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치세에는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보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음식을 달게 먹고, 자기 나라의 옷을 아름답게 여기며, 자기 나라의 습속을 편하다고 여기고, 자신들이 하던 일을 즐기며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세계화의 부정적 측면이 야기한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때문인지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설파한 노자의 이상세계가 문득 떠오른다. <화식열전>의 첫 부분이다. 원전인 <노자> 80장과 약간 다르지만 사마천은 이런 유의 이상은 실현될 수 없다고 곧바로 부정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으로 생활하려 한다면 근세(사마천의 입장에서)에 와서는 백성의 이목을 막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통하지 않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기는 하나 신농씨 이전이라면 몰라도 그 이후엔 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귀와 눈은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것을 한껏 즐기려 하고, 입은 소와 양 같은 고기를 다 맛보려 하는 인간 본능을 충족시키려면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용이 존경한 범려
이런 인간의 욕망에 순응해서 정치를 잘 한 사람이 바로 태공망(강태공, 제나라 초대 군주)이고, 관중이었다. 이런 유능한 인물 덕에 동쪽 변방에 있었던 제나라는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제 환공 대에 와서 패자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귀하지 않은 일반 평민 중에 이를 잘 따라서 큰 부를 이룬 이로는 어떤 사람이 있을까? <화식열전>에는 공자의 제자 자공, 상인의 비조 백규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하지만 최고는 단연 범려(范蠡)다. 그는 재물의 신(財神, 범려는 인문 재신, 관우는 무인 재신), 상인의 성인(商聖)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무협 소설가 진용(金庸, 1924-2018)이 생전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말해달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옛 사람으로는 범려, 당대의 인물로는 기성 우칭위엔(吳淸源, 1914-2014)을 꼽았다고 한다. 바둑 마니아였던 진용이 우칭위엔을 꼽은 것은 그렇다 치고, 범려를 존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범려는 초나라 완(지금의 허난성 난양 일대) 지방 태생으로, 공자와 동시대의 인물이다. 공자는 14년간 천하를 주유하면서도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범려는 인생 삼모작에 모두 성공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이란 대개 아무 일도 하지 않기엔 길지만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나라도 이룩하기엔 짧기 마련인데, 범려는 영역을 바꿔가면서 세 번이나 성공한 전기적인 인물이다. 첫 번째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함으로써 20여 년 만에 회계에서의 치욕을 설욕하고 월왕 구천으로 하여금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에 등극하게 만든 일이다. 두 번째로는 이러한 큰 공을 세우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물러난 일이다. 그 후 범려는 강호에 일엽편주를 띄워 제나라로 건너가서 치이자피라는 이름으로 변성명하여 크게 부를 쌓고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제나라에서 쌓은 부를 다 나눠주고 당시 교통이 발달한 도(陶)라는 곳으로 가서 주공이라고 자칭하며 또 다시 돈을 크게 번 일이다. 범려는 말년에 늙고 쇠약해지자 가업을 자손에게 맡겼고, 자손들도 그것을 잘 운영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그는 춘추시대에 공명을 이루고 물러나 선종한 유일한 사람이니 동아시아 문화에서 사대부(지식인)의 이상을 한 몸에 체현한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의 장량과 촉의 제갈량으로 이어지는 인간형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대정치가 범려
범려는 원래 빈한한 가정 출신이다. 벼슬길에 나가기 전에는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풍속에 구애됨이 없이 소탈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당시 그 지방의 현령이었던 문종은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찾아가 서로 친구가 된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월나라로 건너가서 월왕 구천에게 중용되어 대부가 된다. 당시 월나라와 오나라는 서로 물고 물리는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먼저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범려의 충고를 무시하고 오나라를 공격했다가 거꾸로 회계산에서 오왕 부차에게 포위된다. 잘못을 인정하고 조언을 구하는 구천에게 범려는 다시 충고한다. “충만함을 지속하려면 천도를 본받아야 하고, 넘어지려는 것을 안정시키고자 하면 인도에 따라 자신을 낮춰야 하고, 세상사를 잘 처리하려면 땅의 이치에 따라 생산에 힘써야한다”고. 이러한 범려의 충고에 따라 구천은 납작 엎드려 항복함으로써 겨우 사지에서 벗어난다.
