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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조상탓이 아니다: 보훈의료와 사회적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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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은 조상탓이 아니다: 보훈의료와 사회적 치유

[2020년에 다시 읽는 보훈 ⑩]

2020년 올 해는 청산리·봉오동 전투 100주년이고, 6·25전쟁 70주년이자 4·19혁명 60주년,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보훈의 역사는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는 가치와 이를 통해 시민적, 평화적 발전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의미를 짚어보고자 <프레시안>은 보훈교육연구원과 함께 기획연재를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보훈의 역사, 사회적 의의, 평화지향성 등을 사회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고 방향을 정립해 보는 기회의 장을 갖고자 합니다. 편집자.

예전에는 질병에 걸리거나 상처를 입으면 우선 본인이 챙기거나 가족이 돌보았다. 환자나 가족이 무당이나 사제를 찾기도 했고, 교회나 사찰이 치료의 공간이기도 했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의 질병은 개인 탓이었고, 치료의 책임도 개인에게 있었다. 조상탓, 악령탓을 하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은 기본적으로 개인, 집안의 문제였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가난한 이들이 질병에 걸릴 확률이 더 높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질병의 사회 구조적 측면을 의식하게 되었다. 실제로 경제적 격차가 질병을 심화시키기도 하고, 국가가 벌인 전쟁이 수많은 환자와 망자를 양산했다. 이런 현실을 의식하면서 국가나 단체가 병원을 본격 설립하기 시작했다. 의료보험과 복지제도가 생기고, 국립의료원과 같은 공공의료기관이 설립되었다. 여기에는 질병과 치료의 사회성과 정치성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이 분야 권위자 김승섭도 사회적 약자가 더 질병에 노출되어 있고, 몸의 건강도 사회구조의 문제와 연계해 보아야 한다고 진정성 있게 논증한 바 있다.(<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디 몸의 질병이나 건강만의 문제겠는가. 수명도 경제적 차원과 관계가 있고, 죽음도 순수하게 개인이 결정하지 않는다. 자살에도 사회성이 있다. 사실상 ‘사회적 타살’일 때가 많다. 인간의 온갖 아픔마다 정치, 사회, 국가의 차원이 들어있는 것이다. 실제로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이 벌어지고, 일제 식민지 시기를 겪었듯이, 나라가 없어지기도 하지 않던가. 그 과정에 국민이 당하는 상처, 고통, 무수한 죽임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러한 구조적 상황, 사회와 국가적 차원을 내 실존의 문제로 의식하고 직접 독립운동에 나서거나, 불의한 전쟁을 몸으로 막아선 이들을 국가에서는 국가유공자로 규정하고 대우한다. 이들은 상처와 죽음의 사회성과 정치성의 증언자들이다. 이들 및 유가족의 치유와 재활,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몫을 책임지는 행정부서가 국가보훈처이다. 보훈처에서는 국가유공자를 발굴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한다. 그 산하에 있는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서는 유공자들에게 의료 및 복지 중심의 물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종합병원, 요양원, 재활체육센터, 양로원 같은 의료 및 복지시설을 곳곳에 두고 있으며, 임직원만도 7천여 명이나 되는 거대 공적 기구이다. 국가로 인한 상처, 질병, 죽음의 책임이 국가에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주요 조직이다.

유공자가 당한 상처와 죽음, 집안이 겪는 어려움은 이들이 국가와 사회의 유지를 위해 투신한 결과라는 점에서, 개인적 행위이자 동시에 국가와 사회의 산물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그 정신을 선양하고 물적으로도 지원한다. 이 때 더 근본적인 것은 희생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상황을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및 사회의 폭력적 구조가 해소되지 않으면 희생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공자 개인과 유가족을 국가가 돌보는 것은 당연하되, 더 이상 희생자가 생기지 않아도 되는 공정하고 평화적 구조를 만들어가는 일이 두고두고 요청된다는 뜻이다. 이른바 ‘선제적 보훈’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예수가 병자를 치유했다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교회에서는 이것을 예수가 환자 개인의 몸을 치유한 초자연적 기적 사건으로 보려는 경향이 크지만, 거기에는 더 심층적인 의미가 있다. 고대 사회에서 병자는 죄인으로 여겨졌고, 죄인은 혐오와 분리의 대상으로서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 사회에서 버려지면 인간답게 살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치유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일종의 ‘사회적 치유’였다. 그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로 인한 육체적 고통보다는 사람들의 소외와 냉대로 인한 사회적 고통에 더 민감했다. 의학적 질병보다는 사회적 질병에 관심을 기울이고서, 인간의 본래적 관계성을 회복시키는 데 진력했다. 개인적 질병을 사회적 관계의 단절로 몰아가던 시절에 인간 전체의 근원적 관계성을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인간을 살리고, 더 큰 생명을 구체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불교 경전 <유마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깨달음의 덕이 높았던 유마거사가 아프다는 소문이 퍼지자 곳곳에서 많은 불보살들이 문안차 몰려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급기야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왜 병이 들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렇게 답했다: “중생이 병이 들어 나도 병이 들었습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것이다. 어딘가 누군가의 아픔의 원인에서 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질병이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나와 이웃,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저 특정 종교만의 언어가 아니다. 국가유공자가 겪은 육체적 부상, 심신의 트라우마는 국가 전체의 문제라는 사실을 종교적 천재의 시각에서 잘 보여준다. 원치 않는 부상으로 경제적 활동이 제약된다면 그 책임은 사회에 있고, 국가를 위한 희생을 치유하고 해소해야 할 의무는 국가에 있다. 일차적으로는 국가보훈처와 보훈공단 등이 협업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 공적 과제이지만, 결국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그리고 그 최종 목표는 더 이상 폭력이 없는 공정한 사회의 구축이다. 보훈대상자에 대한 의료행위가 육체적 치유에서 사회적 치유로까지 나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사후적 보상’으로서의 보훈과 함께 일종의 ‘선제적 보훈’이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유전적 질병조차 인류의 지속적 생존과 적응을 위한 유전자의 자기 실험이고 전체 생명 진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순수한 개인만의 상처는 없으며, 개인의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문제라는 뜻이다. 국가유공자의 상처를 국가가 지는 것은 당연하며,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모두가 구축해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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