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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코로나는 흑인들만 노리나 : 불평등을 보는 공간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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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코로나는 흑인들만 노리나 : 불평등을 보는 공간의 사회학

[김광기의 '인사이드 아메리카'] 제국이 그들의 배를 불리는 방식 <12>

거대한 격차

<21세기 자본>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두고 “치명적인 불평등”(a virulent inequality)을 드러낸 위기라고 말했다.(☞ 관련 기사 : <에이비시뉴스(ABCNews)> 4월 26일 자 'Covid-19 Reinforces an Economist’s Warnings About Inequality') 미국의 불평등만을 콕 짚어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불평등이 심한 국가 중 하나인 미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번 코로나 창궐이 불평등의 위기를 발생시킨 것이 아니고 이미 기저에 깔려 곪을 대로 곪아있던 불평등의 상황을 수면 위로 극명하게 끌어올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에 그렇다.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를 비롯한 유수 언론들도 최근 코로나 위기가 인종, 재산, 그리고 보건의 뿌리 깊은 불평등을 여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며 미국의 거대한 격차(the great american divide)를 꼬집고 한탄하며 반성하는 특집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0일 자 'The Great American Divide') 그런데 미국에서의 이런 격차가 확연히 목도되는 곳이 있다. 바로 공간이다. 불평등은 공간별로 존재한다.


▲ '미국의 거대한 격차', 뿌리 깊은 미국의 인종·재산·보건 상의 불평등을 코로나 사태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뉴욕타임스> 기사 갈무리.


▲ '코로나 창궐이 미국을 둘로 쪼갤 것이다. 코로나로 흔들리지만 결국에는 안정화될 부류와 그렇지 못할 부류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오래 갈 깊은 상흔을 입을 것'이라며 둘로 쪼개진 미국을 진단하는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기사 갈무리.


경제학자들의 경고

공간을 통해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경제학들의 경고부터 들어보자.

최근 시카고 대학에서 전 세계 경제학자들을 상대로 코로나와 관련한 설문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84%) 비록 2조 달러(약 2448조 원)가 넘는 정부의 지원금이 시중에 풀리더라도 부유한 자들보다 저소득층이 이번 코로나로 심각한 타격을 받으리라 예측했다. 교육에서의 격차도 더욱 확장될 것으로 91%가 전망했다. 마지막으로(사실은 이것이 현재 시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인데), 설문에 응한 95%의 경제학자가 주로 가난한 흑인들이 이번 코로나 사태의 최대 피해자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들의 전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코로나가 미국의 극심한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에이비시뉴스(ABCNews)> 4월 26일 자)

퍼펙트 스톰 불어 닥친 미국 남부: 빈곤과 인종의 배합이 빚어낸 참혹한 결과

그런데 코로나로 불평등이 더욱더 악화하는 공간은 크게 보면 어디일까? 뉴욕주와 뉴욕시가 최근까지 코로나 사태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 진앙으로 지목되고 있는 곳이 남부 지방이다. 보스턴에서 발행되는 잡지인 <애틀랜틱>은 <미국 남부에 유독 치명적인 코로나>란 제목의 기사를 4월 초 게재했다. 기사 표제에 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보면 미국 남부가 코로나에 확실한 표적이 되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에 무슨 눈이 달린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 '미국 남부에 유독 치명적인 코로나: 왜 남부의 청소년들이 코로나로 죽어 나갈 것인가'라는 제목의 <디 아틀랜틱> 기사 갈무리.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그 공간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지름길이다. 더 쉽게 말하면 그 공간에 누가 주로 거주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곳의 거주자들은 바로 저소득층 흑인들이다. 그런데 뉴욕시처럼 이곳은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뉴욕보다 더 심한 데도 말이다. 심지어 그곳은 심각한 의심 증상이 있으면서도 코로나검사를 받지 않은 이들이 부지기수로 검사율이 매우 낮다. 그래서 미국 남부는 인종과 빈곤이 빚어낸 결과물로서 코로나의 최대피해지로 부상하고 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미국 남부 지방에 "퍼펙트스톰"(perfect storm, 최악의 상황)이 불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관련 기사 : <가디언> 4월 12일 자 ''A perfect storm': poverty and race add to Covid-19 toll in US deep south', <유에스에이투데이(USAToday)> 4월 22일 자 'The other COVID-19 risk factors: How race, income, ZIP code can influence life and death')

