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코로나19를 이 정도로 관리하고 있는 것은 국민한테는 정말 복이다. 이 복은 절로 오지 않았다. 다른 선진국에 견주어서도 질서정연한 시민 의식, 그리고 보건의료인의 헌신과 질병관리본부로 상징 되는 정부가 있었다.
방역을 책임진 질본은 중앙방역대책본부로서 1백점 만점에 90점이 넘는 합격점을 받았다. 대학에서 에이(A) 학점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수를 따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있었다. 지난 메르스 사태 때 국민한테서 받았던 경고는 약이 되었다. 질본의 상징인 정은경 본부장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 인물이 되었다. 일약 유명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와 팬을 지니고 있다. 대통령보다 미디어에 자주 나오는 인물이다.
하지만 질본은 조직으로서 여러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국립보건원-질병관리본부로 이어져 오면서 드러난 문제다. 인사와 예산권도 없다. 전국 조직도 없다. 사실상 머리만 있고 손발이 없다. 그럼에도 코로나19를 잘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은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헌신적인 노력과 팀워크를 잘 발휘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 가을에 제2차 코로나 유행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지적과 날이 갈수록 잦아지는 치명적 신종감염병의 등장에 질본에다 더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이번 기회에 질병관리청으로 승격시키기로 했다. 감염병연구소도 만들기로 했다. 국민의 지지와 힘 있는 여당이 있기에 조만간 이는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무늬만 승격, 실제 역할은 지금보다 못할 수도
하지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무늬만 승격이지 질병관리청의 역할이 오히려 줄어들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질병관리청을 눈코입이 제자리에 있고 손발이 멀쩡한 조직으로 만들도록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도 제기되고 있다.
정부가 질본을 청으로 승격하기 위해 내놓은 정부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전문가들과 국민이 그동안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현재 질본 산하에 있는 국립보건연구원을 보건복지부로 이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밑에 감염병연구소를 두는 방안을 정부는 제시했다.
그런 정부 조직으로서는 질병관리청이 된다 한들 감염병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 질병관리청으로 승격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 두는 만도 못하다. 보건복지부나 총리실, 청와대 등이 머리를 맞대고 이런 개정안을 마련해 입법예고했을 것이다. 정부 조직을 바꾸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등 여러 부처는 물론이고 총리실, 청와대 등과 사전조율을 거친다.
따라서 왜 이런 개정안이 국민 앞에 선보이게 됐는지 그 과정을 소상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아마 질병관리청과 국립보건연구원을 따로 떼어놓는 것은 미국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지 모른다. 미국과 대한민국이 똑 같을 수 없다. 질병관리청에 연구 기능을 함께 두어 큰 문제가 생길 경우 분리해도 된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본다.
정부는 시험·연구 기능을 질병관리청과 분리하는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그대로 두고 이제 걸음마를 하게 될 질병관리청이 지역조직까지 지니게 될 때 이 조직이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조직 설계와 관련 기관 연계, 인력과 예산 확보에 더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17년 전 사스 때 질병관리청 신설 필요성 보도
개인적으로 감염병 관리 조직에 대한 관심이 크다. 일찍부터 질병관리청을 만들어 감염병 예방과 대응 등 관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문가로서, 언론인으로서 해왔기 때문이다. 대다수 언론과 시민, 그리고 일부 전문가조차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 질병관리청 문제가 제기된 것으로 알고 이야기하거나 보도하고 있지만 이는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17년 전에 질병관리청 신설 문제가 본격 제기됐다.
기자로서 1980년대 중반부터 지금의 질병관리본부 전신인 국립보건원을 드나들며 취재보도를 해왔다. 전공이 미생물학·보건학이었고 보건원에 대학 동문들도 있어 당시 서울 불광동에 있던 보건원을 거의 모든 기자들이 1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할 때도 한 달에 두어 번 이상 갔다.
그리고 2002년 말 사스가 터졌고 우리나라도 2003년부터 국내 상륙과 유행을 막기 위한 비상 방역체제에 들어갔다. 보건복지부가 있던 경기도 과천과는 멀리 떨어진 불광동으로 거의 매일 출퇴근을 했다. 그리고 당시 간이침대를 집무실에 두고 숙식을 해결했던 김문식 원장, 사스대책자문위원장이었던 박승철 고려대 의대 교수(작고) 등과 매일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당시 보건원 체제로는 앞으로 다가올 신종 감염병 위기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다른 언론인과는 달리 질병관리청 신설에 관심을 쏟았다. 무려 17년이 더 된 일이다. <한겨레> 아카이브에 들어가 당시 쓴 기사를 찾아보았다.
질병관리청,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
2003년 4월16일부터 질병관리청 신설과 관련해 보름간 4건의 기사를 다루었다. 5월에도 한 건을 보도했다. 기획기사, 스트레이트 기사, 인터뷰 기사 등 다양한 형식을 동원해 질병관리청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전염병연구소와 전염병연구사업단이 필요성과 함께 질병관리청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약하다는 비판도 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2년 넘게 근무하다 귀국한 보건복지부 사무관의 말을 빌려 “국민소득이 높아질수록 건강과 생명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기 때문에 우리도 이른 시일 안에 새로운 방역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미국은 공중보건 분야를 국가안전 차원에서 다룬다. 우리 의과대학에서도 의대생들이 공중보건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새로 짜야 한다”는 지적도 했다.
당시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을 인터뷰해 “지난 30년 동안 20여개의 신종 전염병이 등장했고 앞으로도 사스에 견줘 훨씬 치명적인 슈퍼독감, 생물테러 등이 발생해 국내에 들어올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금의 국립보건원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병관리청 승격은 물거품이 됐다. 국립보건원을 지금의 질병관리본부-국립보건연구원 체제로 바꾸는데 그쳤다. 그 뒤 10여 년 동안 질병관리본부는 1급 본부장으로 있다 2015년 메르스를 겪은 뒤 차관급으로 승격했다. 그뿐 다른 것이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현될 가능성이 100%에 가까운 질병관리청 승격을 코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를 하게 된다. 17년 전 필자가 주장했던 질병관리청의 위상보다도 훨씬 못한 ‘하나마나한’ 조직을 만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질병관리청의 밑그림부터 다시 그리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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