 지구 3.3개가 필요하다"며 "지구의 포유류 중 36%가 인간, 60%는 인간이 먹기 위한 가축, 그리고 나머지 4% 이하가 야생동물"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후변화·멸종·바다의 산성화 같은 전 지구적 환경 파괴는 자연을 공짜로 여기는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절멸의 운명을 맞이한 동물의 열 가지 유언'이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재정립 △동물 서식지 파괴 중단 △야생동물 거래 및 공장식 축산시스템의 퇴출 △성장과 개발 위주의 경제모델 탈피 △탈성장·탈개발·탈육식에 기반한 생태적 사회로의 전환 △기후위기의 국가재난선포 △인간우월주의 극복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 동물들의 시국선언과 유언 전문은 이동시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가기☞ 클릭)

▲'호저' 유계영 씨. 호저는 열대지방에 서식하는 설치류로 꼬리 윗면이 가시털로 덮여있다. 유 씨는 "나는 정력증강에 탁월하네, 최고의 스태미나 보양식"이라며 "나의 아름다운 가시털을 뽑아 신성한 공예품을 만들어도 좋겠지"라고 말한 뒤 쓰러졌다. ⓒ프레시안(최형락)

▲ 절멸-질병X 동물들의 시국선언 참가자들 합성사진. 이동시 제공.
▲ 절멸-질병X 동물들의 시국선언 참가자들 합성사진. 이동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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