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35분, 울산시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에서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가 발견됐다.
목격자 없는 죽음이었다.
하청 노동자 정범식 씨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연히 그의 죽음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사고사'를 당했다고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자살'에 무게를 뒀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 죽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은 한 노동자의 죽음을 추적했다. 경찰 보고서와 재판부 판결문 등을 토대로 하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을 추적하고 톺아보는 르포다.
그 죽음의 진실과 경찰의 '몰아가기' 수사,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전문가들의 허상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아무도 모르는 노동자의 죽음' 연재 바로가기 ☞ : 클릭)
김희정 씨 눈에 물기가 맺혀졌다. 가슴에 품었던 남편을 이제야 겨우 보낼 수 있게 됐다. 평생 사라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상처였다. 길고 긴 시간이 걸렸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5년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일하러 울산 조선소로 내려간 남편이었다. 전날 "밥 잘 챙겨먹으라"는 전화통화가 마지막 대화였다. 일하던 중 에어호스에 목이 매여 사망했다.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을 받고 성남에서 울산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내려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살아만 있어 달라고 기도했다.
부질없었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김 씨를 맞이한 건, 싸늘한 남편의 시신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다정다감했던 남편이었다. 더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9일 만에 어렵게 장례식을 치렀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났을까. 집으로 통지서가 한 통 날아왔다. 경찰서에서 보낸 우편이었다. 하얀 종이에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김 씨는 남편이 일하다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남편이었다. 김 씨에게 '자살'이라는 경찰 조사결과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간 경찰의 '최선을 다해 조사하겠다'는 말만 믿었다. 남편 업체 대표도 김 씨를 찾아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두 책임지겠다'고 했다.
경찰의 자살 발표,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남편의 '자살'을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경찰에 수사 기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게 받은 경찰의 수사 기록에 적힌 남편의 자살 이유는 '생활고'와 '의처증'이었다. '생활이 힘들고, 의처증으로 부부 관계가 어려워져 자살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경찰이 부실 수사를 했다고 생각했다.
경찰이 제시한 카드빚과 통신요금 연체 등은 김 씨 가게 수준에서 매우 작은 부분이었다. 게다가 카드빚은 남편 생전에 다 갚았다. 카드값이 빠져나가는 통장 잔고를 확인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경찰이 말한 '의처증'이란 것도 마찬가지였다. 부부끼리 사소한 싸움은 몇 번 했지만, 심각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때부터 노동조합, 변호사, 시민단체 등 남편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죽은 남편이 안타까웠다. 그 원을 풀어주고 싶었다. 살아있는 사람도 사는 게 나이었다. 남편이 마치 자기 때문에 죽은 듯했다. 한겨울 경찰서 앞 1인 시위를 비롯해 항의방문, 기자회견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
소용이 없었다. 한 번 '자살'로 결론 난 남편의 죽음은 바뀌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이 바로 잡히면서 겨우 숨 쉬게 됐다
2018년 3월에는 갑상선암으로 수술을 받기도 했다. 스트레스였다. 수술을 받은 뒤, 병원 입원실에 가만히 누워있는데,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김 씨를 아이들이 간호했다. 아이들에겐 이제 김 씨 하나 남았다. 다시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8월, 남편이 사망한 지 5년 4개월 만에야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결과를 바꿀 수 있었다. 경찰의 '자살' 결론을 그대로 받아 남편의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남편의 죽음이 바로잡히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재판 결과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과 남편 납골당에 갔다. 딸이 남편에게 건네는 한 마디에 가슴 속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시댁 조카와 큰아버지가 남편 납골당에 왔다. 마찬가지로 조선소에서 일하던 큰아버지는 남편이 그런 일을 겪은 뒤, 일도 그만두고 김 씨 가족과 연락도 소원해졌다. 하나 있는 남동생의 '자살'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큰아버지는 김 씨를 보고는 '제수씨 봐서 기분이 좋다. 진짜 고생 많았다"고 다독거렸다. 아이들도 이날 5년여 만에 큰아버지를 만났다. 다들 가슴속에 맺힌 게 많았는데, 일순간에 풀어진 듯했다.
당연한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
당연한 결과를 받기 위해서는 온갖 모멸과 괴로움을 다 버텨야만 하는 듯했다. 그래도 해볼 때까지 하고 싶었단다. 김 씨는 자신이 살아갈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김 씨는 경찰의 사과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다고 죽은 남편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사과가 무슨 소용인가 싶다. 다만 자신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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