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의 힘'이라는 시에서 백무산 시인은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고 했다.(<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 펴냄) 여기서 큰 전제는 정지에 이르는 힘이 어디까지나 '우리'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달리는 이유'를 안다고 함은, 정지하기 전까지 이유로 삼던 바를 재차 상기한다기보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 우리가 달리는가 하는 차원의 각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도 이 대목을 자꾸 이즈음의 상황과 이어붙이며 코로나19라는 위기가 세계의 작동을 멈추었다는 것, 그렇게 멈춤으로써 지금껏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우리의 힘보다는 우리의 무력함으로 인한 정지일망정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 중의 첫 번째는 '세계의 작동이 멈출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무슨 종말이 도래한다는 말이 아니라, 세계가 작동되던 방식에 대한 이제까지의 신뢰가 크게 무너지고 그에 따라 애착도 크게 줄어든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드는 온갖 사태를 그저 두고 보면서 익숙한 애착 체계에 편승"하는 감정 현상을 가리켜 '잔혹한 낙관'(cruel optimism)이라 부른다.* 삶을 잠식당하면서도 잔혹한 낙관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는 '애착'이라는 형식이 연속성의 느낌을 주고, 그래서 삶에 무언가 지속적인 의미가 담겼다고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가 지금까지처럼 작동할 수 없다는 의식이 더 커지면 애착에서 연속성을 얻을 수 없고 마침내는 낙관 없이 그 잔혹함을 직시하게 된다. 비상한 위기 속에서 우리가 대담해질 수 있는 것은 그렇듯 부질없는 애착에서 벗어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런데 세계의 연속성에 대한 애착이 제일 끈질기게 남는 지점은 '먹고사는 일'이라 통칭되는 경제 영역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무엇 보다 먹고살아야 하니 경제가 돌아가야 하고 멈춰서는 안 된다'는 애착 말이다. 이 애착이 잔혹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 수가 엄청난데도 이렇다 할 대책 없이 경제 정상화 또는 경제 재개를 부르짖는 장면이다. 말 그대로 "숨을 쉴 수가 없다"(I can’t breathe)는 절규로 가득한 미국의 현재 상황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그렇듯 숨 쉬고 살지 못 하게 하는 '먹고사는 일'이란 무엇이며 모든 것을 무릅쓰고라도 재개되어야 하는 경제란 무엇일까. 정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들어왔기에 경제에 관한 한 '달리는 이유'를 알기란 한층 어려운 듯 보인다.
그만큼 '잔혹'하다고 할 수는 없어도 경제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만드는 장면은 이 위기의 시대에 드물지 않다. 총선으로 드러난 국민의 뜻에 따라 재난지원금 전 국민 지급이 추진될 때 가장 중요한 반대는 정부 내 기획재정부에서 나왔고 국가의 재정건전성을 훼손한다는 것이 그 주된 근거였다. 논란은 해결되어 전 국민 지급이 실행되었지만 추가지급 가능성을 둘러싸고 기획재정부는 반대 입장을 재차 강조한 바 있다. '경제를 알지 못하는(경알못)' 사람에게 재정건전성이란 매우 준엄하게 들리고, 그 건전성이 어떤 수준에서 확보되는지 판단할 능력도 부족하다. 하지만 '경알못'이라도 국민의 뜻과 재정건전성이 대등한 차원인지 질문할 수는 있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인 한 국민의 뜻에 따르면서, 그러니까 이 경우 전 국민 지급을 이행하는 조건에서 재정건전성을 확보할 방도를 따로 찾아야 했던 게 아닌가?
한편에서 경제는 자율적이므로 설사 주권자의 뜻을 실현할 목적이라 해도 '보이는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어떤 가치와도 무관하게 고도의 자체 역학으로 움직이는 기계인 듯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경제가 저절로 돌아간 적이 없으며, 경제의 '자유'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던 신자유주의가 온갖 조작과 개입에 결정적으로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통과하는 팬데믹의 시간은 경제를 '정지에 이르게' 함으로써 그것이 결코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님을 한층 여실히 드러낸다. 경제를 굴리는 사람들과 정책과 노선이 가시화되고 그것이 여태껏 어떻게 굴러왔는지도 선명해지는 것이다. 어차피 경제란 그렇듯 언제나 '정치-경제'였고 '이데올로기-경제'였으며 '경제외적-경제'였다면, 더욱이 이제는 그저 '경제'인 척할 수도 없게 되었다면, 더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더 본격적인 가치의 결전장으로 삼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촛불 광장에서 '정치를 알지 못하는(정알못)' 사람들이 정치를 실행했듯이, 경제 역시 '경제를 알지 못하는' 숱한 주권자들이 마음껏 간섭해도 좋은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지난 1일 정부는 한국판 뉴딜 정책을 공식화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이 뉴딜이 "단순히 위기 국면을 극복하는 프로젝트의 하나이거나 미래 과제 중 하나를 넘어서는, 총체적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대전환을 이뤄내게 하는 미래비전"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디지털뉴딜과 그린뉴딜로 구성된 이 정책이 과연 '대전환'에 값하는 비전인가는 더 논의되어야 하고, 디지털뉴딜이 얼마나 '뉴(New)'딜인지 또는 그린뉴딜이 얼마나 '그린(Green)'인지도 따져볼 일이다.(그리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이를 따지고 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눈길을 끄는 것은 "사람 우선 및 포용 국가라는 가치를 한국판 뉴딜의 토대"로 제시했다는 대목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것은 이 정부의 출발점이 된 구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대목은 또한 한국판 뉴딜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지점이다. '사람 우선'이라는 지침이 과연 이 뉴딜에서 문자 그대로 구현될 것인가. 그것은 성장에 관한 온갖 우려보다, 또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온갖 위협보다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우선'할 것인가. 이 뉴딜이 진정으로 새로운 딜이 되기 위해 정말 바뀌어야 하는 것은 토대가 된다는 '가치'의 실현이 다른 모든 것보다 실제로 우선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까. 가치란, 원래 경제와 직접 결합할 수 없다는 이야기 따위는 이제 믿을 수 없기에 말이다.
'정지의 힘'에서 시인은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고도 말한다. 생각해보니 그 힘이 우리 것이 아닌 건 아니었다. 촛불의 힘으로 세상을 멈춘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릴 것인데 다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달리고 싶다. 그러니 경제가 잘 굴러갈 만한 길로 우리를 이끄는 대신, 우리가 가고 싶은 그 길에서 어떻게든 경제를 굴려주시기 바란다.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전문가의 몫이라 말하고 싶다. '경알못'입니다만, 경제학은 그러라고 있는 게 아닌가?
* 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Affect Theory Reader, ed., Melissa Gregg and Gregory J. Seigworth, Duke UP 2010, 9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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