코로나 전쟁의 최대 격전지 루이지애나

<가디언>은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New Orleans)의 한 가족의 장례식 장면을 기사에 실었다. 지난 4월 11일과 12일 이곳 교회 두 곳에서 두 명의 목사가 한 가족 4명의 장례를 집례했다. 4명 모두 이번 코로나에 감염돼 사망했다. 먼저 한 교회에서 올해 각각 71세, 61세, 58세 되는 삼형제의 장례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이들 형제의 모친 장례식이 치러졌다. 노모의 나이는 올해 86세. 이들 장례를 집도한 목사의 말은 남부지역에 불어 닥친 코로나 참상을 여실히 들려준다.

"우리는 갈기갈기 찢겼다. 어떻게 하루 상관에 엄마와 사랑하는 자식 세 명이 한꺼 번에 줄초상이 난단 말인가. 이게 바로 우리가 사는 지역의 비극이다."(<가디언> 4월 12일 자)

삼형제의 장례식장에서 터져 나온 통곡과 신음이 지금 미국의 남단, 뉴올리언스시 전체와 루이지애나주 전역에 걸쳐 흑인 가정 수백 군데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오고 있다. 4월 11일 현재 루이지애나주의 코로나 감염 사망자는 755명이다. 1인당 사망률로 보면 미국에서 최고의 수치를 보여주는 주 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곳은 흑인의 비율이 전체 루이지애나주 인구의 절반에도 한참 못 미치는 32%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중 70%가 흑인이다. 그만큼 코로나로 인한 흑인의 사망률이 백인보다 훨씬 높다. 인구 구성에서 흑인은 3분의 1인데 죽어 나간 것은 3분의 2가 넘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이지애나의 흑인들은 코로나 이전 이미 죽음의 그늘에 뒤덮여 있었다. 뉴올리언스시 인근 지역에 유독성 화학물질을 내뿜는 석유 정유 및 석유화학제품 공장들이 200여 개가 넘게 집중돼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듀폰, 쉘, 모자이크 퍼틸라이저 등의 회사가 그것들이다. 특히 뉴올리언스에서 배턴루지(Raton Rouge: 루이이애나주의 주도)까지 이르는 약 137km 길 중간에 위치한 세인트제임스군(St. James Parish)의 인구는 약 2만1000명, 주민 대부분이 흑인이다. 이곳은 코로나가 급습하기 전에도 이미 질병과 죽음이 드리워진 곳으로 유명했다.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군의 별명이 '암의 골짜기'(Cancer Alley)이었을까. 코로나가 창궐한 뒤로 그 별명이 '사망의 골짜기'(Death Alley)로 바뀌었다. 이를 두고 <엔비시뉴스(NBCNews)>는 루이지애나의 흑인 거주지역이 이전엔 공기 오염, 이제는 코로나로 죽음의 "이중 타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 <엔비시뉴스> 4월 14일 자 'First pollution, now coronavirus: Black parish in Louisiana deals with 'a double whammy' of death') 세인트제임스군은 미국에서 코로나로 인한 1인당 사망률이 가장 높은 지역 20곳에 속한다. 주지하다시피 코로나는 고혈압, 당뇨, 호흡기질환 등의 기저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세인트제임스군이라는 공간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열추적 미사일 코로나

