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의원이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에서 언급해 알려진 '노동버스'. 6411번 버스는 구로동에서 출발해 대림, 영등포를 거쳐 강남 개포동까지 간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새벽밥 지어 먹고 출근해야 하는 청소노동자 아주머니들에게 발이 되어주는 버스다.
"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고 노회찬 의원의 2012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 중 일부.)
노회찬 전 의원이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언론이 이 버스를 조명하며 '투명인간들을 위한 정치'를 말했다. 4.15 총선 사전투표가 시작된 10일, 구로 거리공원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하는 첫 차에 그들과 함께 올랐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 정치가 이 투명인간들의 이름을 불러줄까?
새벽 세시 사십분, 길가에 벚꽃은 피었지만 아직 코끝이 시렸다. 차 하나 없는 텅 빈 거리 위로 달이 밝게 떠있다. 10분쯤 지나니 마스크를 쓴 아주머니들이 하나 둘 정류장으로 모였다. 갓길에 세워진 6411번 버스에 시동이 걸리고 불이 켜졌다. 발 디딜 틈이 없다던 6411번 첫차는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새벽 만원버스를 줄이기 위한 서울시의 정책으로 지난해부터 한 대 증차돼 두 대가 된 덕이다.
새벽 네 시 정각, 6411번 버스는 정류장에 모인 아주머니들을 태우고 어김없이 출발했다. 두 대가 같이 출발했지만 앞서 출발한 차량에 많은 아주머니들이 올라탔다. 960원. 이른 시각이라 조조할인이 된 버스요금이 찍혔다.
증차된 덕에 출발 때는 출발 때는 붐비지 않았지만, 두어 정류장 뒤인 신도림역, 구로시장, 대림역을 거치는 10분 새 자리가 동났다. 버스에 올라탄 아주머니들은 "안녕하세요", "오늘은 어제보다 덜 춥네"라며 인사를 나눴다. 매일 보는 얼굴들이라고 했다. 대부분 60대~70대인 이들은 몇 년 동안, 때로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 버스를 타고 강남으로 청소를 하러 가는, 같은 처지의 이웃들이다. 미처 가지 못한 장례식 조의금을 이 자리에서 건네기도 했고, 고향에서 부쳐온 김을 나누기도 했다.
마지막 빈좌석이 채워지자 뒤늦게 탄 아주머니들은 가방에서 한 사람 앉을 만한 크기로 잘려진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깔고 앉기 시작했다. 가방을 메고 서있는 기자에게 아주머니들은 여분의 돗자리를 내주며 앉아가라고 권했다. 자리를 사양하자 가방이라도 내려놓으라며 한사코 소매를 챈다. 덕분에 짐을 맡겨놓고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편히 들을 수 있었다.
"조국, 국민을 '핫바지' 만들었다... 희망이 없는 우리나라가 됐다"
닷새 앞으로 다가온 총선. 아주머니들은 모두 투표장에 가겠다고 했다. 투표일이 공휴일이라 일하는 강남의 빌딩도 쉰다고 한다. 아주머니들은 "투표는 주권",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라고 의미부여 했다. 대부분 누구를 찍을지 마음의 결정도 내렸다고 했다.
투표 참여 의사가 분명했지만 선거를 거쳐도 정치가 좀 나아질 거란 기대는 희박했다. 이번 총선과 정치 현실을 물으니 모두 혀를 내두르며 한숨을 쉬었다. 인터뷰를 거부당하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껌을 건네며 한마디를 청하는 손녀뻘 기자가 안쓰러웠는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들은 한결같이 "남을 헐뜯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극단의 정치에 대한 실망감이 엿보였다.
"국민의 대표라고 뽑아놨는데 국민에게 본이 되지는 못할망정, 국민이 배울 게 없다. 아무리 괜찮은 정치인이어도 남을 헐뜯는 말을 하면 격이 떨어져 보인다." 이경애(가명) 71세 여성.
"정치는 국민을 배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들 당리당략에 빠져서 국민이 보는 데도 싸워댄다. " 정무열 (가명) 59세 남성.
"지금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정치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다. 처음에는 뽑아주면 잘하겠다고 해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이나 한다. 집으로 여론조사 전화와도 이젠 받지 않는다. 할 말이 없다. " 김명자(가명) 68세 여성.
새벽차 타는 노동에 지쳐도, 세상이 투명인간 취급을 해도 돌아가는 물정 모르는 아주머니들은 없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의 가족들이 사는 모습은 이들 가슴에 대못을 박은 듯 했다. "희망이 사라졌다"고 했다. 자식들의 명문대 진학을 위해 부모 지위를 동원한 특권층에 대한 실망감과 좌절감이 컸다. 가진 것 없고 못 배운 부모라는 자책에 자녀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까지 따라왔다.
"조국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옛날부터 줄이 길어야만 뭘 한다고 하던데, 자식들한테도 없는 사람들은 죄인이 됐다. 만약에 우리 서민들이 그렇게 했으면 벌써 사달이 났을 거다. " 임자혜(가명) 72세 여성.
