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최근 저서인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The Room Where It Happened : A White House Memoir)에 따르면, 미국의 외교안보 관계부처 수장들은 2018년 7월 27일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및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 이후의 상황을 토의하기 위해 백악관으로 모여들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폼페이오 장관은 비핵화 협상이 "성공할 확률이 제로"라고 말했다. 북미협상 실무 총책을 맡았던, 그리고 국내에선 '매파' 볼턴과는 달리 '비둘기파'로 불려온 폼페이오의 발언이기에 주목을 끈다.
볼턴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폼페이오가 7월 6~7일 평양을 방문해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과 협상해 본 결과 북한은 비핵화를 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폼페이오의 "제로" 발언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협상파' 폼페이오가 회의론자로 둔갑한 데에는 북한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과연 이게 진실일까? 기실 폼페이오는 중앙정보국(CIA) 국장 때부터 비핵화 자체에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트럼프가 전격적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수용하고 폼페이오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면서 실무 총책 임무를 맡기자, 폼페이오도 북미협상에 대한 미국 주류의 냉소적인 시선을 일축하면서 협상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었다. 하지만 이는 '겉모습'이었다.
이와 관련해 폼페이오 방북 하루 전에 나온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신문은 폼페이오가 3차 방북 직전에 "'북한의 핵·미사일 포기를 설득하는 임무는 처음부터 실패할 운명에 처해져 있다'는 얘길 (외부 전문가들에게) 했다"고 전했다. 심지어 측근 참모들에겐 북한과의 협상이 실패할 것이라면 "빨리 그렇게 돼서 우리 정부가 북한에 대한 제재와 외교적 고립이란 '최대의 압력' 작전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폼페이오는 볼턴이 주장한 것처럼 방북 '이후'가 아니라 '이전'부터 협상 성공 가능성에 회의를 품으면서 대북 강경책으로 돌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그의 행보는 이러한 분석을 확인시켜준다.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트럼프가 북미 정상회담에서 몇 가지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었다. 종전선언,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단, 그리고 대북 제재 완화가 그것들이었다. 북한이 이런 주장을 내놓을 때마다 국내외 대북 강경파들과 매체들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으로 폄하하기에 바빴다. 그런데 볼턴은 책에서 이것들이 사실이었다는 점을 확인해주었다.
북한이 폼페이오의 방북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도 트럼프가 약속한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북한 외무성은 폼페이오가 6.12 북미 공동성명의 정신에 맞지 않게 "CVID요, 신고요, 검증이요 하면서 일방적이고 강도적인 비핵화 요구만을 들고 나왔다"며 "극히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특히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이해 "종전선언을 발표하는 문제에 대한 미국 측의 답을 기대"했지만, "이러저러한 조건과 구실을 대면서 멀리 뒤로 미루어놓으려는 입장을 취하였다"며, "우리의 기대와 희망은 어리석다고 말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었다고 자아비판까지 했다.
이뿐만 아니었다. 폼페이오는 방북 직후 기자회견에서 대북 제재 문제에 대해서도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 공약을 준수해야 할 것"이라며, "제재는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되는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유지될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북미 공동성명에 담긴 북미간의 새로운 관계 수립, 대북 안전 보장, 비핵화가 "병행해서 동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면서도 "경제 제재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강조한 것이다.
볼턴의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북한은 "행동 대 행동"을 주장해왔고 특히 비핵화 진전에 따른 제재 완화에 집착했다. 트럼프도 북미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제재 완화 가능성을 언급했다. 하지만 실무 총책을 맡은 폼페이오는 트럼프의 두 가지 중요한 언약, 즉 종전선언과 제재 완화를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또한 북한이 거부 의사를 밝힌 'CVID' 대신'FFVD'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그런데 FFVD는 CVID보다 훨씬 일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볼턴은 "폼페이오를 압박해" 협상을 무산시켰다고 자랑까지 늘어놓았다. 자신들의 대통령이 약속한 것까지 무산시키고 북한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를 제시하면서 "성공 확률은 제로"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전형적인 '자기만족적인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이 아닐 수 없다.
폼페이오와 볼턴이 트럼프에게 제대로 보고한 것인지도 의문이다. 볼턴의 책에 따르면, 폼페이오는 북한이 비핵화 이전에 "안전 보장"을 원했고, "검증"은 비핵화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렇게 보고받은 트럼프는 "그건 개똥같은 신뢰 구축"이라고 말했고, 이를 두고 볼턴은 "트럼프가 몇 달 동안 한 말 가운데 가장 영리한 발언"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폼페이오는 "이는 북한의 전형적인 지연 전술로 그들은 제재를 약화시키기 위해 몰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북 제재를 유지·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폼페이오의 방북 결과 보고가 미심쩍은 이유가 있다. 우선 외무성 담화에서도 밝힌 것처럼 북한이 당시에 원한 것은 트럼프도 약속한 종전선언이었다. 그런데 폼페이오는 종전선언 논의를 꺼려하면서 CVD나 FFVD를 요구했다. 그러자 김영철은 "안전보장"이 이뤄질 때까지 비핵화를 완료할 수 없다고 받아쳤을 공산이 크다. 이게 북한의 근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검증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기본 입장은 '단계적 검증'이다. 이 역시 김영철이 비핵화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검증 받겠다고 보고한 것과 차이가 있다. 김영철과 폼페이오의 정확한 대화 내용을 확인할 수 없지만, 폼페이오와 볼턴이 트럼프가 화낼 법한 내용만 아전인수식으로 보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부질없다고 하지만, 폼페이오가 방북 당시 1차 북미정상회담에서의 합의와 논의 사항을 발전시키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후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폼페이오 방북 이후 트럼프의 다음 목표는 김정은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2차 정상회담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철-폼페이오의 회담이 말싸움으로 끝나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낙담한 김정은은 미국의 의도에 대해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고 실망한 트럼프는 대북 제재를 강화시켜 나갔다.
폼페이오와 볼턴은 "북한이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비핵화에 핵뿐만 아니라 화학무기, 생물무기, 모든 종류의 탄도미사일과 이중용도 프로그램까지 쓸어담았다. 핵도 포기할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서 이들 무기까지 포기 대상에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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