정말 이상하게도 흑인들 밀집 거주지역만 코로나 사망률이 유독 높다.(☞ 관련 기사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Los Angels Times)> 4월 7일 자 ''A crisis within a crisis': Black Americans face higher rates of coronavirus deaths', <가디언> 4월 8일 자 ''It's a racial justice issue': Black Americans are dying in greater numbers from Covid-19',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 4월 7일 자 'The coronavirus is infecting and killing black Americans at an alarmingly high rate') 도시별, 주별로 놓고 보아도 그 사실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백인과 흑인의 사망률의 차이가 확연하다. 뉴욕시의 경우, 흑인이 백인보다 두 배 더 많이 죽었다. 시카고시의 경우 인구의 30%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로 죽은 흑인은 전체 사망률에서 70%를 차지한다. 위스콘신주는 전체 인구에 흑인의 비율은 고작 6%이지만 사망률에선 거의 40%를 차지한다. 미시간주의 경우 사망자 중 흑인 비율은 40%에 이르지만 주 전체 인구 중 흑인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14%이다.(<가디언> 4월 12일 자, <엔비시뉴스> 4월 14일 자) 일리노이주는 흑인이 15%이지만 사망자의 43%를 그들이 차지한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7일 자 'Black Americans Face Alarming Rates of Coronavirus Infection in Some States') 시카고시의 위와 같은 통계를 보고 시카고의 첫 흑인 출신의 시장으로 피선된 로이 라이트풋트(Lori Lightfoot)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면서 작년 5월 시장에 취임한 이후 자신이 접한 수치 중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뉴욕타임스> 4월 7일 자) 이게 도대체 뭔가? 코로나에 무슨 열추적 장치라도 달렸다는 말인가? 마치 유도미사일처럼? 그래서 흑인만 추적해 감염돼 죽이는데 최적화라도 됐다는 말인가?(☞ 관련 기사 : <에이비시뉴스> 4월 14일 자, <유에스에이투데이> 4월 22일 자, <가디언> 4월 25일 자 'Why is coronavirus taking such a deadly toll on black Americans?')

물론 그런 것은 없다. 즉, 유전적 요인 그런 것은 결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텍사스 남부대학(Texas Southern University)의 도시계획 및 환경정책과 불라드(Robert Bullard) 교수가 정답을 알려준다.

"유독성 화학물질이 공기 중에 쏟아지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양질의 의료시스템이 접근이 불가한 사람들, 의료보험 무가입자가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코로나라는 열추적 미사일의 표적이 될 성숙한 조건을 갖고 있다. 해서 코로나에 누가 가장 취약한가를 따지기는 매우 쉽다. 그러니 이들 지역에서 흑인들이 차지하는 인구구성비에 비해 그들의 사망률이 월등히 높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의 단 한 가지 이유는 바로 인종주의와 인종과 공간에 기초한 뿌리 깊은 불평등 때문이다."(<엔비시뉴스> 4월 14일 자)

▲ '코로나19로 다른 인종에 비해 흑인이 더 사망하고 있다'고 전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갈무리.


사회취약계층의 전유물: 기저질환과 의료보험 무가입

사회취약계층에 늘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료보험 무가입과 기저질환이다. 병이 나도 보험이 없어 의료서비스를 못 받으니 병은 더욱 도지고 그것은 결국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빠져들어 계속해서 돌고 돈다.(☞ 관련 기사 : <가디언> 2월 28일 자 'Inequalities of US health system put coronavirus fight at risk, experts say') 그리고 그것은 흑인 저소득층의 전형적인 삶이다. 조지아주도 미국 남부에서 루이지애나주와 함께 코로나의 타격을 제대로 입은 주 중 하나이다. 그런데 조지아주의 의료보험 무가입률은 약 16%이다. 전국에서 4번째로 높다.

조지아주 에모리대학(Emory University)의 감염학과 알리(Mohammed Ali) 교수는 "의료서비스를 받는 데 있어 우리 주(조지아)는 둘로 쪼개져 있다. 이런 파행은 결국 어떤 지역은 극히 감염률이 낮은 지역으로 그리고 다른 지역은 바이러스가 산불처럼 삽시간에 퍼지게 한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4일 자 'Why Georgia Isn’t Ready to Reopen, in Charts')

코로나의 가장 위험한 3대 기저질환으로 알려진 당뇨병, 고혈압(심장병)과 호흡기 질환의 경우도 조지아주는 미국 전체에서 매우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4일 자, <워싱턴포스트> 4월 21일 자 'Georgia Leads the Race to Become America’s No. 1 Death Destination') 조지아주 전체 인구 중 13%가 당뇨병을 갖고 있고, 심장질환과 폐질환은 50개 중에서 각각 상위 15번째와 19번째이다. 그래서 조지아주의 3대 흑인 밀집지역인 토럴(Terrell), 랜돌프(Randolph), 도허티(Dougherty) 등의 군들이 이번 코로나19가 퍼졌을 때 초기에 속절없이 유린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기저질환 이야기를 할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당뇨나 고혈압 등은 환자 개인의 생활 습관이나 가족력에서 비롯될 수 있는데 그것을 인종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와 결부시킨 것이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개인의 생활 습관 자체도 커다란 외부적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전적으로 개인의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예를 들면 공기가 나쁜 곳에서 운동하기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의료사막

