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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총선, 그 '정치적 운동'의 본질이 '이기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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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총선, 그 '정치적 운동'의 본질이 '이기심'이라고?

[민교협의 시선] 4‧15 총선의 정치사상적 독법

4‧15 총선이 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180석이라는 압도적 숫자는 일찍이 한국 선거사에서 볼 수 없었던 놀라운 혹은 충격적인 기록이다. 참패한 보수야당과 일부 언론은 ‘코로나 19’로 이러한 정치적 결과를 설명했다.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전염병 코로나 19는 유권자에게 안전한 삶의 이슈를 전면에 부각시켰고, 공포의 감염병이 완전히 관리되고 통제되지 못한 상황에서 정부-여당의 행정 주도권을 약화하는 정치적 선택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예컨대,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는 언론 보도가 그 관점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해석은 일견 타당해 보이고, 선거에서 패배한 야당의 위치에서 그렇게 설명하려는 태도 또한 이해할만하다. 그 접근은 미증유의 선거결과가 가져올 파장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정치적 수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아니라 갑자기 발생한 전염병 사태로 인해 정부-여당이 운 좋게 승리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사회적 격리를 잘 준수한 국민과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은 의사-간호사 덕분에 코로나 전염병이 줄어들 수 있었다는 야당의 논조는 그러한 맥락에 자리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시각에 선다면 야당은 이번 총선 결과를 만들어낸 정치적 운동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두 개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코로나 19의 정치사회학을 총선이라는 제한된 국면에서만 이해하는 단선적 시각의 오류이며, 둘째, 유권자를 단순히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는 이기적이고 가벼운 존재로 간주하는 왜곡된 시각의 오류다.

주지하는 것처럼,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시작해 2017년 대통령선거를 지나 2018년 지방선거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여당에 대한 지지는 지속적으로 상승해왔고 지방선거에 이르러 압도적 승리로 나타났다. 이번 총선은 그러한 연속적인 승리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2020 총선에 대한 해석 또한 지난 4년간의 정치적 시간으로 확장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우연히 발생한 한 사회적 사태 속에 이번 총선을 가두어두는 것으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기 힘들다.

▲민주당 이낙연 선대위원장이 당 지도부 등에게 '박수'를 자제하자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베르크손(Henri Bergson)은 시간의 본질을 물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순차적이고, 단절적이고, 배타적으로 이해하는 우리 관념의 오류를 통찰했다. 과거가 사라진 자리에 현재가 나타나고, 현재가 지나 미래가 도래한다는 식의 시간 이해는 맞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 잠재된 형태로 응축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또한 미래를 향해 자신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가 엮이는 시간 또한 베르크손의 시간관념에 정확히 부합할 것이다.

지난 2014년과 2020년은 떨어져 있지 않았다. 너무나 많은 어린 학생들이 까닭 없이 죽어야 했던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6년이 지난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에 대한 사법적 정의 또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슬픔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유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5년과 2020년 또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5년 전의 전염병 메르스는 한국사회를 집단적 공포 속으로 몰고 갔다. 언제 어떻게 감염될지 모른 채 살아야 했던 국민들의 그 두려움이 새로운 감염병에 의해 다시 소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6년과 2020년도 과거와 현재로 떨어져 있지 않다. 4년 전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력이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위를 벌여왔고, 전직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정치단체를 만들어 이번 총선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2014년, 2015년, 2016년이 만들어낸 ‘주권적 우울’(사회학자 김홍중의 용어), 슬픔과 공포와 분노 그리고 뚜렷이 알 수 없는 또 다른 감정들이 혼합되어 주조된 그 집단적 우울은 2020년 총선이 치러지는 시점까지 온전히 해소되지 못한 채 누군가에는 잠재된 채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생한 모습으로 존재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진실은 은폐되고 있고, 공포는 지속되고 있고, 정의는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4‧15 총선은 2014년의 비극, 2015년의 공포, 2016년의 분노라는 감정이 넓고 깊게 드리운 상태에서 열린 정치적 의례였다. 그리하여 코로나 19라는 국가적‧국민적 유행어에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6년 전부터 쌓여온 여러 정치적 감정들이 응축되어 있었다. 야당은 ‘코로나 선거’, ‘코돌이’를 외치면서 총선을 우연성과 단순성의 시공간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많은 국민들은 그 풍자의 언어 속에서 자신들의 마음속 깊이 간직되고 있던 두텁고 복잡한 정치사회적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세월호의 비극, 메르스의 공포, 촛불의 분노에 연결된 감정이었다. 감염병에 맞선 문재인 정부는, 야당과 보수집단의 비난적 수사와는 달리, 세월호 참사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재연하지 않았고, 메르스의 공포를 방기하지 않았고, 국가권력의 무책임과 반(反)민주주의를 반복하지 않았다고 유권자는 생각했다.

