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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처럼 사랑받았으나 불운했던 명장, 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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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처럼 사랑받았으나 불운했던 명장, 이광

[표변하는 삶] 이장군 이광

봄꽃이 만발한 좋은 계절이다.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꽃구경 오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 그 열매를 따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에) 그 밑에는 저절로 작은 길이 생긴다.”(桃李不言 下自成蹊)는 옛말이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이 좋은 계절에 꽃구경하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다.

이 사태가 종식되어 모두가 화창한 봄 날씨를 만끽하며 마음껏 꽃구경할 수 있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꽃 같은 장군 이광

한나라 문제-경제-무제 시기의 명장 이광(李廣)은 복숭아꽃이나 배꽃처럼 빛나는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듯 그가 죽었을 때 세상사람 모두 슬퍼했다고 한다. 사실 아는 사람이 죽어도 모두 슬퍼하는 것은 아닐 텐데, 그를 모르는 사람마저 슬퍼했다고 하니 그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알 수 있다.

그의 선조는 <자객열전>에 나오는 진나라 장군 이신(李信)으로 연나라 태자 단을 추격해 잡은 이다. 그의 손자는 이릉(李陵)이다. 사마천이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을 받게 된 것은 바로 흉노와의 싸움에서 투항한 이릉을 옹호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광은 무인의 피가 흐르는 가계 출신이다.

집안 대대로 궁술이 전수됐는데, 이광은 특히 천부적으로 활쏘기에 능했다. 키도 크고 팔도 원숭이처럼 길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는 기마술에 능했고 담력도 대단했다. 그러니 흉노와의 싸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무용을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한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풀숲에 있는 돌을 호랑이로 잘못 알고 활을 쏘았는데 화살촉이 돌에 박힌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날랜 진짜 호랑이를 활로 쏘아 죽인 일도 있고, 맹수를 주먹으로 쳐서 죽인 일도 있었다.

이광은 무인으로서 이런 출중한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을 아꼈다. 누구처럼 자기 휘하의 병사를 사적으로 머슴 부리듯이 하기는커녕, 이광은 상을 받으면 그걸 번번이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고 청렴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병사들과 함께 했다. 군 생활 하는 40년 동안 ‘연봉’도 상당했지만(2000석) 집에 남은 재산은 없었다.

두 리더십

한무제 때 주위의 평판이 좋아 이광은 변방의 태수에서 미앙궁(서궁)의 금위군 책임자로 임명된다. 정불식이라는 장수도 장락궁(동궁)을 지키는 장으로 임명된다. 쉽게 말하면 둘 다 야전군 사령관에서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승진한 것이다.

야전사령관 시절 두 사람의 부대 통솔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정불식은 부대를 지휘할 때 수하의 부대를 엄히 단속했으며 편제와 규범을 정돈했다. 사졸들로 하여금 밤을 세워하며 군의 문서를 처리하도록 하였으므로 군은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으로부터 기습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엄격한 제도로 군을 다스리는 모델이다.

이광의 통솔방식은 달랐다. 흉노를 치러 나갈 때 행군에 엄격한 편제와 일정한 진법이나 항렬이 없었다. 물이나 풀이 좋은 곳을 골라 주둔하고 병사들이 편하게 지내도록 하였다. 막사에서 불필요한 문서나 장부 작업 등은 과감히 생략했다. 다만 척후병을 먼 곳으로 보내 적의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적에게 습격 받는 일 역시 없었다. 개인의 모범이나 매력으로 군대를 통솔하는 모델이다.

두 모델의 장단점에 대해 정불식은 이렇게 평했다. “이광의 군사는 무장이 간단하여 적이 별안간 습격해오면 막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휘하 병사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지냈으므로 모두들 그를 위해 기꺼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 군사는 일이 번잡하지만 적들도 우리를 침범하지 못한다.”

두 사람 모두 당시 이름을 날리던 명장이었지만 흉노는 이광의 지략을 두려워했고 사졸들도 당연히 이광의 밑에 있기를 좋아했다.

불운한 이광

개인의 무공도 대단하고 휘하 병사들에게 인기도 많은 빼어난 장수였지만 이광은 불운했다. 일찍이 문제(文帝)는 그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안타깝게도 그대는 좋은 때를 만나지 못했다. 만일 고제(한고조 유방) 때 살았더라면, 만호의 제후쯤은 쉽사리 됐을 것이다.” 일생을 두고 이어질 불운의 시초였다.

이광은 오초칠국의 난에 참전하여 적장의 깃발을 빼앗는 등의 공을 세웠지만 한나라 장수로 출전해서 양왕(梁王)이 사적으로 주는 장군의 인수(印綬)를 받았기 때문에 포상을 받지 못했다. 마읍의 전투에서는 효기장군으로 참전하여 골짜기에 대군을 잠복시켜 흉노의 선우(천자처럼 광대한 지역의 수령이라는 뜻)를 유인했다. 거의 잡을 수도 있었지만 선우가 눈치를 채는 바람에 무산되어 공을 세우지 못했다.

