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35분, 울산시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에서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가 발견됐다.
목격자 없는 죽음이었다.
하청 노동자 정범식 씨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연히 그의 죽음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사고사'를 당했다고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자살'에 무게를 뒀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 죽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은 한 노동자의 죽음을 추적했다. 경찰 보고서와 재판부 판결문 등을 토대로 하고 증언을 수집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을 추적하고 톺아보는 르포다.
그 죽음의 진실과 경찰의 '몰아가기' 수사,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전문가들의 허상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아무도 모르는 노동자의 죽음' 연재 바로가기 ☞ : 클릭)
부화뇌동(附和雷同). '천둥소리에 맞춰 함께 한다'는 뜻으로 자기 주관 없이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행동을 일컫는다. 남의 의견을 무작정 따른다는 의미다. 뚜렷한 자기 생각이 없어서 일수도 있으나, 특정 이익이나 관계를 좇아 이런 줏대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전문가라고 하면 특정 부문에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 내지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들의 역할은 미처 알지 못했던 사회 현상이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제도마련 내지는 인식의 변화까지 끌어낸다. 전문 능력으로 사실에 기반한 분석과 전망을 내놓기에 가능하다.
문제는 역기능이다. 전문가들이 특정 이익이나 관계에 의해 '부화뇌동' 하게 될 경우다.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사망한 정범식 씨의 경우, 경찰은 '자살'로 수사를 종결했다.(법원은 고인이 '사고사'를 당했다고 판결했다) 고인이 자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경찰은 추정과 의혹만으로 '자살'로 결론내렸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경찰의 추정과 의혹을 전문가들이 의심 없이 활용해 의견서를 작성했다는 점이다. 경찰의 증거 선별에 전문가들이 문제 제기나 의심 없이 휘둘리면, 전문가 의견서는 ‘주례사 의견서’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고질적인 문제다.
이수정 교수, 경찰 제공 자료만으로 고인 사망원인 분석
"4월을 기점으로 하여 변사자(고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처와 연락을 취하다가 (연락이 뜸해진 것은) 갑자기 심경의 변화를 보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인은 미납된 카드요금이나 통신요금으로 인한 빚 독촉에 시달렸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략)~ 4월경 변사자가 급속한 심경의 변화를 보였던 것은 눈여겨 볼 대목. 급속한 재정적 압박과 처와의 연락 불가는 변사자의 심리상태를 급속히 불안한 쪽으로 몰아갔을 것으로 추정됨. 이런 요소들은 자살가능성을 높이 고려하게 하는 점들임."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가 경찰 의뢰를 받고 작성한 정범식 씨 관련 의견서다. 이 교수는 경찰로부터 받은 '사고현장 블록 사진, 변사자 발견 당시 재연 사진, 보험 내역, 휴대전화 내역, 진료 내역' 등을 분석한 후, 이 같은 의견서를 작성했다.
경찰이 주는 증거 자료만으로 상황을 분석한 셈이다. 애초 결론은 정해져 있고, 경찰의 증거를 객관적으로 따져 봐야 할 의견서는 경찰의 시각을 그대로 따라간다. 악순환이다. 경찰의 증거에 딸린 전문가 의견이 다시 경찰의 추정을 강화하는 악순환이다.
이 교수는 정 씨가 부인과 자주 연락하던 이전과 달리 4월 들어 연락이 뜸했던 점을 자살가능성을 높이는 요소로 분석했다. 그러나 4월1일부터 13일까지 고인은 부인과 함께 성남 자택에서 지냈다. 24시간 내내 함께 지냈기에 부인과 떨어져 지방에서 일할 때와는 다르게 연락이 뜸할 수밖에 없었다.
미납된 카드요금, 통신요금도 마찬가지다. 고인이 받는 월급을 생각한다면 매우 적은 금액이었다. 게다가 고인은 제주도에 1100만 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급속한 재정적 압박'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미납된 카드요금은 곧바로 다 갚았다.