그러한 해석은 곧, 코로나 19라는 용어와 그것에 관련된 정치사회적 이슈를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코로나 19는 야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4‧15 총선이라는 현재적 국면에 작용한 물리적-외생적 변수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은 유권자의 마음에 압축되어 있던 과거의 감정들이 현재적 시간으로 솟아나게 한 상징이었고, 그 두 개의 시간이 미래를 향해 투사되도록 한 상징이었다. 말하자면 코로나 19는 지난 6년간 국민들의 감성을 지배해온,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사회에 대한 희구, 공권력의 민주적 책임과 덕성을 위한 소망, 정의로운 정치권력과 공화국의 온전한 탄생을 향한 집단적 고민과 바람의 언어적 응축이었다.

그와 같은 복합적인 정치적 감정과 소망을 지닌 유권자이었기에 그들은 야당과 일부 언론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안전이라는 이기적 목적의식 속에서만 투표장으로 향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코로나 19 사태가 초래한 두려움 속에서도, 26%가 넘는 기록적 사전투표를 포함, 역사적인 투표율을 만들어낸 유권자의 모습과 행동에 대한 세밀한 해석이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의 본원적 능력을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찾았고, 그 인간적 감정의 본질이 이타성이라고 주장했다. 루소는 “우리 동포의 고통이나 멸망을 보는 것에 자연스러운 반감을 일으키게 하는 원리”인 이타성의 감정을 인간은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그 마음은 연민이었다. 그것은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아무런 반성도 없이 도와주려고 하는”(<인간불평등기원론>) 힘이다. 공감과 연민의 감정에 대한 통찰은 18세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이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심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도덕 감정론>)고 말했다.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는 마음으로서 연민의 감정은 세월호 참사로 가족을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하려한 국민들의 것이었고, 메르스 전염병 속에서 제대로 된 예의도 갖추지 못한 채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이들의 슬픔과 공포를 함께 느끼려 했던 국민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연민의 감정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과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일관한 공권력을 도덕적으로, 사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심판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것이었다. 그 국민들이 2020년 총선의 유권자였다. 따라서 코로나 19를 대하는 그들의 마음은, 겉으로는 이기적 합리성으로 보였지만,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지려한 성스러운 감성이었고 거룩한 분노였다. 그것은 이타성과 공동체성에 연결된 보편적 감정이었다.

그들은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하는 데모스(demos)였다. 데모스는 이기심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보편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은 삶을 향한 본능적 욕망을 따르면서도 이타성의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 존재다. 그들은 운동하지만 거대한 규칙 속에서 질서 잡힌 상태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 삶의 개별적 리듬이 만들어내는 무 규정적이고 모순적인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거대한 정치적 단위로 묶이기 어려운 다양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몸으로, 때로는 자신들의 표정으로, 때로는 잘 알아들 수 없는 말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야기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들 데모스는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의 사유 속 인민이다. 그 인민은 거대한 체계에 매몰되지 않는 육체적 존재들이다. 그 “육체들은 웅성거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만들어낸다. 남자들과 여자들은, 몸을 가진 존재들은 ‘정서적으로 세상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육체에 맞서 항상 싸운다.”(<인민이란 무엇인가>)

2020년 봄의 총선은 분명 코로나 19의 총체적 공포와 두려움이 초래한 국면 속에서 치러졌다. 그 특수한 상황을 표면에서 바라보면 총선은 안전한 삶을 바라는 유권자들의 이기적인 셈법이 작동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한다면, 지난 총선 국면을 직조한 두터운 정치적 시간의 결들을 우리는 인식할 수 없고, 그렇다면 감염병의 위험 속에서 투표장으로 달려간 유권자의 참된 정치적 얼굴을 만날 수 없다. 자신의 주장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고, 입으로 말하지 않은 그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거룩한 감정과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유권자를 이기적 계산만을 수행하는, 선거 공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존재로만 바라봐서는 사태의 본질로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정치적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총체적 시간을 자신들의 육체로 체험하고 살아가는 인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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