"조국 사태 때 일부러 자세히 안 봤다. 높은 사람들은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어려서 학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부모가 많이 못 배워서 자식도 많이 못 가르친다고." 송주애(가명) 63세 여성.
"그 분은 교수고, 서울대 나오고, 머리도 좋다. 머리 좋은 놈들은 지들끼리 다 해쳐 먹고 국민은 '핫바지' 만들었다. 그 사람을 믿었는데 이젠 믿을 사람이 없다. 희망이 없는 우리나라가 됐다." 김명자(가명) 68세 여성.
"장관이나 되는 사람이 나랏돈을 받으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가족이 진 빚도 꼼수써서 갚았다고 하지 않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걸 모른다. 일해서 갚을 줄만 알지. 성실하게 열심히 사는 나 같은 사람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박영자(가명) 67세 여성.
문재인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던 이들이 실망감을 더 크게 느낀 듯 했다. 일부 아주머니들은 말끝마다 "믿었는데", "다를 줄 알았는데"라고 말했다.
"코로나 걱정되지만 잘리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재난은 사회의 가장 약한 곳부터 파고든다. 혹시 모를 코로나19 감염도 걱정이지만, 생계가 달린 일자리가 끊어질지 모른다는 현실이 더 무섭다. 일부 직장은 재택근무를 하고, 학교는 온라인으로 수업을 하지만 이들은 노동을 멈출 수가 없다. 아주머니들이 기댄 창가 너머에 적힌 '코로나 19 사회적 거리두기' 문구가 무색했다.
아주머니들은 코로나19 이후 일이 더 힘들어졌다고 한다. 세심한 청소와 소독·살균 등을 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가 어려워져 일자리가 없어질까 하는 불안감에 더 성실히 일을 나간다고 했다. 전염병보다 무서운 건 해고다. 어떤 아주머니는 일회용 장갑을 하고 버스를 탔고, 그 장갑 위에 소독젤을 연신 바르기도 했다.
"나도 코로나가 걱정되지만, 일을 안 하면 살아갈 수가 없다. 빚도 있고, 아픈 할아버지도 있다. 경제가 어려워져서 내가 잘리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한다. " 주미령(가명) 72세 여성.
"우리는 재택이 안 된다. 나가서 일을 해야 한다. 일 하는 건물에 누구 한 명이라도 출근을 하면 가서 청소를 해야 한다. 재택하는 곳은 열 곳 중 한 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큰 회사가 많지 않다. 오히려 일이 더 많아졌다. 더 세심하게 청소하고 소독도 해야 하니까. " 김명자(가명) 68세 여성.
"이번 정부가 최저임금을 올려서 임금이 올라가 좋은 점도 있다. 그렇지만 경제가 어려워지다보니까 일자리가 줄어들 것 같다. 우리 건물에서 사람을
줄이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내가 아는 언니가 여의도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큰 건물인데 사람을 줄여서 한 사람 당 두 개 층을 담당하고 있다. 한 사람이 한 층을 하기도 힘든데, 나도 그렇게 될까봐 너무 걱정스럽다. " 고순애(가명) 66세 여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투표장에 가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세상이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여전히 달리는 버스 안에서 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정치에 필요한지 물었다.
"협력하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성실한 사람 바보 만들지 않는 정치를 해달라." 박영자(가명) 67세 여성.
"잘 살게 해달라는 게 아니라 잘못된 것들을 고쳐가면서 살아가보자는 거다. 밑에 보좌관이나 머리 좋은 사람을 두고 괜찮은 의견이 나오면 조사해서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것을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썩어빠진 기둥을 가지고 지붕을 새로 하네 마네 하는 꼴이다. 잘못된 것부터 고쳐나가는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김명자(가명) 68세 여성.
"진정성을 가진 정치 일꾼이 필요하다.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 가식적인 사람은 안 된다." 윤호식(가명) 78세 남성.
"살림 잘하는 사람으로 투표할 생각이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국민 귀한 줄 아는 사람이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박귀복(가명) 78세 여성.
"소신있는 사람이 당선되면 좋겠다. 당이랑 생각이 다르더라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상대 당도 칭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뽑으려고 한다." 정무열(가명) 59세 남성.
"내가 딸이 셋인데, 어린 애들 성폭행한 사람들한테 강력한 대처를 하는 사람을 뽑을 생각이다. 딸 셋 모두 결혼을 시켰지만 손녀들 생각나서 무서워 죽겠다." 이경애(가명) 75세 여성.
"나같은 저소득자, 없는 사람들한테 혜택을 줬으면 좋겠다. 있으나 없으나 세금은 다 내지 않나." 임자혜(가명) 여성 72세.
버스는 어느새 구반포역 정류장에 다다랐다. 기자의 가방을 들어주었던 아주머니도 거기서 내렸다. "여기 기자들이 몇 찾아왔는데 바뀐 건 없었어. 그래도 열심히 해"라며 가방을 건네고는 일터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른 아주머니들도 구반포역을 시작으로 고속터미널, 논현사거리, 선릉역에서 하차해 투명인간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바닥까지 가득 찼던 만원버스가 한티역 정류장을 지나자 버스에 남은 승객은 기자 혼자였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