기저질환도 사실은 적절한 예방교육과 조기 검진 등을 통해 충분히 피할 수 있거나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은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서비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는 어쩔 도리가 없다. 바로 의료서비스의 부재가 그것이다. 의료서비스의 부재는 둘 중 하나다.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기관, 즉 병원이 아예 없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돈이 없어 방문을 못 하는 것이다. 후자의 이야기는 다른 데서 많이 했으니 건너뛴다.

미국은 아예 어디가 아프다고 바로 전문의에게 갈 수 없다. 반드시 1차 담당의(가정의)에게 가서 진료를 받고 필요하면 진료의뢰서를 받아 전문의에게 갈 수 있다. 오해하지 마시라. 우리가 처음 동네 안과에 갔다가 대학병원 안과에 가는 것과 같은 일을 미국서는 할 수 없다. 처음부터 안과에 갈 수 있는 게 아니고 가정의부터 보고 가야 한다.

그런데 아래 지도에서 보듯, 미국에서는 아예 1차 전문의가 없는 지역이 부지기수다. 이것을 '의료사막'(healthcare desert) 혹은 '1차 진료사막'(primary care desert)라고 한다. 2019년 현재 의료사막을 보면 까만색이 도시 지역의 의료사막, 초록색이 농촌 지역의 의료사막, 그리고 흰색은 의료사막이 아닌 곳이다. 주로 중서부와 남부 지방에 걸쳐 의료사막이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왜 남부 지방의 흑인들이 주로 코로나의 타깃이 되는지 대충 갈피가 잡힐 것이다.


▲ 의료사막(1차 진료사막): 농촌과 도시 비교 현황.(☞ 바로 가기)


1차 전문의가 없는 곳이라면 그 지역엔 그다음의 환자를 받을 대형병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근처에 병원이 없어 위기상황이 닥치면 생명에 위협을 받는 곳이 미국이다.(☞ 관련 기사 : <시엔엔(CNN)> 2017년 8월 3일 자 'Millions of Americans live nowhere near a hospital, jeopardizing their lives')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비록 대부분의 병원이 명색이 비영리병원이라고 해도(물론 영리병원도 따로 있다) 병원에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병원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그 지역의 거주자들이 이른바 병원을 드나들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소득과 재산을 갖고 있단 말과 같다. 그러니 의료서비스의 부재를 돈이 없어 못 가는 것과 병원이 없어서 못 가는 것으로 칼로 무 베듯 자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병원은 대책 없이 사라지고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2019년은 농촌 지역의 병원이 폐쇄되는 최악의 해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무려 2019년 한 해에만 19개가 문을 닫았다. 특히 남부 지방의 병원폐쇄는 최악이다. 2010년 이래 10년 동안 텍사스, 테네시, 오클라호마주에서 120개의 병원이 문을 닫았다. 특히 이들 지역은 중산층보다는 완전히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이라 의료보험의 경우 둘 중 하나다. 무보험자이거나 아니면 극빈자에게 주는 정부 의료복지인 메디케이드의 수혜자다. 즉 비싼 민간보험가입자들은 매우 드물다. 이것은 병원 입장에서 볼 때 수지타산이 안 맞는 장사다. 왜냐하면 메디케이드의 경우는 정부가 지불 요청된 비용을 깎아서, 그것도 매우 더디게 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두말하지 않고 병원 사업을 접고 있다.(☞ 관련 기사 : <가디언> 2월 19일 자 '2019 was worst year for US rural hospital closures in a decade, report finds')

이런 추세는 코로나 창궐이 본격화된 이후에도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올해 4월 한 영리 민간회사가 경영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웨스트버지니아와 오하이오주의 3개 병원을 사들인 후 가차 없이 의사를 비롯한 의료진을 해고하고 병원을 영구 폐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이들 병원에 의존하던 지역 환자들은 병원 갈 곳이 없이 오도 가지도 못하며 먼 타지역으로 차를 타고 마치 젖동냥하듯 방황하고 있는 신세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26일 자 'Closed Hospitals Leave Rural Patients 'Stranded' as Coronavirus Spreads')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난리인데 병원은 사라지고 있다. 수익이 없으면, 병원도 없다. 그게 바로 미국의 의료체계를 지배하는 철학이요, 정신이다.

