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26일 오전 11시35분, 울산시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13번 셀장 2626호선에서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난간에 매달린 노동자가 발견됐다.
목격자 없는 죽음이었다.
하청 노동자 정범식 씨였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자연히 그의 죽음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유가족과 동료들은 그가 '사고사'를 당했다고 했으나, 회사 측에서는 '자살'에 무게를 뒀다.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그 죽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프레시안>은 한 노동자의 죽음을 추적했다. 경찰 보고서를 토대로 하고 증언들을 수집했다. 이것은 그의 죽음을 추적하고 톺아보는 르포다.
그 죽음의 진실과 경찰의 '몰아가기' 수사, 그리고 '부화뇌동'하는 전문가들의 허상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
사방이 꽉 막힌 공간. 매캐한 냄새가 진동한다. 조명 불빛을 따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먼지와 쇳가루가 떠다닌다. 환기는커녕 햇볕조차 비집고 들어올 구멍이 없는 공간이다. 한 손에 든 작업등이 없으면 한 발 내딛는 것도 어려울 정도의 어둠이다.
철가는 소리, 드릴 박는 소리, 일정한 리듬에 따라 울리는 망치 소리. 그렇게 부딪치는 철과 철 사이의 파열음이 쉴 새 없이 귓구멍을 울린다. 조선소 샌딩공 윤모 씨가 일하는 공간이다.
윤 씨가 하는 일은 샌딩, 페인트칠에 앞서 선박 표면에 붙은 녹이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철판이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페인트 작업을 하면, 페인트가 쉬이 벗겨진다.
윤 씨가 샌딩 작업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그리트(쇳가루). 지름 10cm 호스에서 강한 압력으로 뿜어져 나오는 그리트가 철판에 붙은 녹을 제거한다. 작업 중에는 온 사방에 쇳가루가 날리는 식이다. 쇳가루를 마시지 않으려면 '방진마스크'는 물론, 그 위에 '송기마스크'까지 착용해야 한다.
우주 헬멧과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송기마스크는 뒷부분에 공기 공급 에어호스가 연결돼 있다. 쇳가루가 난무하는 작업공간에서는 자가 호흡이 불가능하다.
그런 에어호스에는 작업등과 샌딩기(그리트 분출 조절기) 리모컨에 전원을 공급하는 전원케이블(지름 1cm)이 결합돼 있다. 리모컨을 'ON'하면 그리트가 분출되고, 'OFF'로 전환하면 멈춘다.
그렇게 연결된 작업선(에어호스, 전원케이블)들은 윤 씨가 일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명선'이다. 우주복 복장을 한 윤 씨의 한 손에는 그리트가 뿜어져 나오는 샌딩기가, 다른 한 손에는 작업등이 부착된 샌딩기 리모컨이 들려 있다.
검은 물체에 감긴 에어호스
그날은 보통 작업날과 다름없었다. 울산 현대중공업 선행도장부 2공장에서 8명의 노동자와 선박 블록 샌딩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노동자들 각자 밀폐된 공간 내에서 자기 작업량을 소화하고 있었다.
선박의 일부를 구성하는 블록은 지상에서 약 4m 정도 높이 위에 떠 있었다. 블록 내부는 가로 7줄, 세로 5줄로 나뉘어 있다. 그렇게 나뉜 구간을 '색션'이라 부르고 그에 따라 작업자들이 들어가 철을 가는 식이다. 이 블록 외곽 부분에는 비계(발판)를 설치해 작업자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리고 그 외부비계 양 측면에는 지상과 4미터 높이로 떠 있는 블록을 오갈 수 있도록 사다리가 설치돼 있다.
윤 씨가 이날 맡은 구역은 5번 색션. 블록 안으로 들어가 작업을 해야 하기에 생명선인 에어호스는 블록 바깥 족장에 설치된 핸드레일에 한 줄로 걸쳐 놓은 뒤 비계 위에 여러 번 둥글게 말아놓았다. 그래야 색션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여도 에어호스에 제약받지 않는다.
블록 안에서 1시간이나 작업했을까. 윤 씨는 자기 에어호스에서 나오는 산소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느껴졌다. 일하다 여러 번 겪는 일이었다. 다른 작업자가 발로 밟거나 다른 물체에 눌릴 경우 이럴 수 있다. '곧 괜찮아지겠지' 생각하며 작업을 이어나갔으나,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15분이 지났을까.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신의 작업 구역 밖으로 나와 에어호스를 걸어놓은 바깥 족장으로 이동했다. 에어호스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 씨의 에어호스는 검은 물체를 감은 채 블록 아래 축 처져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서 보니, 사람이었다. 사람 목이 윤 씨 에어호스가 감긴 채 핸드레일과 4미터 아래 바닥 사이 공간에 매달려 있었다.
에어호스를 제거하고 인공호흡을 했으나...
놀란 윤 씨는 급히 휴게실로 뛰어가 비상 신호인 컨트롤 박스 전원을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작업반장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공업용 커트 칼을 꺼낸 뒤, 사고가 생긴 핸드레일 쪽으로 달려갔다.
한편, 블록 내에서 작업하던 작업반장은 윤 씨의 비상 신호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급히 작업을 중단하고 블록 밖으로 나왔다. 커트 칼을 쥐고 달리던 윤 씨가 마침 블록 밖으로 나오던 작업반장과 눈이 마주쳤다. 윤 씨는 다급하게 손가락으로 핸드레일에 매달린 사람을 가리켰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작업반장은 급히 핸드레일 쪽으로 달려갔다. 그뒤, 윤 씨가 건넨 커트 칼로 사람 목에 감긴 에어호스를 잘랐다. 윤 씨는 아래에서 매달린 사람의 양다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끌어내린 뒤, 얼굴을 살펴보니 함께 일하던 정범식 씨였다. 윤 씨와 같은 숙소 생활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급하게 목에 걸린 에어호스를 제거하고는 작업반장과 교대로 심폐 소생술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심폐소생술을 얼마나 했을까. 현장에 온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번 잃은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 씨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석연치 않은 죽음, 자살 vs 사고사 논란
발견 당시 어떤 이유에서인지 정 씨는 당연히 쓰고 있어야 할 송기마스크를 쓰지 않고, 방진마스크만 쓰고 있었다. 그 마스크마저도 무언가에 맞은 듯, 한쪽이 터진 상태였다. 방진 마스크를 쓰지 않고서는 호흡이 곤란해 작업 자체를 할 수 없다.
정 씨의 샌딩 리모컨도 고장이 나 있었다. 그의 머리 뒷부분에는 무언가에 맞았을 때 발생하는 두피하 출혈이 확인됐다. 이밖에도 옷이 찢어지고 목과 가슴에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새까만 그리트가 박혀 있었다. 밀봉된 소매와 바짓단에서는 상당한 양의 그리트가 발견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도 그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일종의 '밀실 죽음‘이었다. 오롯이 죽음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고인뿐이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결국, 그가 죽었을 당시의 정황과 증거를 근거로 추측만을 할뿐이었다. 자연히 정 씨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발생했다. 자살이냐, 사고사냐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자살이라고 하기엔 근거가 빈약했다. 고인은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고사라고 할 만한 명확한 증거도 나오지 않았다.
각종 추측이 난무한 이유다. 게다가 각자 입장에서 고인의 죽음을 평가했다. 업체 대표 등 사측에서는 고인의 자살에 방점을 찍었고, 유가족과 동료들은 사고사에 무게를 두었다. 그의 죽음이 오리무중으로 빠진 이유다.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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