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소속된 학부의 동료 선생님들은 자주 식사를 함께 했다. 나에게는 그들과 밥을 먹으며 학교행정이나 학교식당 메뉴 등에 대해 푸념하고, 학생들에게 받은 스트레스와 문화적 충격에 대해 하소연을 하고,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해 수다를 떨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 혼자선 도무지 벗어나기 힘들었던 짜증이나 불안도, 의구심이나 혼란도, 선생님들과의 맞장구, 위로, 그리고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 같은 것들로 쉽게 해소되곤 했다.
그러나 교수 사회에서는 이런 경우가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다. 더 흔히 보이는 교수들의 모습은 보통 ‘각자도생’하는 삶이다. 전공이나 정통성과 같은 문제로 교수들끼리 반목하기도 하고, 정계 진출, 보직 교수되기, 유명세, 프로젝트 연구비 따기 등 각자의 지향점에 따라 서로 ‘소 닭 보듯’ 하기도 한다. 또한 임용된 시기, 방법, 트랙, 명칭 등에 따라 ‘교수’라 불리어도 다 같은 교수가 아니어서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다르거나 상충되기도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많은 교수들이 동료들과의 교류를 회피하는 ‘자폐’의 생활을 자처하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 수업이 지속되면서 나도 ‘고립’의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고, 모니터 앞에서 혼자 떠드는 강의를 하는 생활은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질문을 수없이 되뇌게 만든다. 당국이나 학교로부터 수시로 바뀌어 내려오는 공문과 지침을 좇아가기에 급급해 무기력하게 순응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지, 이런 불합리한 시스템을 정말 따라야 하는 건지 수많은 의문과 회의가 든다. 그러나 어디에 물어봐야 할지, 이런 걸 따져도 되는지 몰라 많은 순간 그냥 꾹 참게 된다. 그러면서 ‘각자도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새삼 절감하고 있다.
다른 학기처럼 주기적으로 동료들과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있었더라면 그들에게 지나가듯 물어봤을 것이다. “아참, 어제 그건 뭐예요?”로 시작되는 심상(尋常)한 대화는 어느새 열띤 토론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면서 혼자 분개했던 일이 내 오해임을 알고 풀리기도 했을 것이고, 심각한 사안에 대해선 좀 더 분명한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음을 확인하고, 서로 정보와 의견을 공유하여, 때에 따라서는 보다 적극적인 공동대응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개인화, 파편화된 생활은 어떠한 공론화도 어렵게 만든다. 다른 선생님들은 이 불합리함이나 불편함을 그냥 참고 있는 걸까, 나만 성질이 못된 건가, 생각하다가도, 이런 사소한 일로 선생님들에게 일일이 전화해 열을 올리며 물어보자니 또 괜히 멋쩍다.
그러면서 문득, 대학생들의 필수 어플리케이션이 되어버린 ‘에브리타임’, 일명 ’에타‘라는 커뮤니티가 떠올랐다. 원래 시간표 작성을 위해 개발되었다는 에브리타임이란 어플리케이션이 생기고 상용화되면서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관한 수많은 수다, 푸념, 하소연을 그곳에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그곳에서 학생들은 좋은 정보는 공유하고, 때로는 첨예한 논쟁을 통해 이슈를 공론화한다. 교수들에 대한 강의평가나 시험 족보까지 주고받는다고 하니 교수 입장에선 마냥 반길 일만은 아니지만, 모든 글을 익명으로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학생들 입장에선 편하고 유용한 커뮤니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갈수록 대학생들도 각자도생의 삶을 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군대, 어학연수, 아르바이트, 휴학, 취업준비 등이 대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학교, 학과, 동아리 등에 대한 소속감을 4년 내내 동일하게 유지하기 어렵게 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학과, 학번, 성별, 나이, 이름 등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속마음을 손쉽게 터놓을 수 있는 에브리타임이라는 공간은 ‘아싸’와 ‘인싸’의 경계를 허문다.
물론 모든 SNS가 그러하듯 그곳에도 상주하여 온갖 일에 참견하는 피곤한 ‘오지라퍼’도 있을 것이고, 같은 얘기를 무한 반복하는 ‘도배질’이나, 커뮤니티 구성원을 갈라치고 분열을 조장하는 ‘분탕질’도, 어떻게든 ‘어그로’를 끌어보려는 ‘관종’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일단 계급장을 떼었으니 모든 발언이 동등한 가치로 취급받을 수 있으며, 한쪽으로 쏠린 의견을 바로잡아 줄 자정기능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동일 집단에 속해 있는 공동체로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나 자존감 같은 것이 작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같은 학교 학생들에게 얕은 수준이나마 연대와 공동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공론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현재와 같은 온라인 강의에 기반 한 대학교육의 개편을 가속화 하리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대학교의 변화가 빠르고 교수들의 삶이 고립되어 갈수록, 교수들에게도 수평적 연결망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강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듯, 교수들도 학교나 학생에 대해 솔직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또 페이스북과 같은 실명 기반 SNS에서 자신의 제자, 후배들이 눌러주는 ‘사회생활’용(用) '좋아요'만 믿는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교수들은 ‘에브리타임’식의 ‘계급장 떼고 말하기’를 겪어 봐야한다. 다른 교수들은 지금 무엇을 겪고 있는지, 내가 불합리하다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끼는지, 특정한 일에 대해선 어떤 공동대응이 가능할지, 수다 떨 듯 털어놓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구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하다.
교수들 사이에서 ‘대학(교수)의 위기‘를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늘 논의는 공전(空轉)할 뿐이다. 모두에게 동등한 발언의 기회와 권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입 전형의 정시비율 확대, 강사법 시행, 대학평가, 등록금, 대학입학 정원, 해외유학생 유치, 취업률, 산학협력... 고등교육과 관련된 수많은 이슈들이 언론과 일부 교수들의 입으로 말해지고 있지만, 이러한 문제에 대해 대학, 학과, 전공 등에 따라, 그리고 교수의 트랙, 직함, 직급 등에 따라 이해관계도 고충도 제각각이다. 이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절대 선‘을 찾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이야기해주지 않으니 제대로 모르고 있을뿐더러, 사안의 우선순위도 숙의해보기 어렵다.
해법을 찾기 위해선 우선 서로 이야기하고 들어야 한다. 솔직하고 담백하고 다양하게. 학교, 학과, 직위, 직급, 나이, 학번, 이름값 등으로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 아닌, 그저 대학에서 ‘선생질’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만으로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좀 더 다양성과 다성성이 허용되는 공간이 필요하다. 연대는 동등한 대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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