근접성의 위험

공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또 다른 불평등이 있다. 바로 사적 공간의 부재다. 그리고 이것은 코로나 같은 재난 상황에서 더 큰 위험을 내포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근접성의 위험'(the perils of proximity)이다. 이것은 소위 요새 건강의 전제조건으로 일컬어지는 '6피트'(약 2미터)의 거리 유지가 힘든 것을 의미한다.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수의 사람들이 복작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위험을 말한다.

근접성의 위험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황폐한 집(Bleak House)>(1852)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소설에서 역병(천연두로 추정)이 도는데 그것의 위협은 빈자와 부자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이지만, 실제 피해는 온전히 빈자들의 몫이다. 19세기 영국 소설 전공자인 펜실베이니아 대학(Univ. of Penn.) 영문학과 교수인 스타인라이트(Emily Steinlight)는 바로 이 점이 디킨스의 소설에서 공간을 통해 극명하게 부각된다고 말한다. 즉 "디킨스의 소설 속에서 역병이 돌고 있을 때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중심에서 벗어난 이들이 가장 많이 죽어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차별적으로 발생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재 우리가 코로나 사태 속에서 목도하는 바로 그것을 그대로 반향 한다". 그래서 스타인라이트는 디킨스가 공간을 하나의 "호사"(luxury)로 여겼다고 말한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12일 자 'The Coronavirus Class Divide: Space and Privacy')

사적 공간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 예가 바로 감옥이나 요양병원 같은 시설의 수감자나 환자들이다.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과 부대끼는 이들에겐 어김없이 코로나가 찾아왔다. 그러나 이렇게 사적 공간을 향유하지 못하는 자들은 일반인들 가운데도 많다. 모두 저소득층이다.코넬대학(Cornell Univ.)의 사회학과 하비(Hope Harvey) 교수에 따르면, 지난 20여 년간 미국에서는 조부의 집에 들어가 사는 확대가족(3세대 이상이 함께하는 가족)의 비율이 증가했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10년간 3대가 조부모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는 아동의 비율이 20%, 도시 지역은 거의 절반가량인 것으로 조사됐다. 핵가족(부모 및 자녀만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오랫동안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미국에서 확대가족의 증가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다.(<뉴욕타임스> 4월 12일 자) 그것은 바로 장성한 자식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따로 나가 살 능력이 없어서 그렇다.(부동산 가격과 임대료의 급등도 한 이유다. 필자) 아니면 은퇴한 노인이 노후자금이 없어서 자식과 합치는 경우 둘 중 하나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5월 2일 자 'My Retirement Plan Is You') 두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불평등의 심화를 이야기해준다. 더불어 코로나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높은 감염 가능성까지 덤으로.


▲ 밤에는 어쩔 수 없이 뉴욕의 브롱크스 노숙자 쉼터에서 밤을 보내지만, 낮에는 감염이 두려워서 사람을 피해 화물보관소 창고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내는 한 노숙자를 소개하는 <뉴욕타임스> 기사 갈무리. 머물 곳이 없는 이들이 자가격리란 불가능하다. 바이러스는 창궐에 사회적 거리가 요구되고 있지만 사회적 거리를 갖지 못하는 이들의 세상도 존재한다. 그들에겐 코로나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이다.



근접성의 위험은 또한 대중교통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에 사적 공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감염자일지도 모르는 낯선 이들과 같은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뉴욕시의 상징인 지하철은 뉴욕시의 불평등의 상징이기도 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3월 말 현재 뉴욕시 지하철 이용객은 87%가 줄었다. 그러나 누구는 재택근무를 하고, 누구는 자가용을 끌고 나올 때 여전히 지하철을 타고 일터로 나가야 하는 이들이 있다. 먹고 살려면 타야 한다. 뉴욕타임스가 인터뷰한 한 승객의 말이다.