월나라에 다시 돌아온 구천은 와신상담하며 자세를 낮춘다. 어진 이를 공경하고 손님을 후히 대접하며 가난한 사람을 돕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면서 국력을 키운다. 월왕은 아예 국정을 범려에게 맡기려 했다. 그러자 범려는 “군사의 일이라면 제가 문종보다 낫지만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따르게 하는 일은 문종이 더 뛰어납니다”라며 사양한다. 범려는 대외적인 일에, 문종은 대내적인 일에 매진하는 등 역할을 나누어서 월왕을 돕는다. 결국 월나라는 범려의 심모원려(深謀遠慮)에 따라 은인자중하며 실력을 키워 22년 만에 오나라를 평정한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평정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제후들의 패자(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되었고, 범려는 상장군이 된다.
치이자피
자신의 명성이 너무 커져 버려 유지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범려는 월나라를 떠난다. 그가 이런 현명한 결단을 내리게 된 데에는 월왕 구천의 생김새가 “목은 길고 입은 새부리처럼 튀어나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으나 편안함은 함께 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각 떠나지 않았던 문종은 결국 토사구팽 당한다.
범려는 일엽편주를 타고 제나라로 가서 치이자피로 변성명한다. 치이자피라는 이상한 이름은 원래 술을 담는 가죽부대라는 뜻이다. 월나라와 패권을 다퉜던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는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가죽부대에 담겨 강물에 버려졌다. 그렇기 때문에 치이자피는 그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범려는 오자서의 비극적 운명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모른다. 제나라에 도착한 그는 아들과 함께 해변가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여 수십만 금의 재산을 쌓는다. 제나라 사람들은 이를 보고 그가 현명하다고 여겨 그를 상국(相國)에 임명한다. 범려는 탄식하며 읊조린다. “집에서는 천금의 재산을 이루고, 벼슬살이로는 상국에까지 이르렀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점에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이름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은 불길하다.” 그는 재상의 인장을 반납하고, 모은 재산을 주변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귀중한 보물만 챙겨 다시 몰래 사라진다.
대부호 도주공
이번에 그가 스며든 곳은 도(陶, 산동성 荷澤市 定陶縣)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방의 여러 나라로 통한 곳이어서 물자의 교역이 쉬운 곳이었다. 그는 거기서 스스로 주공(朱公)이라 칭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큰 재산을 모았고 사람들은 그에게 찬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범려가 물러나 도 땅에 간 것을 보면 퇴계의 퇴와 도산서원의 도를 여기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가 돈을 크게 번 방법은 간단하다. 품질이 좋은 물건을 구하는 데 힘쓰고, 그렇게 구한 물건은 오래 쌓아두지 않고 적절한 시기에 바로 내다 팔아 자금을 회전시키는 것이었다(務完物 無息幣). 다시 말하면 재물과 화폐를 마치 흐르는 물처럼 유통시킨 것이다. 그리고 좋은 물건을 비쌀 때는 썩은 흙 버리듯이 내다 팔고, 쌀 때는 좋은 옥처럼 사들이는 것이다. 말이 쉽지, 막상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범려는 이렇게 해서 19년 동안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다. 그리고 군자는 부유해지면 덕을 베풀기를 좋아한다고, 그것을 두 차례나 가난한 친구들이나 먼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가 이렇게 대부호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한 마디로 사람을 잘 선택하고 적절한 때를 잘 잡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과 때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순간에 월나라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우고, 희생되지 않고 월나라를 떠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때를 잘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범려가의 형제들
