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주말 벼르고 별렀던 현장 유세 실패로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았다. 지난 20일(현지시간) 열린 트럼프 대통령(이하 직함 생략) 유세에 1만9000명 수용이 가능한 오클라호마 털사 은행센터(BOK)의 3분의 1수준인 6500명 지지자들만이 참석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불구하고 실내에서 대규모 동원 유세를 벌인다는 비판을 무시하면서까지 강행했던 유세를 통해 애초 의도했던 '세력 과시'에 실패했다. 오히려 코로나19 대응 실패,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불거진 인종차별 문제 등은 열성 지지자들의 환호로 덮어버릴 수 있는 이슈가 아니라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그가 직면한 현실의 어려움만 도드라지게 했다.
4년전 2016년 대선 때와 달리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는 '도전자'의 위치가 아니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다는 의미는 자신의 성과를 평가 받는 것이다. 전임인 오바마 대통령이나 실체가 불분명한 '딥 스테이트'(의회와 행정부를 장악한 소수 엘리트집단)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2020년 상반기 예기치 못했던 코로나19와 인종갈등 문제로 큰 위기에 봉착한 트럼프는 지난 주 털사 유세를 계기로 11월 대선까지 남은 5개월 동안 최대한 '바람몰이'에 나설 계산이었다. 자신의 주요 정치적 기반인 '러스트벨트'(동북부 중공업 지대)와 '바이블벨트'(남부 보수기독교 세력이 우세한 지역)의 보수적인 백인 기독교 유권자들이 요구하는 이민 반대, 자유무역 반대, 총기 소유 자유 보장, 낙태 반대, 성소수자 인권 보장 반대, 세금 인하 등을 주요 어젠다로 내세우려 했다.
그러나 '러스트벨트'와 '바이블벨트'의 연결 고리격이자 2016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지역인 오클라호마에서 '어게인 2016'의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려던 계획은 어그러졌다. 21일 새벽 백악관으로 돌아온 헬기에서 내리는 축 처진 트럼프의 뒷모습, 일요일 오후까지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던 트럼프의 트위터 타임라인 등은 그가 얼마나 낙담했는지 말해준다.
지난 주말을 계기로 트럼프에게 던져진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현재의 극도로 분열된 양당 체제 내에서 분노와 갈등을 부추겨 최대한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방식이 아닌 '플랜B'가 트럼프에겐 준비되어 있을까?
트럼프. 동원유세 실패 후 다시 '우편투표 사기론' 끄집어내
트럼프가 22일 끄집어낸 카드는 '우편투표 사기론'이다. 그는 이날 트위터에 글을 올려 "2020년 부정선거 : 수백만 장의 우편투표 용지가 외국과 다른 이들에 의해 인쇄될 것"이라며 "그것은 우리 시대의 스캔들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어리석음이 끝나지 않는 한 우편투표로 인해 2020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부정선거가 될 것"이라며 "우리는 1차, 2차 세계대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투표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우편을 이용해 부정행위를 하기 위해 코비드(코로나19)를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충성파' 윌리엄 바 법무장관도 이날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우편투표의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고 나섰다.
트럼프의 이같은 주장은 지난 5월 트위터를 통해 설파했다가 트위터 본사에 의해 잘못된 정보라는 이유로 경고 문구와 링크가 부착된 주장의 확대, 재생산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지난달 네바다주와 미시간주 선거당국이 등록 유권자에게 우편투표 신청서를 발송하겠다고 결정하자 이들 주에 대한 연방 자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트럼프 또 트위터에 "우편투표=선거 부정" 주장을 담은 게시물을 연이어 올렸었다. 이처럼 이번 게시물은 지난 5월 주장에 "외국(중국을 특정하지 않았지만 내용상 중국을 의미) 세력의 개입"을 추가한 것이다.
트럼프도 2018년과 지난 3월 우편투표...멜라니아, 이방카, 쿠슈너, 펜스 등도 모두 우편투표
이처럼 우편투표를 사기라고 믿는 트럼프 본인도 정작 2018년 중간선거 때와 지난 3월 플로리다 공화당 예비선거 때 우편투표를 통해 투표에 참여했다. 트럼프는 지난해 뉴욕에서 플로리다로 주소를 옮겼다. 22일 <데일리비스트>는 트럼프 뿐 아니라 부인인 멜라니아도 2018년과 지난 3월 예비선거 때 우편투표를 했으며, 딸인 이방카 트럼프, 사위인 제러드 쿠슈너도 2018년 중간선거 때 우편으로 투표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또 이날 <더힐> 보도에 따르면,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는 2018년 예비선거와 지난 4월 인디애나주 예비선거에서 우편으로 투표에 참여했다. 펜스 부통령 부부는 또 2017년 1월 부통령 취임에 따라 워싱턴DC로 이사 오기 전까지 살았던 인디애나 주지사 관사를 주소지로 투표에 참여했다. 이 언론은 “옛 주소를 사용해 우편투표를 한 것이 위법은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트럼프 주장에 따르면 '선거 부정'에 속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케일리 맥너니 백악관 대변인은 우편투표 '매니아' 수준이다. 그는 지난 10년간 11번의 우편 부재자 투표를 했다.
