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21대 국회 원(院)구성 합의에 최종 실패하면서, 박병석 국회의장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회 전 상임위·상설특위 위원장을 모두 여당 소속 의원으로 구성하는 방안을 강행 처리했다. 국회 상임위원장을 의석 수 비율대로 나누지 않고 여당이 독식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처음이다.
국회는 29일 오후 본회의를 열고 국회운영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 등 11개 상임위원장 선거를 실시했다.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 의원들은 전원 불참했고, 앞서 국회의장·법사위원장 선출 때와 달리 통합당 소속 의원이 출석해 의사진행발언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하는 순서도 없었다.
이에 따라 제1당 원내대표가 당연직으로 겸임하는 국회운영위원장에는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가, 예결특위 위원장에는 민주당 정성호 의원이 선출됐다. 국회 정무위·교육위·과방위·행안위·문체위·농해수위·환노위·국토위·여가위 위원장은 각각 민주당 윤관석·유기홍·박광온·서영교·도종환·이개호·송옥주·진선미·정춘숙 의원이 맡게 됐다.
상임위원장 선거 투표 참여 의원 수는 181명이었다. 여당인 민주당 의원 176명 전원과 열린민주당 등 친여 성향 야당 의원들, 여당 출신 무소속인 박 의장이 표결에 참여했다. 위원장 당선자들은 177~180표를 얻어 참석자 거의 전원의 지지로 당선됐다. 겸임상임위인 정보위 위원장은 국회법 절차상 국회부의장단의 협의가 필요해 이날 선출되지 않았다.
박병석 의장은 앞서 본회의 개의 직후 모두발언에서 "여야는 어제 저녁 원구성 관련 합의 초안을 마련하고 오늘 오전 중으로 추인을 받아 효력을 발생하기로 합의했었으나 야당은 오늘 추인을 받지 못했다"며 "국가 비상 시기에, 의장은 국민과 기업의 절박한 호소를 더이상 외면할 수 없어 원구성을 마치기로 했다"고 강행 배경을 설명했다.
박 의장은 "의장과 여야 모두 국민과 역사의 두려운 심판을 받겠다"며 "국회 운영의 기본은 국민과 국익이다. 어떤 것도 이에 앞설 수 없다는 게 의장의 확고한 신념"이라고 강조했다.
여당인 민주당은 '책임'을 강조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에서 "우리의 책임이 더 커졌다. 전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면서 "본격적인 추경예산 심사에 들어가서, 이번 임시국회에서 반드시 통과돼 하루빨리 어려운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도 "합의에 의한 원만한 원구성 타결을 하지 못해 국민과 의원들꼐 송구스럽다"면서도 "결단하고 행동할 시간"임을 강조했다. 김 원내대표는 "더 이상 좌고우면할 수 없다"며 "국민들께 집권 여당으로서 한 약속을 지킬 시간이 왔다"고 말했다.
박 의장과 민주당은 상임위원장·예결위원장 선출 직후 본회의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로부터 정부의 추경안 시정연설을 청취하고, 바로 이날 오후부터 상임위를 가동해 추경안 심사에 들어가는 등 '속도전'에 돌입했다. 이들이 추경안 통과 목표 시한으로 잡은 ‘6월 임시국회 회기’는 내달 3일까지다.
통합당 "의회민주주의 무너졌다" 강력 반발…정의당도 상임위 선거 불참
통합당은 강력히 반발했다. 주호영 통합당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 모두발언과 SNS 게시글 등을 통해 밝힌 입장에서 "오늘 한국의 의회민주주의가 무너져 내렸다. '민주화 세력'으로 불리는 이들이 한국 민주주의를 목 졸라 질식시키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2020년 6월29일 오늘을, 역사는 한국 의회민주주의가 조종을 울린 날로 기록할 것"이라며 "역사는 33년 전 전두환 정권이 국민에 무릎꿇었던 그날, 문재인 정권이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기록할 것"이라는 한탄도 했다.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과 집권세력은 1987년 체제 이후 우리가 이룬 의회 운영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며 "야당과의 의사일정 합의 없이 본회의를 열고, 예결위에서는 국무위원들을 상대로 정책질의를 하겠다고 한다. 야당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의회를 여당 마음대로 운영하겠다는 독기를 뿜어내고 있다. '1당 독재'의 문이 활짝 열렸다"고 주장했다.
주 원대대표는 "야당이 원구성 협상에서 요구한 것은 법사위 단 하나였다"며 "(이는) 생소하거나 무리한 요구가 아니었지만, 집권세력이 최종적으로 가져온 카드는 '2022년 대선에서 승리한 당이 21대 국회 하반기 법사위원장을 차지한다'는 기괴한 주장이었다"고 지적하고 "21대 원구성 협상에, 2년 뒤에 있을 대선을 왜 끌어들여야 하느냐. '너희가 다음 대선 이길 수 있으면 그때 가져가 보라'는 비아냥으로 들려 엄청난 모욕감을 느꼈다"고 했다.
주 원내대표는 또 "오늘 오전 협상이 끝날 무렵, 국회의장은 제게 '상임위원 명단을 빨리 내라'고 독촉했다"며 "의장실 탁자를 엎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집권 여당이 의회민주주의를 파탄내는 그 현장에서, 국회의장이 '추경을 빨리 처리하게 상임위원 명단 제출을 서두르라'는 얘기를 하는 게 당키나 한 소리냐"고 격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통합당 최다선 의원(5선)이자 야당 몫 국회부의장으로 내정됐던 정진석 의원도 이날 '페이스북'에 쓴 글에서 "(나는) 국회부의장 안 한다"며 "전대미문의 반민주 의회 폭거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했다.
통합당은 본회의 직전 의원총회를 열어 대응 방안을 숙의했다. 김종인 통합당 비대위원장은 의총에서 "다수가 자기들 마음대로 하겠다고 억지를 쓰는 이상 소수가 대항할 방법이 없어 지금 괴로움을 느끼는 순간이지만, 장차 우리가 달성하려는 목표를 위해서는 오히려 하나의 큰 약이 될 수도 있다"며 "(당 소속 의원들이) 주 원내대표를 전폭 지지하면서, 앞으로 의정생활에서 오직 국민만 보고 야당 의원으로서 직무에 최선을 다하면 앞으로 남은 1년여의 기간 이후 정권을 창출하는 좋은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당의 상임위 독식을 계기로 국정 책임론을 부각시키면서, 이를 2년 후 대선에서 승리할 발판으로 만들자는 취지의 말로 풀이됐다. 주 원내대표는 이날 의총장 발언대에 서면서, 당 소속 동료 의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통합당은 향후 추경예산 심의, 상임위 회의 등 국회 운영 전반에 비협조적 자세로 일관하며, 정부·여당 책임론을 강조하고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배준영 통합당 대변인은 "정책 대안과 합리적 비판으로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고 21대 국회에 임하겠다"고 했다.
한편 원내 3당(6석)인 정의당은 이날 본회의에 참석했지만 상임위원장 선거에는 불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변인은 "정의당은 상임위원장 선출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며 "교섭단체 양당은 협상에 실패해 18개 상임위원장을 하나의 당이 독식하는 사태가 되었고,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권 폐지는 논의도 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의당은 다만 "전국민 재난지원금과 노동자·자영업자 직접지원, 대학 등록금 환불 지원 등이 추경에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3차 추경안 심사에는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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