안문의 전투에서는 패배하여 흉노에게 생포되기도 했다. 선우가 이광을 잡거든 반드시 산 채로 잡아오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광은 부상을 당해 말 두 필 사이에 엮인 그물 위에 눕혀진 채 적진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가 적이 방심하는 틈을 타서 갑자기 튀어 올라 말을 타고 가던 흉노 소년병을 밀쳐 떨어뜨리고 말과 활을 빼앗아 구사일생으로 도망쳤다. 한나라 조정은 많은 부하를 잃고 적에게 사로잡힌 죄를 들어 이광을 참수하려 했지만 겨우 속죄금을 내고 평민이 됐다.

나중에 우북평의 태수가 되어 공을 세울 기회를 잡았지만 이광을 “한나라의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한 흉노가 그 소문을 듣고 몇 년 동안 아예 국경을 침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공을 세울 수가 없었다. 위청이 이끈 정양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제후에 봉해진 장수가 많았지만 이광의 군대만은 또 공을 세우지 못했다.

불운의 끝은?

한나라에 흉노 문제는 가장 중요한 대외적 숙제였다. 한고조에서부터 문제, 경제 시기까지는 화해정책으로 대응했지만, 젊은 무제는 즉위 다음 흉노에 공격적으로 맞섰다. 한 무제가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을 선봉장으로 삼아 대대적으로 흉노 공격에 나서자, 이광은 일생의 마지막 기회라 생각해 자원해서 전투에 참여하고자 했다. 한 무제는 그가 늙었다고 생각해서 허락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 선봉장에 서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젊은 위청은 이광에게 정면의 선봉장을 맡기지 않고 동쪽으로 우회하도록 했다. 동쪽 길은 멀리 돌아가야 하는데다 앞으로 나아가기도 주둔하기 어려운 노선이었다. 이광은 젊은 대장군에게 정면에서 선우와 싸울 수 있도록 간청했지만 대장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청은 황제로부터 ‘이광은 늙고 운수가 좋지 않은 사람이니 선우와 직접 대적하지 않도록 하라’는 언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광은 할 수 없이 동쪽 노선으로 나아갔지만 때때로 길을 잃어 제 시간에 합류 지점에 도달할 수 없었다. 위청은 문서로 사실을 심문하고 엄히 질책했다. 그러자 이광은 부하들에게 죄가 없고 내가 길을 잃은 것이니 직접 심문받겠다고 답했다. 이어 부대로 돌아와 부하들에게 말한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흉노와 7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했다. 이번에 다행히 대장군을 따라 선우의 군사와 접전을 벌일 수 있었는데 대장군이 나의 부서를 옮겨 길을 멀리 돌아가게 하였고 또 길을 잃게 되었으니 이건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내 나이 예순이 넘었으니 다시 도필리의 심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리고는 마침내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그의 일생에 걸친 불운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광에게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당호는 명대로 살지 못했다. 둘째 아들 초는 대군의 태수가 되었지만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막내아들 이감은 아버지로 하여금 원한을 품고 죽게 만들었다며 대장군 위청을 쳐서 상처를 입혔으나 위청은 이 사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위청의 조카인 표기장군 곽거병은 나중에 이감을 활로 쏘아 죽여 버렸다.

큰 아들 당호에게는 유복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릉이다. 이릉은 궁사와 보병 5000명을 이끌고 나가 선우의 군대 8만 명과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맞서 싸웠다. 용감히 싸웠으나 양식이 떨어지고 구원병도 오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그의 이야기는 나카지마 아츠시(中島敦)라는 작가의 소설에 생생하게 잘 그려져 있다. 이릉이 항복했을 뿐만이 아니라 흉노의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가짜 뉴스(진실은 이릉이 아니라 이서라는 사람이었다)가 조정에 전해져 그의 가족은 몰살당했다.

사마천은 “이릉은 부모를 효로써 섬기고, 사졸들에게 신의가 있었으며, 항상 떨치고 일어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한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 비록 패하였으나 그가 흉노를 대파하였음은 족히 천하에 알릴 만합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마땅한 기회를 얻어 한나라에 보답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변호했다가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이 이광의 불행한 운명에 매우 동정적이었고 한 무제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은근히 서술했는데, 아마도 이는 이릉에 대한 자신의 평가가 투영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삼대에 걸친 이광 집안의 비극은 이로써 막을 내린다.

사마천의 평가

이광을 직접 본 일이 있었던 사마천은 그가 질박한 시골사람처럼 성실했고 말주변은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모두 슬퍼한 것은 그의 충실한 마음이 사대부들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신뢰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못한 사람도 제후가 될 수 있었던 시대였다. 빼어난 능력을 가졌지만 이광은 안타깝게도 끝내 열후에 봉해지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복숭아나무나 배나무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 저절로 작은 길이 나듯이, 불운하지만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사람은 누군가 기억해줄 것인가. 아마도 기억해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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