이 교수는 고인 유가족과 동료들이 제시한 자료나 진술은 검토하지 않고, 경찰이 주는 자료만으로 사안을 분석한 뒤, 결과를 도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경찰 주장에 힘을 싣는 식이 되었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 내린 수사보고서에 이 교수의 의견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고인의 사망원인을 심리한 재판부는 종합적으로 증거를 살펴본 뒤 "(이 교수의 소견은) 망인이 자살에 이르게 된 심리적 배경 내지 동기를 합리적으로 설명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법의학자 소견 물으니 '일반인' 입장에서 답변?
경찰 수사보고서를 보면, 이 교수와 마찬가지로 경찰이 제시한 증거만으로 사안을 분석한 전문가들이 상당하다. 한발 더 나아가 경찰 입맛에 맞도록 '마사지'된 분석을 내놓는 전문가도 있었다.
경찰 : (고인이) 추락했다면 4미터 아래로 늘어져 있는 에어호스에 의해 변사자의 목에 2~3회 감길 수가 있는가.
A 씨 : 법의학자로서의 견해라기보다는 일반인으로서의 생각으로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함.
경찰 : 4미터 높이 안전대 핸드레일의 매듭부분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가.
A 씨 : 법의학자로서의 견해라기보다는 일반인으로서의 생각으로 잘 풀리지 않게 만든 인위적인 매듭이라 생각함.
경찰은 A 씨에게 법의학자로서의 전문가 소견을 요청했지만, 정작 A 씨는 '일반인'으로서의 의견을 낸 것이다. 경찰의 '자살'이라는 추론에 '부화뇌동'하는 답변인 셈이다.
물론, 법의학자로서의 소견도 밝혔다. A 씨는 "사건 개요와 부검 사진을 종합해서 보면, 변사자의 사인은 '스스로 목맴에 더욱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됨'이라는 부검 의사의 견해에 무리가 없다고 생각함"이라고 고인의 사망원인으로 '자살'을 꼽았다.
마찬가지로 경찰이 제시한 현장 사진, 부검 사진만으로 사안을 분석한 것이다. 더구나 왜 자살로 분석했는지에 대한 근거나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경찰은 A 씨의 분석을 마찬가지로 '자살'로 결론 낸 수사보고서에 포함했다.
경찰에 의뢰를 받은 또다른 전문가 B씨는 자살 이외의 원인은 '제로'라고 단정했다.
"추락에 따른 변사자의 목에 에어호스가 2회 이상 목 부위를 회전운동으로 감싸는 과정을 거쳐 사망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즉, 그러한 사고의 발생 확률은 영(zero)이다."
그러면서 핸드레일에 묶인 에어호스가 자연적으로가 아닌 인위적으로 묶인 매듭이라고 주장했다. 고인이 스스로 묶었다는 이야기다.
"블록 페인팅 작업 전 샌딩 작업을 할 때, 에어호스를 족장(발판)이나 핸드레일에 묶어 놓지 않는다. (매듭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형성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소견은 경찰이 제시한 자료만으로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경찰은 이러한 전문가 의견을 수사보고서에 그대로 실었다.
재판부 "실족하는 바람에 추락했다"
모든 증거와 진술을 검토한 재판부는 "(고인이) 실족하는 바람에 비계(발판) 아래로 추락했고, 그로 인해 망인의 몸에 감겨 있던 에어호스가 위로 당겨지면서 목이 조여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결했다.
또한, 인위적으로 묶인 매듭이라고 한 점을 두고도 재판부는 "망인이 추락하는 과정에서 우연하게 매듭이 형성되었고, 그 매듭이 처음에는 단단하지 않았으나 망인의 체중으로 인해 점점 조여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고인이 사망한 지 5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난 뒤에야 나오게 됐다. 그 시간 동안 고인의 유가족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고통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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