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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세상의 절반, 데이터는 성별이 있다...그리고 그건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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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세상의 절반, 데이터는 성별이 있다...그리고 그건 남성이었다

[프레시안 books] <보이지 않는 여자들>

'천재'를 떠올려보자.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천재는 아마 십중팔구 남성일 것이다. "여성 천재가 별로 없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게 성별을 가려서 나타나지는 않을 터. 여성 천재들은 없지 않았다. 다만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여성은 지워져 왔다. 영어의 'man'은 경우에 따라 남성을 가리키기도, 인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인간의 디폴트(기본값)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여성은 부수적인 특수한 변수로 취급됐다. 젠더 간 차이는 계속 무시되고 여성은 마치 남성의 신체와 그에 수반되는 삶의 경험이 성 중립적인 것처럼 살아간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일종의 차별이다.

그 결과 여성과 관련된 지식과 정보는 제대로 축적되지 않았다. 그렇게 수천년 쌓인 데이터 공백은 여성을 가난하게 만들고 아프게 만들고 때로는 죽이기까지 한다.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은 부재에 관한 이야기다. 남성 중심으로 설계된 세계가 어떻게 인구의 반, 여성을 배제하는지 방대한 양의 데이터로 증명한 책이다.

여성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저자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는 일상에서부터 기술과 노동, 의료, 도시계획, 경제, 정치, 재난 상황 등 16가지 영역에 걸쳐 여성에 관한 데이터 공백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차별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때도, 거기에도 여성은 있었다

여성의 업적은 쉽게 평가 절하당하거나 남성의 업적으로 흡수되곤 했다. 음악가 펠릭스 맨델스존은 자신의 누나 파니 헨젤의 작품 6곡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했다. 2010년에는 지금껏 멘델스존의 작품으로 알려진 또 다른 악보가 헨젤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최근까지 고전학자들은 오랫동안 로마의 시인 술피키아의 서명이 있는 시들을 그가 썼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여자가 썼다고 하기엔 너무 훌륭하고 외설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네덜란드의 화가 길드 최초의 여성 회원 중 1명인 유딧 레이스터르는 당대에 유명했지만 1660년 사망 후 역사에서 지워졌고 그의 작품은 남편 것으로 탈바꿈했다.

아직도 교과서에는 성별을 결정하는 요소가 환경이 아니라 염색체임을 발견한 사람이 토마서 헌트 모건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 거저리 실험을 통해 이 사실을 밝힌 사람은 네티 스티븐스이며 모건이 스티븐스에게 실험 내용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보낸 편지도 남아있다.

태양의 주성분이 수소임을 발견한 사람은 서실리아 페인거포슈킨이지만 지도교수인 헨리 노리스 러셀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의 부당한 사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일 것이다. 그는 X선 실험과 단위격자 측정을 통해 DNA가 2개의 사슬과 인산 뼈대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의 사망 후 DNA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여 유명해진 것은 제임스 왓슨, 크랜시스 크릭과 모리그 윌킨스였다.

이런 성차별적인 인식은 '객관화된 지표'로 확정된다. 2013년 잉글랜드은행은 파운드화 지폐에 들어가는 유일한 여성 위인을 남성으로 바꾼다고 발표했다. 잉글랜드은행이 고의로 여자를 배제한 것은 아니었다. 잉글랜드은행이 내세운 기준인 '능력'과 '업적'이 실제로는 성차별적이었다는 점을 간과했을 뿐이다. 잉글랜드은행은 젠더 데이터 공백을 등한시하며 결과적으로 남성들의 데이터만 추려, 결과적으로 젠더 데이터 공백의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보여줬다.

남성 중심의 세계, 인간의 '표준형'은 남성이다.

젠더 데이터 공백은 이렇듯 악의적이지도, 심지어 고의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수천 년 동안 존재해온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것이 성차별적이라는 생각조차 못한다.

하지만 여성 데이터 공백은 일상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최신 스마트폰 크기를 보더라도 그렇다. 2020년 하반기 출시 예정인 아이폰12 모델은 5.4인치, 약 14cm다. 애플사는 "한 손 조작에 문제없는 크기"라고 한다. 하지만 여성이 한 손을 쫙 폈을 때 엄지 끝에서 새끼손가락 끝까지 한 뼘 평균이 18~20cm라는 걸 감안할 때 14cm는 여성에게 결코 '한 손 조작에 문제없는 크기'가 아니다.