WP "외국정부 개입설, 근거 없어"...공화당 의원들도 동조 안해
한편 트럼프가 이날 새롭게 들고 나온 우편투표를 통한 외국세력의 선거 개입 주장에 대해 전문가들은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 "트럼프 대통령은 우편으로 광범위한 투표를 허용할 경우 외국 정부가 미 선거에 개입할 것이라고 증거 없이 주장했다"며 "선거 전문가들은 대규모 우편투표 부정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각 지역의 투표 관할당국이 우편투표 과정을 엄격히 통제하고 얼마나 많은 용지를 누구에게 발송하는지를 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트럼프의 우편투표 관련 주장에 공화당 의원들도 아직은 크게 동조하지 않고 있다고 CNN이 23일 보도했다.
데브 피셔 상원의원(네브라스카)은 자신의 지역구인 네브라스카에서 우편투표 확대에 대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우리는 5월 예비선거에서 우편투표를 통해 투표율을 높였고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았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로이 블런트 상원의원(미주리)도 이번 대선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우편투표를 확대하는 것에 대해 지지한다고 밝혔다. 셀리 무어 카피토 의원(웨스트버지니아), 밋 롬니 의원(유타) 등도 우편투표의 신뢰성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현재 가시화된 '플랜B'는....
이처럼 자신과 일가족이 모두 참여했던 우편투표에 대해 트럼프가 지속적으로 "선거 부정 가능성"을 언급하고 나선 것은 크게 2가지 의도가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오는 11월 3일 대선 당일까지도 코로나19 사태가 완전하게 종식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우편투표를 통한 투표 참여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된 이후 치러진 예비선거에서 우편투표를 확대, 허용한 주에서는 예상보다 많은 유권자들이 우편투표를 참여했다. 워싱턴주, 펜실베니아주, 조지아주, 네바다주 등에서 약 300만 건의 우편투표가 실시됐고, 이로 인해 최종적인 개표가 완료되기까지 길게는 한달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지역도 발생했다.
따라서 11월 대선에서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선거를 무사하게 치르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가디언>은 22일 "만약 유권자들이 직접 투표하기를 꺼릴 경우, 경선기간보다 더 큰 우편투표의 물결을 불러올 수 있다"며 "11월 3일이 ‘백악관 예비선거’의 밤에 이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 언론은 "트럼프와 바이든의 접전이 해결되려면 며칠, 심지어 몇주가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선거업무 관계자들은 경고하고 있다"면서 "두 후보 중 어느 하나가 압승을 거두지 않는다면 선거에 대한 국가의 신뢰에 대한 전례 없는 시험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현재 트럼프가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이런 불안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기 어렵게 한다.
최종적으로 2020년 대선은 2000년 대선 직후의 혼란이 훨씬 증폭된 형태로 반복될 수 있다고 이 언론은 경고했다. 조지 W. 부시(공화당)와 앨 고어(민주당)가 맞붙었던 선거에서 단순투표는 고어가 54만여 표나 앞섰으나 선거인단 투표에서 부시가 '1표 차'로 승리하는 결과가 나오자 양측은 선거 결과를 놓고 팽팽하게 맞섰다. 투표 후 한달이 넘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선거는 치뤄졌으나 결과는 나오지 않은 불확실성의 기간이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일부 공화당 지지자들이 재검표 장소를 습격하는 폭동이 부시 선거 캠프 차원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이 난동의 현장 지휘자가 트럼프의 최측근 중 한명인 로저 스톤이다.
<가디언>은 "2000년 12월 13일 대법원이 판결이 내려진 뒤 고어는 그의 경쟁자에게 완전히 고개를 숙였다"면서 "많은 정치 평론가들은 트럼프가 고어와 같은 자제력을 보일지 의심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안갯속인 2020년 대선 과정에 대해 최대한 많은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현재 불리한 상황에 처한 트럼프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첫째, 우편투표 등 새로운 룰에 대한 사전 준비를 최대한 허술하게 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어떤 악조건이든 치러진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시 최대한 명분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트럼프의 '플랜B'는 현재로선 이 전략 이외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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