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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관점으로 뒤집어 보는 범죄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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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관점으로 뒤집어 보는 범죄 영화 이야기

[프레시안 books]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런 청소년 집단 폭행 사건들의 배후에 랜덤 채팅 앱이 있습니다. 앱은 전부 중소 IT 기업에서 만듭니다. 여자아이들과 채팅하는 시간에 벌어들이는 수익은 업체와 아이들이 반반씩 갖거나, 혹은 아이들에게 훨씬 적은 돈을 주고 업체에서 착복합니다. 보통 여자아이들은 채팅을 하면 상품권이나 포인트를 지급받고, 성인 남성들은 회원 등록을 할 때 돈을 냅니다. 앱을 사용하는 여자아이들이 많아야 성인 이용자들이 앱으로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성인 남자들은 돈을 내고, 여자아이들은 돈을 안 내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네이버 오디오클립 문화·예술분야 1위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이 민음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은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박사와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범죄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의 약자 문제와 해결 방법을 분석하는 팟캐스트다. 책에는 방송에서 다 다루지 못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굵직한 범죄사건 정보가 새로 수록됐다.

BBC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에 꼽힌 범죄 심리학자 이수정 박사는 팟캐스트 참여 조건으로 "범죄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매체가 아니라 여성이나 아동 같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범죄 영화를 다뤄야 한다"는 점을 내걸었다. 이 박사의 이 같은 조건으로 인해 방송의 방향성은 '피해자 중심'으로 확고히 자리 잡혔다.

책의 내용 역시 이 같은 관점에 따라 서술된다. 책은 <걸캅스>를 포함해 총 16편의 범죄 영화를 살펴보며 우리가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피해자적 관점을 살핀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서는 그루밍 범죄를, 영화 <조커>(2019)에서는 정신 질환 범죄을 다루며 영화 <숨바꼭질>(2013)에서는 빈곤계층 혐오를 지적한다. 대담자들은 <꿈의 제인>(2016)에서 가출 청소년이 성착취의 늪에 빠지는 고리를 설명하고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통해 '피해자다움'의 모순을 지적한다.

이 책은 단순히 범죄 영화를 분석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대담자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영화들의 내용을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로 확장한다. 이를 통해 둘은 특히 오늘날 범죄 영화가 얼마나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피해자로 소비하는지, 우리 주변의 소외된 사각지대가 어디인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약자를 위해 나아가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함께 논의하자고 독자에게 제안한다.

책은 5부로 구성됐다. 1부 '왜 피해자가 집을 나가야 하는가 - 가정폭력'은 영화 <가스등>을 시작으로 가스라이팅 등 오늘날 널리 쓰이게 된 범죄 용어를 소개하며 자연스럽게 가부장제 속 남편이 어떻게 아내를 폭력의 희생양으로 삼는가를 설명한다. 나아가 한국의 법이 그간 가정 폭력을 어떻게 다뤄왔는가를 살피며 성찰을 촉구한다.

2부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순응한다 - 비판의식 결여'는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는 권위와 복종의 문제를 다룬다. 3부 '이 문제가 곧 내 문제일 수 있다는 연대 의식 - 성범죄'는 스토킹 방지법과 온라인 성범죄 단속을 위한 제한적 함정 수사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4부 '만만한 계급을 향해 화풀이하는 경향 - 계층 문제'는 빈곤 계층과 적대주의의 문제 등을 논의한다.

마지막 5부 '결국 가장 중요한 의제 강간 연령 - 미성년자 보호'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한 성착취가 만연한 배경에는 랜덤 채팅 앱이 있음을 지적한다. 특히 n번방 사태 등으로 논란이 크게 일어난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이 책이 어떻게 다루는가를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담자들은 영화 <걸캅스>(2019)를 통해 디지털 성범죄 문제를 이야기한다. <걸캅스>는 불법 촬영물로 인해 여성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계속 발생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불법 촬영 피해를 신고하러 경찰서에 온 피해자가 끝내 신고하지 못하고 경찰서를 나가던 중 사고를 당한다. 불법 촬영물의 일상화와 이를 안일하게 여기는 경찰의 태도가 드러난다.

