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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 晉州 속의 眞珠, 진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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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따라] 晉州 속의 眞珠, 진주성

"촉석루에서 유유한 남강을 바라보며 인생샷을 남겨보세요"

경남 진주를 방문하면 꼭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1592년 10월 김시민 장군과 백성들이 왜군으로부터 지켜낸 진주성 1차 전투가 있었던 곳, 그 이듬해 밀려드는 왜군의 기세로 성이 함락된 진주성 2차 전투가 있었던 진주성이다.

진주성 2차 전투 때 논개는 손가락 마디마디 가락지를 끼고 왜장을 안고 의암에서 강으로 몸을 던졌다. 그 곁으로 진주성을 지키다가 순국한 장군과 백성들의 고결한 혼을 싣고 남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진주성 정문인 공북문은 손을 모아 가슴까지 들어 올려 공경한다는 공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인 북을 뜻하는 북을 뜻해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공복문 전경.ⓒ프레시안(김동수)

공북문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이며 주 출입문으로 도청격인 관찰사영과 경상도 우병영이 소재했던 진주성의 주된 문으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고유하던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공북문을 들어서면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호국충절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된 진주성 수호상인 김시민 장군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진주성의 남쪽 벼랑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촉석루는 전시에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되었지만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성금으로 1960년대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가 올해 2월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됐다.

남강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는 수려한 풍경을 바라보며 촉석루 누각에서 찍은 사진은 단연 최고의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포토존 이기도 하다.

촉석루에서 내려와 남강아래에 자리한 의암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이다.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음력)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명의 민·군·관이 순절할 때 논개도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국했다. 이에 논개의 의열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즉 의암이라고 부르게 됐다.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촉석루 옆으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인 의기사는 영조 16년(1740년) 경상우병사 남덕하가 창건하고 의암사적비를 세우고 의기 논개지문을 내걸었다.

촉석루를 나와 담을 따라 걸으면 성벽 쪽으로 쌍충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일명 제씨쌍충비라고도 부르는 이비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순국한 성주목사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을 기린 비석이다.

제말 장군은 의병을 모아 김해 의령등지에서 전공을 세웠고 제홍록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본래 이 비는 진주성 안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현재 위치로 이전해 비각을 새로 지었다.

임진대첩 계사순의단 앞 광장에는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의 충정과 전공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세워진 촉석정충단비이다. 이 비는 조선숙종 12년 (1686)에 세워졌고 비문에는 진주성에서 싸우다 순국한 인물에 대해 기술하고 그 정신을 기술하고 있다.

임란 당시 부친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최후를 맞이한 고종후, 진주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한 김천일, 최경회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고 황진, 장윤 등 진주성에서 순국한 인물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끈 주인공으로 이러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김시민장군 전공비이다. 선조임금은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을 무찔러 공을 세운 인물을 대상으로 상을 내렸는데 김시민 장군은 2등 공신으로 선무공신교서를 내렸다. 보물 제1476호로 지정된 김시민 선무공신교서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촉석루전경.ⓒ프레시안(김동수)

진주성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조선시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의 문루인 영남포정사 문루는 진주목시대에는 진주성 내성의 관문이었고 고종 32년(1895) 관찰부가 설치될 때는 진주관찰부의 관문으로 영남의 정사를 선포하는 행정중심지를 뜻하는 말로 “영남포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 1896년 진주관찰부가 경남도청으로 바뀌면서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1925년 도청 소재지가 부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도청의 정문 역할을 했다. 촉석루와 함께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승격됐다.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은 경남문화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선화당은 대구, 공주, 원주, 그리고 현재 마무리 단계에 있는 전주에 위치해 있다.

마지막으로 아직 복원 되지 않은 진주 선화당은 여지도서 및 촉영지 경상우병영 지도, 진주성도에 근거하면 북장대와 인접한 남쪽 영남포정사의 50-70미터 거리에 복원 되어야 한다.

예로부터 진주목으로 이름이 높던 진주에 1896년 4월 13일 경상남도(당시 이름은 경남관찰도)란 지방행정구역이 설정됐다. 이에 진주성에는 경남도청(관찰부청 또는 관찰사청이라고 부름)이 들어서게 되고 관찰사(지금의 도지사) 집무실인 선화당에서 관찰사가 도정 업무를 보게 됐다.

선화당은 원래 경상도 우병영(경상남도와 경상북도의 낙동강 서부지역을 총괄하던 육상방어기구)의 관청이었던‘운주헌(옛 이름은 관덕당)’인데 우병영이 폐지되고 관찰사가 부임하면서 선화당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이다.

1997년 9~10월까지 국립진주박물관이 선화당 복원부지 발굴조사에 착수해 그 실체가 확인됐다. 선화당 복원은 진주시 지역 문화유산의 복원을 통해 자치행정의 수부도시로서 명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진주시민의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함양 하고 역사·문화의 현장교육과 관광자원 확보에 큰 의의를 둔다.

진주의 번영을 알리는 핵심적인 공간으로 시민의 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시는 복원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공북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는 현재 중영복원을 위한 발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진주성 내 중영 건물은 조선시대 경상우병영의 고위 무관인 우후(虞候, 병마절도사의 참모장)의 동헌에 해당된다.

진주성에 배치된 경상우병영은 경상우도의 병무 중심지이자 영남 서부의 중점 방어기지로서 조선시대 진주가 지녔던 군사, 행정상의 거점지로서 위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진주성도에 의하면 공북문의 북서쪽과 영남포정사의 동남쪽 사이에 중영 건물이 조성돼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주성 북쪽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여 낭떠러지 밑의 성 밖은 물론이고 성내와 외성에 포진한 병사까지 지휘 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북장대는 군사건물의 모범이라 할 만큼 잘 건축된 망루이다. 임진왜란 때 망가진 것을 광해군 10년(1618) 남이흥이 중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른다. 지금은 해체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진남루, 공북루라고도 불려졌다.

▲남강에서 바라본 진주성 전경.ⓒ프레시안(김동수)

진주성 서문에서 들어오면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40년(1607)에 건립된 사액 사당으로 정사호가 건립한 창렬사가 있다. 이곳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등 39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그 옆으로 고려말기에 왜구의 빈번한 침임을 막기 위해 진주성을 고쳐쌓고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호국사가 있다. 호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며 전통사찰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렇듯 진주성을 방문하면 촉석루, 김시민장군 전공비, 촉석정충단비, 쌍충사적비, 의암사적비 등에서 진주성의 역사를 읽을 수 있으며 매년 10월 남강과 진주성에서 개최되는 진주남강유등축제, 개천예술제와 매년 5월에 개최되는 논개제등으로 진주성의 문화를 읽을 수 있다.

이런 역사와 문화를 담은 진주성은 최근 관람객의 휴식처로도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13년 복원된 진주성 우물 근처에 세운 항아리 조형물과 목재 그네 등은 포토존으로도 인기 있을 뿐 아니라 관람객에게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선조들이 오로지 나라를 구하고 삶의 터전을 지켜내고자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역사의 현장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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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경남취재본부 김동수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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