범려가 사람도 잘 알았다는 것은 아들에 얽힌 이야기에서도 잘 드러난다. 범려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도 땅에 오기 전에 낳았고, 막내는 도에 와서 낳았다. 다시 말하면 첫째는 범려가 고생을 할 때 낳았고, 막내는 부유해진 다음에 얻은 자식이다. 막내가 청년이 될 무렵, 둘째가 사람을 죽여 초나라에 갇힌 일이 있었다. 범려는 돈을 써서 둘째 아들을 구하기 위해 막내를 시켜 황금 1000일(鎰)을 마차에 실어 보내려 했다. 하지만 장남이 자기를 안 보내면 자결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냈다. 고수도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된다. 돈과 함께 편지를 적어 주면서 오랜 친구인 장생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무조건 돈을 전달하고, 그가 하는 대로 따르되 절대 논쟁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초나라에 도착해서 찾아가 보니 집이 초라했다. 아버지가 시킨 대로 돈과 편지를 전달하자 장생은 “절대 여기 머물러 있지 말고, 빨리 떠나라. 동생이 살아 나오거든 그 까닭을 묻지 말라”고 하였다. 장생은 비록 슬럼가에 살고 있었지만 매우 청렴한 인물이어서 왕에게까지 존경 받는 인물이었다. 범려에게 받은 황금도 자기가 차지할 생각도 없었다. 그는 친구를 돕기 위해 초나라 왕을 찾아가 천체 현상을 설명하면서 은덕을 베풀기 위해 사면령을 내리도록 했다. 장생의 분부를 어기고 초나라를 떠나지 않고 있던 첫째 아들은 대사면령이 곧 내릴 것이라는 소문을 듣는다. 그는 그것이 장생이 주선한 일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황금이 아까워 다시 그를 찾아간다.
장생은 그가 황금을 찾으러 온 것이라는 눈치 채고 황금을 즉각 돌려준다. 그리고 친구의 아들에게 배신당한 것에 수치심을 느껴 이내 입궐해서 다시 사면령이 취소되도록 만든다. 결국 둘째 아들은 처형당하고, 장남은 동생의 시신을 가지고 도 땅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들 슬퍼하였지만 범려 만은 태연하게 말했다.
“나는 큰 애가 동생을 죽게 만들 줄 알고 있었다. 그가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애는 어려서부터 나와 함께 고생을 했고 살기 위해 고난을 겪었으므로 함부로 돈을 쓰지 못한다. 막내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가 부유한 것을 보았기에 돈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저번에 내가 막내를 보내려고 한 것은 그가 돈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소봉(素封)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는 상업이 발달했다. 상인의 지위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사마천은 이들을 소봉이라고 불렀다. 상인은 귀족이 아니고 민간인(布衣匹夫)이므로 소(素)다. 하지만 천금 만금의 부자는 제후에 봉(封)해진 것처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소는 봉이 아니고 봉은 소가 아니지만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면 소봉이 된다. 공자의 제자 자공도 돈이 많았기 때문에 제후들이 그를 만날 때 대등한 예를 표했다. 사마천이 비록 마지막에 배치하기는 했지만 돈을 많이 번 민간인들의 전기를 쓴 것에 대해 반고(班固)는 세리(勢利)를 숭상하고 빈천을 부끄럽게 여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공자도 “부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채찍 잡는 일이라도 하겠다.”고 하였다.
사마천이 본 사물의 이치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가난은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창고가 실해야 예절을 알고, 부유해야 인의가 따라 붙는다. 물론 인의가 따라 붙지 않는 부자도 많지만 말이다. 하물며 돈은 우리 시대의 신이며 “현대사회의 어법형식이 되었다.”(짐멜) 따라서 범려를 비롯한 부자들의 삶을 추적한 <화식열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사기를 읽고 <화식열전>을 읽지 않으면 사기를 읽은 것이 아니라고 한 학자도 있다. 물론 <화식열전>을 읽는다고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려면 임기응변의 지혜와 결단할 줄 아는 용기, 취해서 줄 수 있는 인함, 지키는 바를 견지할 수 있는 강함이 있어야 한다. 이게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안 읽어보는 것보다는 좋지 않겠는가. 상업계의 손자병법이라고 하니 금방 효과를 보려는 욕심을 버리고 읽는다면 혹 천천히 ‘내공’이 생길 지도 모를 일이다.
추신: 서양에 신화가 있다면 중국에는 인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인간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지혜를 탐색해 보고자 사기열전 중에 몇 편을 뽑아 다루어보았습니다. 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신 독자 제위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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