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소비자 조합원들과 함께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에 다녀왔습니다. 하바롭스크와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아 100년 전 어느 날 어느 독립 투사가 되어 들리지 않는 총소리를 듣고, 보이지 않는 선연한 핏자국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동포인 고려인을 조우하기도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서 고려인 문화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김승력 안산 고려인센터 미르 대표를 만났습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았던 지난해, 프레시안과 소비자 조합원들은 항일 독립 운동의 발자취를 좇아 러시아 연해주를 다녀왔다. 그로부터 1년이 채 안 됐을 때 즈음 여행을 이끈 철도기관사이자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인 박흥수 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우리가 다녀온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의 토대를 세운 사람의 동료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과 고려인에 대한 사료를 직접 수집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레시안 기사를 보고 조합원들과 저희가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느꼈다고 하더라고요. 허망하고 분노했다고..."
불현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조합원들이 탄식을 내뱉던 순간,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에 갔을 때였다. 고려인 문화센터는 우수리스크 한인들의 거점이었고, 고려인의 정신을 담고 있는 '고려인 박물관'이라 할 만 하다. 독립운동가들과 고려인의 사료가 빼곡했던 그 곳은 박근혜 정부 시절 리모델링을 거치며 유교 정신으로 덧칠된 '민속 박물관'으로 변질 돼 있었다. (관련기사 : 연해주 독립운동가 59인을 지워버린 박근혜 정부)
고려인 문화센터에 전시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의 사료를 수집했던 사람은 김승력 안산 고려인센터 '미르' 대표였다. 김 대표는 한국에서도 안산에 정착한 고려인을 위해 한국어 야학을 운영하며 여전히 고려인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서른이 되던 1997년에 '망한 소련'이 궁금해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청년 유학생은 그때 고려인이라는 존재를 처음 인지했다.
1999년, 우리민족서로돕기 재외동포사업본부에서 연해주 고려인 정착촌에 대한 실태조사를 김대표에게 부탁해왔고 이를 계기로 자원봉사자로서 본격적으로 고려인 사회에 발을 디뎠다. 실태조사를 하며 직접 본 고려인의 현실은 너무 각박해서 뭔가를 해야 했다고 느꼈다. 고려인들은 군인들이 철수한 군 막사에서 난민처럼 살았다. 전기와 물이 끊긴 곳도 있었다. 우선은 한국의 가정과 고려인 가정을 일대일로 연결해 자매 결연을 맺어 겨울나기를 도와주어야 했다.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는 일이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가 고려인의 역사를 지우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후 김 대표는 흩어져 있는 고려인들을 위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고, 2004년 본격적으로 우수리스크에 고려인 문화센터 설립을 위한 일을 시작했다. 故 노무현 대통령의 재임시절이기 때문에 정부 관료들도 고려인 지원에 관심을 가졌다. 돕기 사업을 했던 이강두 동북아평화연대 이사장이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기도 했다.
재외동포재단에서 고려인문화센터 건립 예산을 지원받았고, 동북아평화연대 연해주 사무국이 중심이 되어 사업을 진행했다. 김 대표는 1층 중앙에는 러시아 한인 역사박물관을 만들어서 고려인들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고자 했고, 2층에는 작은 병원과 식당 그리고 고려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율 공간을 구상했으나 모든 게 뜻대로 되진 않았다. 자금 등의 문제로 고려인 문화센터 건설 조성 계획은 축소되기도 했다. 그렇게 첫 삽을 뜬 뒤로부터 완공까지는 5년의 시간이 걸렸다.
고려인 문화센터를 개관하기에 앞서 그는 직접 고려인의 가정을 방문해서 관련 자료를 모았고, 소비에트 연방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이원용 박사와 러시아 전역의 문서보관소를 다니면서 사료를 찾아냈다. 그 결과 독립운동가인 최재형 선생의 고택과,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장소 등을 발굴해냈다.
