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너무 좋죠. 아버지가 편찮으신데 시간이 없어서 평소에는 별로 가보지를 못했어요. 오늘 가보려고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휴가가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아요."
'택배 없는 날'을 맞는 소감과 하루 계획을 묻자 CJ대한통운에서 일하는 택배기사 오정숙 씨는 위와 같이 답했다.
한국에서 택배업이 시작된 지 28년 만에 처음으로 택배기사들에게 함께 쉬는 날이 주어졌다. 14일 CJ대한통운, 롯데택배, 한진택배, 로젠택배 등 4개 택배사 택배노동자들이 쉰다. 이들의 시장 점유율은 80% 가량이다.
택배기사들에게 '택배 없는 날'은 공식적으로 이틀 연속 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다. 택배기사들은 보통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를 쉰다. 법정공휴일이 낀 주 정도를 제외하면 주 6일 일한다. 공식적인 휴가제도가 없어 평일이나 토요일에 쉬려면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해놓아야 한다. 법적으로 개인사업자 신분인 특수고용노동자이다 보니 장시간 노동에 대한 가산수당도 없다.
전국택배연대노조가 많은 날 중 매해 8월 14일을 '택배 없는 날'로 지정해달라고 요구한 것도 다음날이 광복절이어서 최소 이틀을 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코로나19로 물량이 늘어 예년보다도 바쁘게 일해온 택배기사들에게는 꿀맛 같은 휴식이 주어진 셈이다.
"택배 없는 날 끝나면, 코로나19 물량에 더해 추석 명절 다가온다"
문제는 '택배 없는 날'이 지나고 나서다.
오 씨는 쉬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우선 14일에서 16일까지 3일 간 쌓일 물량이 걱정이다. 쉰다고 물량이 다른데로 가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택배 물량은 줄지 않았는데 추석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물량 증가는 이미 택배노동자의 산재사망 급증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통계를 보면, 올해 6월까지 9명의 택배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그 중 7명이 과로사다. 택배노동자과로사대책위원회는 이밖에도 최소 5명의 택배노동자가 과로사했다고 주장한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8년간 택배노동자 산재사망은 한해 평균 2.25명꼴이었다. 2020년 상반기 통계로만 예년 한해 평균의 3~5배 정도의 택배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한 셈이다. 여기에 택배노동자 5만여 명 중 7000여 명만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택배노동자 중 산재사망자의 수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택배 없는 날' 이후 명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택배사 모여 공동선언 서명했지만 내용 추상적"
택배노동자의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택배 없는 날' 하루 전인 8월 13일 CJ대한통운, 한진택배, 롯데글로벌로지스, 로젠택배 등 4개 택배사의 대표이사와 함께 '택배종사자 휴식 보장을 위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공동선언에는 △ 8월 14일을 '택배 쉬는 날'로 지정 △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제외하고 심야시간까지 배송하지 않도록 노력 △ 택배종사자의 건강 상태 점검 노력 △ 안전하고 효율적인 작업환경 구축 노력 등이 담겼다.
노동계에서는 공동선언이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김세규 택배연대노조 교육선전국장은 "택배노동자의 과로사에 대해 택배사들은 도의적인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이번 선언에도 택배사가 택배노동자의 휴식을 위해 1원이라도 더 쓰는 내용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공동선언이 보여주기 식 행사가 아닌지 의심된다"고 비판했다.
김 국장은 " 택배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노력 선언이 아니라 휴가제도 마련이나 심야배송 금지, 인원 충원 같은 실질적인 대책"이라며 "지금부터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택배 없는 날'이 지나고 나서도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는 더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