스마트폰만이 아니다. 구글의 음성인식 시스템은 여성의 목소리보다 남성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인식할 가능성이 70%나 높다. 교통사고가 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중상을 입을 확률이 47%나 높다. 자동차 안전 실험에 사용하는 인형이 키177cm에 무게76kg의 남성을 모델로 한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심장마비의 진단과 치료 역시 남성의 데이터를 기본으로 한다. 심장마비의 전조 증상은 가슴통증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건 남성을 한정으로 한 이야기다. 여성들은 가슴통증 없이 복통이나 호흡곤란, 메슥거림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여성 심장마비 환자들은 골든타임을 놓칠 가능성이 높다.

남성 위주로 설계된 개인보호장비는 여성 노동자를 더 치명적인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1997년 영국의 여성 경찰관은 아파트 문을 부수려고 수격펌프를 사용하다 칼에 찔려 사망했다. 방탄복을 입은 채로는 펌프를 사용하기 어려워 벗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성 경찰관들은 맞지 않는 경찰 벨트 때문에 멍이 든다. 또 자상 방지 조끼 안에 가슴이 들어갈 공간이 없어 불편한데다 조끼가 위로 들려 허리를 무방비하게 만든다. 조끼를 입은 이유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셈이다.

화학분야에서도 데이터 공백은 발생한다. 비스페놀A는 1950년대부터 깨끗하고 오래가는 플라스틱을 만드는 데 사용된 물질이다. 젖병에서부터 통조림통, 수도관에 이르는 수백만 가지 소비재에서 사용됐다 이 물질이 암, 염색체 이상, 뇌 이상, 이상행동, 신진대사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발표됐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비스페놀A가 여서호르몬 에스트로겐을 흉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1970년대부터는 합성에스트로겐이 여성암을 유발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무의식이 설계한 데이터 공백

겉으로는 성 중립적인 것 같지만 성차별 구조와 무관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제설작업이다. 저자는 스웨덴 칼스코가시의 제설 사례를 예로 든다. 제설작업은 보통 자동차가 다니는 주도로에서 시작해 인도와 자전거도로에서 끝내는 게 일반적이다. 대체 이 제설작업의 어느 부분이 성차별적일까.

저자는 '남성과 여성의 이동 성향'을 근거로 제시한다. 여성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남성들보다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이동 패턴도 달랐다.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은 동선이 복잡했다. 출근길에 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노인 가족을 병원에 데려다주며 퇴근길에 장을 보는 등 짧은 이동이 이어지는 식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 무급 돌봄 노동의 75%를 담당한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칼스코가시는 보행자와 대중교통을 이용자들을 우선시하도록 제설 순서를 바꿨다. 그러자 실제로 겨울철 보행자 사고가 눈에 크게 줄어들었다.

제설작업 외에도 성 중립적인 것 같지만 성차별과 긴밀한 사례는 더 있다. 수많은 기업과 대학에서 시행 중인 성과 중심의 업무평가제는 '돌볼 대상이 없는 직원'에게 유리하다. 자녀가 있는 맞벌이 여성은 일터에서 출발선이 다른 경주를 하는 셈이다. 국가의 경제규모를 가늠하는 기준인 GDP에는 집안일이나 돌봄이 포함되지 않는다. 여성의 노동 가치나 생산성을 저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여성은 가사와 돌봄을 이유로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내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차별에 눈을 뜨자

저자는 이런 차별의 단면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난해지고 아프고 때로는 죽음에 이른다는 말이 어떤 과장도 섞이지 않은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여성을 향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증명할 사실근거들을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데이터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국제기구와 NGO, 정부에서 발표한 공식 자료와 주요 매체에 실린 기사, 논문을 엄선했으며 각각의 출처를 빠짐없이 명기하고 참고 자료만 1330여 개에 이른다.

저자는 이러한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우는 것이 남녀 구분을 떠나 우리 모두에게 이득을 준다고 수치로 증명한다. 세계경제포럼은 세계 평균 27%에 이르는 남녀 취업률 격차를 없앨 경우 미국의 GDP는 최대 9%, 유로존의 GDP는 최대 13%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여기에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투자를 늘려 여자들의 무급 돌봄 노동을 줄인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젠더 데이터 공백을 메꾼다는 건 여자들이 하는 일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부록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자들의 일은 유급이든 무급이든, 우리 사회와 경제의 근간이다. 그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지금까지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됐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저자는 책에 현재 활용 가능한 여성 관련 자료의 최대치를 담아봤지만 2000년 넘게 이어져온 데이터 공백을 완전히 채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데이터 공백이 여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들은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방법은 분명하다. 모든 분야에서 여성의 진출을 늘리는 것이다. 의사결정과정에, 연구에, 지식생산에 참여한 여성들은 여성을 잊지 않는다. 여성은 특수한 존재가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함께 세상의 절반을 이뤄온 이들이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웅진 지식하우스 펴냄,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 지음, 황가한 옮김)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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