2009년 고려인 문화센터가 완공됐을 때 우수리스크 고려인들에게는 큰 경사였다. 처음에 김대표를 믿지 못했던 고려인들도 꾸준한 그의 헌신 덕에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하기 시작했다. 문화센터 건물이 올라가고 형태가 눈에 보이니까 고려인들도 관심이 커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외교부의 간섭과 통제가 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후 집행된 2016년 박근혜 정권의 리모델링은 고려인 문화센터에서 가장 중요한 항일 혁명정신을 빼 버렸다. 이전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 벽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했다. 고려인 들은 봉건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연해주에 정착 했다. 이 같은 고려인들의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 양반 자제만 글을 배울 수 있었던 서당과 조선시대의 전통 혼례 복장 등이 항일혁명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2010년부터 러시아 정부로부터 비자갱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처지여서 직접 리모델링 이후 바뀐 고려인 문화센터를 볼 수 없었다.
다시, 안산에서 '투명인간'이던 고려인들과의 조우 "팔자 같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김 대표가 운영하는 '미르'에는 안산에 둥지를 튼 고려인들이 네 번이나 찾아왔다. 그의 오랜 동료인 미르의 이원용 상담국장이 이들을 맞았다. 어떤 이는 아이 유치원의 운영계획 수요조사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한글을 모르는 고려인이었고, 어떤 이는 국내 취직을 위해 출생신고서 번역이 필요하다며 찾아왔다. 또 어떤 이는 혼인신고서 번역을 위해 미르를 찾았다.
러시아를 떠난 그였어도, 고려인을 떠나지는 못했다. 그는 왜 한국에 와서도 그는 고려인들을 돕게 됐을까. 김 대표는 고려인들이 안산의 '투명인간', '유령' 이었다고 말했다.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고려인들이 김 대표의 마음을 잡았다.
안산 근처 공단들은 외국인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일자리가 많았다. 선부동 땟골은 시화반월공단 근방에 있고 방값이 쌌기에 고려인들이 둥지를 틀 조건이 맞았다. 그 해 2월 김 대표는 안산 선부동 땟골에 보증금 200에 월세 28만원의 6평짜리 쪽방을 하나 얻었다. 한글을 잘 모르는 고려인들을 상대로 상담도 하고 한글을 가르쳤다. 작은 쪽방은 고려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소문이 퍼져 한글을 가르칠 때면 콩나물 교실이 따로 없었다고 했다.
'너머'가 지자체 지원도 받고 어느 정도 안정화 되었기에 새롭게 '미르'라는 고려인센터를 시작하게 되었다. '미르'는 '너머'의 확장 사업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고려인들에게 절실한 또 하나의 지원 사업이었다. '너머'가 포괄 할 수 없는 지역의 고려인들 역시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르'사업에 같이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적 여건은 만만치 않았다. 자리 잡힌 '너머'에 비하면 '미르'는 모든 사업이 그렇듯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결국 '미르'라는 출발선에 다시 서게 됐다. 김 대표와 의기투합한 이원용 박사가 상담국장으로 나선 것은 큰 힘이 되었다.
다시 지하 셋방 입구에 '미르'라는 작은 간판이 달렸다. 고려인 지원 센터 '미르'의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 공간에 방이 몇 개 나온다. 상담실로 이용하는 작은 방에는 컴퓨터 한 대와 작은 책상이 전부이지만 이곳을 찾는 고려인들에게는 기꺼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 통로 끝 야학 교실로 쓰이는 방은 30여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제법 넓은 곳이다. 교실 뒤 편에는 후원자가 보낸 쌀 포대들이 쌓여 있었다. 김 대표의 뜻에 공감해 직접 농사지은 쌀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고려인들을 돕기 위한 손길은 작으나마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집기들 사이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훈장이 걸려있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는 그의 어깨너머로 지난 밤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가르친 한국어가 빼곡히 적힌 칠판이 보였다.
1997년도 우수리스크에서 고려인과의 만남 이후 약 30여 년 동안 고려인을 위한 돕는 활동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김 대표의 얼굴엔 체념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걸어가리라는 의지를 담은 미소가 담겼다. 한의 세월, 혹독한 가난과 굶주림의 시간 속에 식민지와 항일독립운동, 혁명의 시대를 달렸던 고려인이다. 긴 세월의 강을 지나 모국에 돌아와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안산에 있다.
이 인터뷰 기사는 박흥수 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객원연구위원의 도움으로 작성되었습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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