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성추행 사태 파문 계기에, 미투 고발자 또는 성폭력 사건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 또는 '피해 주장자'로 지칭해온 관행에 대해 비판·반성이 나오고 있다.
미래통합당 유의동 의원은 15일 불교방송(BBS) 라디오 인터뷰에서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사용한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단어를 듣고 저는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며 "그 단어 속에서 저는 여당의 지금 생각들이 다 함축돼 있다고 본다. '피해자'를 '피해 호소 여성'이라고 하는 것은 혐의 사실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일부러 의도적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이고, 어찌 보면 2차 가해를 더 조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14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SNS에 쓴 글에서 "'피해 호소 여성'?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언제부터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말을 썼나"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해찬이 쓰더니, 심상정이 따라 쓰고, 이제는 민주당 의원들까지. 아예 용어로 확립이 되겠다. 도대체 왜들 이러나"라고 했다.
진 전 교수 역시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말은 피해자의 말을 아직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아직 너의 주관적 주장일 뿐'이라는 얘기"라며 "이 자체가 2차 가해이다. 피해자의 증언을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고, 가해자 역시 행동으로 그것을 인정했다면 '피해 호소 여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들의 지적과는 달리, '피해 호소인'이라는 용어는 오히려 약3~4년 전부터 여성·인권운동 진영에서 먼저 종종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번 '박원순 사태'에서도 이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한 정치인은 이해찬 대표가 아니라 심상정 대표인데, 이는 심 대표가 과거 활동 과정에서 이같은 용어를 자주 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난 2016년 서울 모 사립대에서 일어난 학생 간 성추행 사건 당시 해당 대학교 문과대 여학생위원회에서 "학군단 등이 (피해자) B씨에게 더 이상 2차 가해를 하지 않고,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호소인의 의견을 묵살하지 말라"는 입장문을 낸 것이 언론에서 최초로 이 용어가 보도된 사례다. (2016.3.14. <뉴시스> 보도)
2017년 1월 <여성신문>은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비판하는 취지의 기사에서 "성폭력 피해 호소 여성 '꽃뱀'으로 몰아"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2017년 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가 합동으로 발표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근절 대책'에는 대체로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성희롱 피해자 또는 피해 주장자의 대처 및 유의사항"이라는 표현도 1회 사용됐다.
올해 1월 민주당 남인순 최고위원은 총선 영입 인재였던 원종건 씨에 대한 성폭력·데이트폭력 '미투' 고발이 나오자 최고위원회 회의 공개 석상에서 "성폭력·데이트폭력이 드러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피해 호소인의 용기로 알려지게 됐다. 피해 호소인의 용기를 지지한다"고 발언해 당 안팎에서 박수를 받았다.
박 시장 사건 직전에는 이달 2일 서울대 음대 교수의 제자 성추행 사건에 대응해 꾸려진 '서울대 B교수 사건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기자회견에서 "(가해자) B교수는 피해 호소인의 숙소에 강제 침입했고 수 차례 원치 않는 신체 접촉과 사적인 연락을 강요했다"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용어를 먼저 사용한 것이 누구이든, 맥락이 어떠했든 간에 유의동 의원이나 진중권 전 교수 등의 지적에 경청할 만한 점이 있다는 의견이 힘을 받고 있다. 법조계 인사들도 "공소장 등에도 판결 확정 이전에 '피해자'라는 용어를 쓴다"는 취지의 지적을 내놓고 있다.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목소리를 억압하는 한국사회의 분위기에서 고발하는 측이 스스로 조심하고 객관화하기 위해 만든 말이라 해도, 오히려 가해자 측에 유리하게 전용될 소지가 있는 만큼 이번 사태를 계기로 '피해자'라는 단순한 명칭으로 돌아가는 일을 고민해 볼 만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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