"바이러스 무서운 것을 나라고 모를 리 있겠는가. 나도 걸리기 싫고, 내 가족이 걸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어 죽는다. 그러니 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승객이 탄 곳은 브롱크스(Bronx)지역으로 이곳의 중간소득은 미국의 가구 중간소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000달러(약 2700만 원)로 뉴욕시에서도 가장 빈곤율이 높은 지역이다. 거주자 대개가 흑인들이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3월 31일 자 'They Can’t Afford to Quarantine. So They Brave the Subway', <워싱턴포스트> 4월 21일 자 'The Bronx, long a Symbol of American Poverty, is Now New York City’s Coronavirus Capital', <타임(Time)> 3월 4일 자 ''If We Don't Work, We Don't Get Paid.' How the Coronavirus Is Exposing Inequality Among America's Workers', <뉴욕타임스> 3월 1일 자 'Avoiding Coronavirus May Be a Luxury Some Workers Cant Afford') 이렇게 근접성의 위험은 불평등의 또 한 가지 설명 요소가 된다.

줄서기와 불평등

다음의 사진을 보라. 하나는 길게 늘어선 자동차의 대기 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직접 늘어선 줄이다. 줄은 당장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늘어선 줄에서부터(그래도 이것은 사정이 뒤엣것보단 나은 축에 속한다), 무료 음식을 받으러 온 줄에서부터, 실업수당 신청을 위해 늘어선 줄까지 다양하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8일 자 ''Never Seen Anything Like It': Cars Line Up for Miles at Food Banks', 4월 12일 자 'It’s 'People, People, People' as Lines Stretch Across America') 미국 전역이 이런 줄로 북새통이다.


▲ '미국 전역에 식료품과 무료 배식, 그리고 실업수당 신청을 위해 사람들이 줄을 늘어서고 있다'고 전하는 <뉴욕타임스>. 사진은 무료 배식을 타기 위해 늘어선 자동차 행렬.


▲ '굶주린 미국인들이 무료 먹을거리 배급을 받기 위해 수 마일에 걸친 줄을 서고 있으나 푸드뱅크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전전긍긍한다'는 기사 제목을 단 <비지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 사진은 로스앤젤레스의 푸드뱅크 앞에 늘어선 줄.

줄서기(queue)에 대한 훌륭한 분석으로는 사회학자 고프만(Erving Goffman)(1983)의 것이 있다. 고프만은 줄서기가 매우 민주적이라고 봤다. 거기엔 평등과 예의가 존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려고 늘어선 줄을 떠올려보라. 거기서는 사람들의 생김새나 출신 성분, 직업, 재산의 정도, 연령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처음 계산대에 온 사람이 순서대로 계산을 지불하고 떠난다. 선착순이다. 그래서 선착순에 따른 줄서기는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공손함의 예의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다시 저 사진들을 보라. 과연 그것만이(고프만이 본 것만이) 다일까?

나는 저렇게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동시에 거대한 불평등도 보게 된다. 지금과 같은 코로나 재앙 상황에서 과연 코로나바이러스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저런 공간에 누가 줄을 서고 누가 저런 용무를 직접 볼 생각을 하는가?

이렇게 줄을 서는 것은 사회의 반쪽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즉, 줄을 서는 사람은 따로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다. 빈자들이다. 다른 반쪽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사적 공간과 시간을 갖고 저렇게 줄을 설 필요가 없다. 그들은 마치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고 이동하는 신처럼 여유롭게 자신만의 일에 몰두한다. 그들은 재택근무하고, 아마존에서 온라인 쇼핑을 하고(아무리 물건값이 올라도 개의치 않고), 음식물을 택배로 주문해 받아먹는다. 그러나 저렇게 줄을 서야 하는 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컴퓨터도, 인터넷도, 신용카드도 없다. 그러니 그들이 할 것은 오로지 줄서기와 직접 현장에 가서 용무보기, 먹고 살기 위해선 죽음을 무릅쓰고 일터에 나가는 것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3월 1일 자, 5월 1일 자 'For Most Food Stamp Users, Online Shopping Isn’t an Option') 그러니 빈자들은 코로나 위험에 더 노출될 수밖에 없다. 결국, 현대 미국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은 줄서기와 같은 곳에서조차 평등과 민주성(사회학자 고프만이 좋다고 했던)을 여지없이 훼손하기에 이르렀다. 오호, 통재라. 이런 사실을 땅속에 있는 고프만이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뻔뻔하게 보일 정도로 솔직 담백했다던 그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랬을 것 같다. 민주적? 개뿔. 퍼스트 컴 퍼스트 서브드(선착순), 개나 줘버려!

