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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어린이 성착취 범죄에 '사법주권' 을 운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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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어린이 성착취 범죄에 '사법주권' 을 운운하는가?

[송기호 칼럼] 법원에 시민적 책임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법정에서 판사에게 예의를 갖추는 까닭은 법원이 법치의 수호자이길 바라는 소망에서이다.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독립된 사법부는 대한민국 공동체의 핵심 정체성이며 필수적 요소이다. 여기서 법률은 시민의 대표자들이 만든 것이다. 법관의 양심 또한 시민적 책임 안에 있어야 한다. 식민주의가 아닌 법치주의에서는 법원은 시민으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1919년 4월 11일, 전민족적 항쟁의 성과로 만든 '대한민국 임시 헌장'은 '민주 공화국'이라는 국가 정체성을 규정하고 모든 ‘인민’에게 신체의 자유를 포함한 기본권을 보장하였다. 나는 이 헌장을 '대한민국 인민'의 법치 선언이라고 본다. 조선 황제 전제를 거부하고 시민이 만든 법률에 의한 지배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대한민국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만든 헌법과 법률에 따라 대한민국 인민을 '심판'하는 불법을 저지르는 '법관'들이 존재했다. 식민주의의 야만은 법의 이름을 가장하고 법의 얼굴로 등장하여, 법치를 빼앗는 데에 있다. '법관'이 오히려 그가 속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시민적 책임에서 '독립'할 뿐 아니라 억압한다. 식민주의는 항상 법치의 반대말이며, 식민주의자는 언제나 반법치주의자이다.

식민주의가 법원에 남긴 유산은 매우 질기다. 나는 대한민국 대법원이 1995년을 근대사법 '100주년'으로 기념하고, 서울대학교가 1996년에 근대법학교육 100주년'기념관을 건립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 100년에는 일제 36년이 들어 있다. 1919년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요구한 법치를 짓밟은 야만적인 식민 지배가 '근대 사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법원은 시민사회와 바른 관계를 세우지 않았다. 법관은 시민으로부터 '초월적' 존재였다. 시민적 책임에서 유리된 존재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스스로 '절간'이라고 부르는 판사실에 갇힌 사법 관료들이었다. 식민주의의 폐해인, 시민으로부터 '독립된' 법관이라는 허위의식에 갇혀 있었다. 대신 법원행정처를 중심으로 높은 바벨탑을 쌓고 그 안에 집단거주하였다.

지난 월요일, 법원은 아동 성착취범을 미국으로 인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법원은 결정문에서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이 '사법주권'에 대한 상호 존중을 토대로 한다고 썼다. 그리고 '상호간 사법 주권의 존중'과 '국제형사 사법 정의를 위한 형사 관할권의 합리적인 배분'이라는 관점에서, 범죄인을 인도할지 말지의 재량을 행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처럼 법원은 사법주권을 재판의 주된 준거로 삼았다.

그러나 법원 결정문에서의 '사법주권'은 법원이 얼마나 시민적 책임에서 동떨어져 있는지를 덮어 주는 개념적 가리개에 지나지 않는다. 법관 앞에 앉아 있는 범죄자는 이미 아동성착취죄에 대한 복역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한국의 검사는 그 사이에 범인의 범죄수익은닉죄에 대해서는 아예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미국의 범죄인 인도청구가 없었다면 이 부분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반면 인도 청구국은 국제 수사를 통하여, 미국인으로 하여금 아동성착취물 배포의 대가로 자신에게 암호화폐를 보내도록 한 범죄자를 자금세탁혐의로 기소하였다. 기소를 하여 처벌하려는 나라와 기소조차 하지 않는 나라 중 어느 곳에서 처벌하는 것이 아동 성착취범의 반문명성에 비추어 더 정의로운가? 대한민국이 가입한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을 보호받을 권리와 성장할 권리를 향유하는 법적 인격체로 보았다. 스스로 가눌 힘조차 없는 생후 6개월된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아동들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이 반문명적 범죄를 엄격히 처벌하겠다는 것을 사법주권이라는 이름으로 막았다. 법원은 시민적 책임을 저버렸다.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인 손정우 씨가 6일 오후 법원의 미국 송환 불허 결정으로 석방되어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사법주권이란 개념은 이 땅의 법치 공동체의 구성원인 시민에게 가해지는 미군 범죄에 대하여 과연 한국 법원이 철저한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 그리고 왜 외국인 투자자는 지분을 투자했다는 것만으로 한국의 법원이 아닌 국제중재(ISD)에 정부를 회부하는 특권을 누리는가에 대하여 고민할 때 사용할 일이다.

법관의 사고가 얼마나 시민적 책임에서 '독립'되어 있는지를 보자. 법원은 결정문에서, 한국의 검찰이 범죄수익은닉죄에 대해 기소조차 하지 않는 행위를 사법 정의와 시민적 책임에서 엄격히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법원은 '범죄인으로 하여금' '불기소로 인한 불이익을 감수하도록 하는 것은' '비인도적 범죄인 인도, 이중처벌 논란을 야기하였다는 점 등에서' '다소 바람직하지 아니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법원에 묻는다.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을 파괴한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겠다는 법정에 인도하는 절차가 왜 '비인도적'인가?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사법정의 실현을 위하여 외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법원은 시민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법원의 '양심'은 시민적 책임 안에 있어야 한다. 법원은 왜 자신이 그토록 시민들로부터 비판을 받는지 스스로를 통렬하게 성찰해야 한다. 식민주의에서 유래한, 시민으로부터 '독립된' 법관이라는 허위의식을 용기있게 마주하고 이것부터 청산해야 한다. 성인지 감수성, 범죄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는 한 형사 판결문의 필수적 공개, 법원행정처의 해체와 시민참여 법원행정 등의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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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호

보통 사람에게는 너무도 먼 자유무역협정을 풀이하는 일에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경제에는 경제 논리가 작동하니까 인권은 경제의 출입구 밖에 나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뛰어 넘고 싶습니다. 남의 인권 경제가 북과 교류 협력하는 국제 통상 규범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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