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의 주역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을 상대로 복직 투쟁 중이다. 김 지도위원은 지난 1981년 10월 1일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현 한진중공업)에 대한민국 최초 여성 용접사로 입사해 1986년 2월 18일 노조 대의원에 당선됐다. 대의원 당선 직후인 그해 2월 20일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3차례에 걸쳐 부산직할시 경찰국 대공분실에 연행돼 고문을 당했고 같은 해 7월 14일 징계해고됐다.
지난 2009년 11월 2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 위원회'는 김진숙 지도위원에 대해 '한진중공업에서의 노조민주화 활동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부당해고임'을 분명히 하면서 복직을 권고한 바 있다. 그러나 사측은 이를 수용하지는 않았다. 김 지도위원의 복직을 기원하는 글 두 편을 <프레시안>에서는 싣는다.
2011년의 뜨거웠던 부산의 여름, 85호 크레인의 위에 하늘볕을 모아 보냅니다.
올해 봄, 부산으로 이사 간 친구를 만나러 갈 일이 있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영도로 놀러갔었어요. 근데 영도다리를 건너는 그 순간 2011년의 여름의 기억들이 소환되었습니다. 부산은 여전히 그때 여름의 85호 크레인으로 가던 길의 순간으로 가득합니다. 사실 희망버스를 타고 함께 가서 행진하고 1박하며, 거리에 잠깐 눈만 붙이고 출발한 50여명의 사람들을 챙겨 서울로 오다보니 부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어요. 버스에서 내려 시작한 부산역의 광장과 영도다리 딱 두 곳만 기억이 나요. 부산국밥집은 간판도 못 봤거든요.
그렇게 저는 다녀왔는데, 나중에 얘기를 들으니 누구누구는 땡땡이 치고 몰래 나가 맛있는 것 사먹었단 말에 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노들장애인야학의 학생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활동가들과 함께 희망버스 한 대를 신청하여 갔었는데요.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당사자 분들의 이동이 만만치 않았어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전세버스에 리프트를 달아 휠체어가 탄 장애인분들도 이동을 할 수 있는 여러 신청경로가 많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휠체어보장구를 이용하는 장애인탑승 전세버스가 서울에 딱 3대정도 밖에 없을 뿐더러 대여하는데 가격도 비쌌거든요.
그렇다면 마음을 모아 사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으니, 일반 비장애인이 타는 전세버스와 트럭을 빌리는 수를 고안해내었죠. 트럭은 말 그대로 전동휠체어를 싣는 용도였어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당사자 분들은 전세버스에 몸만 따로 가고, 휠체어는 트럭에 싣고요. 노동요를 부르며 그 200kg에 육박하는 휠체어를 싣고 나면 다들 기진맥진 했지만, 더 섬세함이 필요했던 것은 전세버스는 버스 전용차선을 탈 수 있지만 트럭은 탈 수 없는 탓에 서울시청, 당시 재능농성장까지 사람은 도착을 했는데도 전동휠체어를 실은 트럭이 오지 않아 전세버스 안에 사람들이 다들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죠.
저는 몰래 바람을 쐬러 전세버스에서 나와 버스 안에 있는 사람을 못본 척 보며 바람을 쐬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생각나 미안하기도 상황이 슬프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습니다. 장애인 화장실 찾아 삼만리, 밥은 식탁이 없으니 이래저래 입에 넣기가 일단 급했던 순간들, 그리고 푸석하게 일어나 아침에 태산보다 높아보였던 경찰의 차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던 감각까지 그렇게 10년이 지난 시간동안에 이따금씩 삐쭉이 튀어나온 기억들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85크레인에 바라보았던 많은 사람들 중 한명인 제가 소리 높여 불러봤던 김진숙 동지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어서 너무 고맙습니다.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학생분들과 함께 가자고 하며, 여러 영상들도 보고 함께 공부도 하였는데요. 그때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샘이 고 김주익 위원장님의 추도사 영상을 보고 눈물을 쏟으셨어요. 가끔 그 눈물의 무게가 생각이 나요. 함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떠나가고 그 빈자리가 여전히 남아졌지만 너무나 바쁘게 또 다른 일상이 채워지는. 그러함에도 그 지나간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은 아니었을까. 저는 아직도 그 슬픔이 감당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무섭기도 합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말, 다시 나의 일터로 돌아가자는 그 말이 가끔 제가 활동하고 있는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만날 때 그렇게 이 세상에 균열을 내고자 할 때 저는 아직도 설레고 그 설레임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던 85호 크레인에서 무탈히 내려와 주셔서 너무 감사한 마음을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꾹꾹 눌러 전하여 봅니다.
국화꽃너머에 생전 보지 못했던 그 열사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함께 하지 못한 순간들이 너무 아쉽고 세상이 억울하여요. 국화꽃은 삐쭉삐쭉이 촘촘히 꽂혀있는 예쁜 꽃인데 왜 누군가를 추모하는 그 순간에 쓰여졌을까요. 김진숙 동지님이 조선소로 복직하는 그 순간에는 예쁜 빨간 장미를 들고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축하의 환호로 채워질 그 땅에서 85호 크레인에 열기를 채워주었던 사람들과 또 다시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아마 저도 오던 길 땡땡이 치고 맛있는 것도 사람들과 먹고요.
건강하셔야 해요. 그리고 함께 산다는 것, 노동자가 살아가는 세상의 존엄함을 증명해주셔서 그렇게 소금꽃나무를 피워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무탈하게 일상을 꼬깃꼬깃 접어가며 살아가겠습니다. 마음을 모아 2011년의 여름을 떠올리며 명희가 김진숙 동지님께 편지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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