'우리'에게 '그들'도 포함된 것인가?

오로지 11월 재선만을 생각하고 있는 트럼프는 대다수 국민이 죽어 나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경제 재개의 나팔을 불어 대고, 이에 화답하듯 일부 주지사는 경제 재개 명령을 내렸다. 남부의 조지아주 주지사가 그 선봉에 서 있다.(<워싱턴포스트> 4월 21일 자) 그러나 많은 의료진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셧다운을 풀고 경제 재개를 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더 죽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10일 자 'Restarting America Means People Will Die. So When Do We Do It?') 그렇다면 과연 누가 죽어 나갈까? 이 글을 읽은 이들이라면 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위정자들은 이렇게 취약한 지역 흑인들의 감염과 사망은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 '미국의 경제 재개는 곧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언제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 갈무리. 그렇다면 누가 죽을 것인가? 누구를 죽이고 미국 경제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 그 피해자는 누구인가? 답은 나와 있다. 제국이 단물을 빨아 먹고 있는 저소득층이다. 그들의 피해자이다. 그 대표적 예는 저소득층 흑인들이다. 그들을 잉여인구로 간주하는 한 미국의 불평등을 해소할 방안은 없다.



다시 스타인라이트 교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에 따르면, 디킨스를 포함한 19세기 소설엔 산업혁명에 의해 갑자기 늘어난 인구와 그것으로 인한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당대 작가들의 문제 의식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디킨스의 소설도 예외가 아니다. 자린고비 스크루지가 주인공인 <크리스마스 캐롤>(1843)엔 잉여인구에 대한 제거가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되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갈 수 없어, 그러니 그들은 차라리 죽는 편이 나"라든지, "만일 그들이 죽는다면 그러는 편이 낫지, 그게 흘러넘치는 잉여인구를 줄이는 것"이라고 스크루지가 말하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스크루지는 당시 기득권층의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일 수 있겠다. 시간은 변해도 기득권층, 내가 말하는 제국들의 생각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혹시나 지금 취약계층이 몰려 사는 지역의 주지사와 시장들, 그리고 트럼프는 디킨스 소설에 나온 스크루지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복지 혜택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들이 이참에 싹쓸이되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들을 사회에 전혀 쓸모가 없는 식충 같은 잉여인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든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도 완전히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일국의, 그것도 세계 최강의 나라 대통령 입에서 코로나 치료를 위해 살균제를 음복하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러는 사이 힘없고 돈 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속절없이, 하릴없이 죽어 나가고 있다. 혹시 운이 좋다면, 언제 걸린 줄 모르게 항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뉴욕시민들 중 5명 중 한 명이 코로나 항체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하는 이야기이다.(☞ 관련 기사 : <뉴욕타임스> 4월 13일 자 '1 in 5 New Yorkers May Have Had Covid-19, Antibody Tests Suggest') 실로 '웃프'(웃기면서 슬프다)기만 하다.

생명은 '운발' 아니면 '운명'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래도 그 절반 정도는 사회가 커버할 수 있다. 사회가 주는 안전망으로서 말이다. 완전하진 않지만 사람들은 그런 안전망에 의지해 오늘도 마음을 턱 놓고 살아간다. 그게 사회와 국가의 기능이다. 쓰임새다. 물론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전적으로 믿으면 결국 그 피해는 그것을 믿은 사람 자신에게 돌아가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일해서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에 의무를 다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생명을 오로지 운발에만 맡기게 하는 사회, 그게 정상적인 사회는 결코 아니다. 그것도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그런 일이 버젓이 벌어진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람이라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생명은 귀하다는 것이다. 거기서 '모든'은 글자 그대로 '모든'이다.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주위를 두루두루 살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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