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질수술을 한 A 씨(남성)는 직장 동료인 B 씨(남성)로부터 "너 혹시 애널 섹스(항문 성교)하고 다니는 거냐"는 말을 들었다. A 씨는 불쾌했지만 헛웃음을 지으며 "나는 여자 좋아한다"고 답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함께 있던 다른 직장동료 C 씨(남성)가 결혼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며 A 씨에게 "언제 결혼하냐"고 물었다. A 씨가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답하자 B 씨는 "C 씨가 A 씨를 위로해줘야겠네"라고 말했다. A 씨는 B 씨의 발언이 앞선 발언과 맥락상 이어진다 생각해 매우 불쾌했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는 해당 사건을 성희롱이라 판단했다. 인권위는 "B 씨의 발언이 단순히 성적 언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를 의학적 근거 없이 A 씨의 질환과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성적 지향을 의심받게 할 수 있는 발언으로 이어졌다"며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주는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인권위가 지난 19일 발표한 성희롱 시정권고 사례집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성희롱을 포함한 성폭력은 남성 간에도 발생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뉴질랜드 주재 대사의 성추행 의혹을 두고 "남성끼리 툭툭 칠 수도 있지 뉴질랜드가 오버한다"라는 발언은 우리 사회의 남성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아직 멀었음을 시사한다.
젠더 위계가 지배하는 사회, 생물학적 남성에게도
남성 성폭력 피해 문제는 성폭력 문제에서도 사각지대에 머물러있다. 관심을 보이더라도 대부분 반여성주의에 편승해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를 부각하거나 "남성 동성애자가 가해자"라는 성소수자 혐오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계를 보면 남성 성폭력 피해는 남성 가해자에 의해 가장 많이 일어난다. 또 남성 동성애자는 되레 성폭력 피해 비율이 높다.
오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성폭력은 젠더화의 문제"라고 짚었다. 젠더화는 사회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회적 남성성은 강인함·능동적·가해자성으로. 여성성은 반대로 연약함·수동적·피해자성으로 상징된다. 이런 젠더화는 생물학적 여성에게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오매 활동가의 설명이다. 젠더화는 남성 집단 내에서도 약하다거나 낮은 서열에 위치한 남성에게 여성의 지위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4년 실시한 군대 내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젠더화의 영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목격자를 상대로 원인을 비교한 결과 피해자의 74.7%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말한 데 반해 가해자와 목격자는 "(피해자의) 외모나 태도가 여성스럽다"가 각각 72.9%, 76.8%로 나타났다.
오매 활동가는 "남성 피해자의 경우 고충을 토로해도 같은 남성 집단 내에서 피해 사실을 부정당하는 식의 2차 피해를 겪는다"고 설명했다. 젠더화는 남성 피해자가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지 못하는 이유로도 작용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이미지가 사회에서 승인하는 남성성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피해자 스스로도 사회적 남성성을 내면화해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한다. '성폭력 피해를 당했다'라는 사실이 자신의 나약함이나 무력함을 인정하거나 '동성애자'의 낙인으로 여겨 두려움을 느낀다.
유사강간 비율 높고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특징 보여
오매 활동가는 "남성 성폭력 피해는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상담은 꾸준히 있었다"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경우 매년 5~7% 수준"이라고 밝혔다.
경찰청의 범죄통계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강간, 유사강간, 강제추행, 기타 강간·강제추행을 합한 남성피해 건수는 2014년도에 1066건으로 전체 발생건수의 5.1%, 2015년 1243건(5.8%), 2016년 1212건(5.6%)로 나타났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남성 성폭력 피해에 관해서는 발생 건수 등 통계 조사에 그친다. 전문가들은 "남성 성폭력 피해에 관해서도 구체적인 실태조사나 유형, 지원체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남성 성폭력 피해는 2016에 이뤄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다뤄졌다. 당시 조사에서 신체적 성폭력 피해를 당한 남성은 전체 성폭력 피해자의 1.2%, 성희롱 피해는 0.8%로 나타났다.
여성 성폭력 피해와 다른 양상을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우선 남성 성폭력 피해의 경우 아동·청소년으로 갈수록 비율이 높아진다는 특징을 보였다. 또 남성 성폭력은 강제추행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이는데 그중 유사강간이 다른 성폭력 범죄 유형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2014년 해당 범죄 피해자 중 15.2%가 남성이고 2016년에는 16.9%였다.
'지속적인 성희롱'의 비율이 높은 것도 특징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성희롱 피해 횟수는 3회 이상이 54.7%, 여성의 경우 40.5%로 나타났다. 이 또한 남성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꺼려하는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남성 간병인 D 씨는 자신이 간병하던 조직폭력배 두목 E 씨로부터 약 1년 2개월에 걸쳐 강제추행을 당했다. 강제추행은 E 씨의 집 화장실이나 호텔 사우나 등에서 일어났다. D 씨가 E 씨를 양팔로 안고 변기에 앉혀주려고 하면 E 씨는 D 씨에게 "한번 만져보자, 가까이 와봐라"라며 신체의 특정 부위를 만졌다. D 씨가 싫은 내색을 하면 E 씨는 "나는 00파 두목이다.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라. 네가 어디에 있든 잡아올 수 있다"고 협박했다.
군대와 같이 위계질서가 강력하고 명확한 곳에서 성폭력 경험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 군대 내 성폭력 실태조사에 의하면 남성 간 성폭력 직접 피해 경험 비율은 15.4%, 가해 경험 8.2%, 목격 경험 24.7%로 나타났다.
군대 내 성폭력은 남성 간 성폭력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2016년에 이뤄진 조사에 의하면 △친밀함으로 사소화되고 △계급별 위계질서에 명향을 받으며 △피해자가 비난과 편견에 시달리고 △신체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등이 특징으로 지적됐다.
대학원생 F 씨는 자신의 연구 교수 G 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성추행은 주로 회식자리, 노래방에서 술을 마실 때 일어났다. G 교수는 F 씨의 허벅지와 허벅지 안쪽과 성기 부분을 옷 위로 수차례 더듬고 자기의 허벅지를 주물러 달라고 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같은 연구실의 남성 대학원생 대부분이 G 교수의 성추행 피해자였다.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성폭력, 말할 수 있는 분위기 만들어져야"
해외에서도 남성 성폭력 피해에 관해 관심을 기울인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미국에서는 1997년 남성 성폭력 피해자 3635명을 대상으로 심층조사가 이뤄졌다. 젠더화의 영향은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31%가 성정체성 혼란을 느끼고 50.9%가 성기능 장애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60.6%가 동성애자로 인식되는 것에 두려움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오매 활동가는 "성폭력 문제 해결은 결국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며 "남성 성폭력 피해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폭력을 여성의 문제, 남성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젠더화된 폭력의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매 활동가는 "폭력의 상처와 피해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며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누구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대한 교육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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