<걸캅스>는 산업화된 디지털 성착취 전형을 보여준다. 디지털 성범죄로 피해를 입는 이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을 착취하며 돈을 버는 이들도 존재한다. 피해가 곧 돈이 되는 현장이다. 처벌 수위가 낮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 2018년 다크웹에서 가상 화폐를 이용해 아동 음란물을 유통한 한국인 운영자 손정우가 인터폴에 잡힌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년 반 정도의 징역을 받는 데 그쳤다.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자들은 자신이 찍힌 불법 동영상을 자기가 직접 온라인에서 찾아 캡처해 증거로 제출해야만 했다. 신고해도 누가 그런 불법 동영상을 제작·유포했는지 경찰이 찾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수사가 제자리를 걷는 와중에 피해는 2차, 3차로 계속 번져 나간다. 자포자기한 피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디지털 성범죄가 제대로 단속되지 않는 배경에는 불법 동영상을 범죄로 인식하지 않는 한국 사회의 지배적 사고방식이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이 박사의 지적대로 "여성의 성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성을 사고파는 것을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 박사는 가장 유명했던 불법 동영상 사이트 '소라넷'을 예로 들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소라넷과 흡사한 목적의 사이트들이 수없이 많은데, 현재의 형사 사법 제도 내에서는 이 사이트들을 제대로 관리하기 어렵다"며 "소라넷 이전에도 불법 음란 동영상이 무분별하게 유통됐고 성매매 업소의 유인 동영상 팝업창이 무차별적으로 뜨는 등, 디지털 성범죄의 전조 증상들이 이전부터 많았다"고 지적한다.

불법 동영상이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과거 '빨간 마후라' 같은 불법 촬영물을 그냥 '야한 동영상' 정도로 치부하던 시기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상당수 남성의 불법 촬영물에 대한 인식은 거기에 머물러 있다.

책은 나아가 '정준영 단톡방 사건'과 디지털 성범죄의 연관성을 찾는다. 정준영을 비롯한 몇몇 남자 연예인들이 피해자가 동의한 적 없는 성관계 동영상을 찍어서 단톡방에 공유했다. 이 박사는 "정준영 사건이 소라넷 문화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소라넷도 1999년 개설할 당시 몇 명의 소수가 모여 정준영의 카톡방처럼 자극적인 영상을 서로 공유하는 작은 규모로 시작됐다.

성매매에 관대한 한국 사회 분위기도 문제라고 책은 지적한다.

이 박사는 "한국은 성매매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국가"라며 "13세 이상을 대상으로 성매수를 해도 범죄시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성매매의 처벌 수위 또한 굉장히 낮다. 그러다보니 인터넷에서 음란물을 주고받아도 그것을 취미 생활 정도로 치부하는 안이한 생각이 퍼져있다"고 지적한다.

성을 인격으로부터 분리된 일종의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고, 이성과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일종의 병리적 요소들이 온라인에 모여 범죄적 환경이 형성됐고, 이 같은 환경 하에서 온라인의 익명성 뒤에서 일탈된 성적 욕망을 분출하는 이들이 '디지털 성착취 산업'을 만들었다고 이 박사는 분석한다.

이 박사는 "디지털 성범죄는 결코 일부 여성 또는 일부 남성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건 그들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동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는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이 박사는 "피해자를 외면하는 것 자체가 가해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다. 무심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들이 오늘날 디지털 범죄의 만연을 조장하는 데 일조했다. 형사 사법 기관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이 박사는 마지막으로 범죄 피해자들에게 "그럼에도 그것은 나의 탓이 아니며, 나는 불운한 범죄의 피해자일 뿐이라는 사실, 내 전체 인생에서 그런 피해는 그저 일부일 뿐이고 내겐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민음사 펴냄, 이수정·이다혜·최세희·조영주 지음, 값 1만8000원)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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