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도교육감들이 지난해 12월, 6박8일 일정으로 유럽국가 교육 탐방 길에 나섰다. 탐방 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는 직업교육도 빠지지 않고 챙기는 모습도 보였다.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유럽 탐방 이후, 각 시도교육감들은 경쟁적으로 유럽의 직업훈련을 표본으로 배워야 한다는 '사대주의적'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교육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진보교육감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큰 실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3월 10일, 김지철 충남도 교육감은 <한겨레>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요약하면 '학생들에게 다양한 성공 경로를 제공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지원하겠다. 4차 산업 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신산업 분야 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 산업과 연계한 직업교육 시스템을 마련하겠다'였다. 시대 변화에 적합한 직업계고 학과개편을 진행하겠다는 이야기다. 이는 2016년 5월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독일의 직업학교 '필립-홀츠만 슐레(Phillpp-Holzann Schule)'을 방문하여 남긴 말과 다를 바 없다.
독일은 학교와 기업에서 번갈아 가며 교육을 받는 도제식 훈련시스템을 채택해 매년 수천 명의 산업인력을 양성하고 있다면서 유 부총리는 "기업 참여를 통한 맞춤형 교육과 채용 약정 및 조기 취업과 같은 직업교육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도 하루 빨리 정착되길 바란다"며 "고교 졸업생에게 양질의 일자리가 제공되고 기업에게는 우수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지금 시점에서 같은 장소를 탐방한 김지철 교육감이 '직업계고 혁신교육'의 방향을 4차 산업혁명시대를 준비하는 것으로 파악한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경제관료와 같은 주장을 언어만 바꿔치기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또한 소위 '4차 산업 혁명'에 기대어, 기업이나 경제 관료들처럼 미래 역량을 개인의 성장담론으로 채택하고 교육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김지철 충남도교육감을 비롯한 시도교육감에게 묻고 싶다. 교육이 누려야 할 가치가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 지역 교육의 수장인 시도교육감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공교육제도는 흐르는 강물과 같다
그간 직업계고는 사실상 기계적인 노동자 양성이라는 경제주의 관점으로 운영돼 왔다. 하지만 이는 근대 산업화 시기에 생산공정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을 가진 노동자 양성과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진다. 그리고 2000년대 우리 산업이 서비스 위주로 재편되면서 전통적 기간산업에 기초해 운영되었던 직업계고는 서비스 관련 학과개편으로 변화를 꾀했다.
명목은 학과개편이나 실상은 직업계고(당시 전문계고)의 생명연장 전략의 다름 아니었다. 겉포장만 바뀐 학교에 현혹된 학생들이 모였고 성적도 덩달아 상승했다. 정부는 2010년 기업 수요를 고려해 중소기업맞춤형 훈련 등을 내놓고 기업 수요에 맞는 교육이라 부르짖었으며, 2015년에는 교육과정 개편절차를 무시하고 교육과정에 국가직무능력표준을 적용했다. 하지만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 육성이라는 기업 위주 직업교육의 목표를 숨기지 않았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고교학점제가 직업교육 현장에서는 또 다른 기업 위주 직업교육의 하나로 돌변하고 있다. 신산업분야를 직업계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넣겠다는 것이 현재 교육부가 추진하는 직업계고 고교학점제 추진의 핵심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김지철 교육감이 고교학점제를 직접 지목하지 않았지만 ‘신산업분야 기술 인재 양성을 위한 학과 개편’ 등의 직업계고 혁신 방안은 시대에 뒤떨어진 직업교육 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진보교육감으로서의 김 교육감에 실망하는 이유다.
한 사회의 여러 가지 제도는 사회적 배경에 따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물이 흐르는 강의 크기와 모양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에 의해 규정된다. 진보교육을 말하려면, 최소한 현재 사회가 요구하는 개혁의 강줄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진보교육은 고인 물을 되새김질하는 수준의 낡은 교육이다.
나라마다 교육의 역사문화적 배경이 다르다
유럽 국가의 교육체제와 우리의 그것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르다. 중세 특권층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이 19세기(프랑스혁명, 콩드르세의 공교육론)를 지나면서 대중들에게 보편화되게 되었다.
교육제도는 경제・사회・문화적 배경과 맞물려 돌아간다. 유럽 사회는 오랜 근대 산업화 과정, 그리고 선발 산업국가의 강점, 치열한 노동운동 등이 바탕이 되어 직업에 따른 사회적 차별지수가 낮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와 다르다. 3년마다 하는 독일의 직업별 만족도 조사의 결과를 보면 직업의 선호도는 우리나라와 별 차이가 없으나, 상하위 직업별 만족도 차는 우리에 비해 낮다. 유럽사회는 근대화 시기 식민지로부터 유입된 자본과 경제발전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분배를 일정부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도 크지 않다. 물론, 유럽 사회의 하부 또는 주변부에는 여전히 인종적 차별이 드리워 있다. 이주노동자, 유색인종 등에 대한 분리교육도 유지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실시되는 유럽의 직업교육은 학교가 중심이 아닌 기업이 주도하는 직업훈련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유럽의 직업교육은 학교에서의 보편교육 기간을 마친 후, 기업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유럽의 직업훈련소와 우리의 직업계고는 그 자체가 다르며, 따라서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하거나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천일향과 귤의 차이만큼 다른 것이다. 역사문화적 배경과 현실이 다른 유럽국가의 교육체제를 우리 교육에 그대로 옮겨올 수 없는 이유이다. 미국의 입시사정관 제도를 모방한 우리의 입학사정관 제도가 각각 어떻게 작동되고 평가되고 있는지 명심해야 한다.
기술발달과 직업교육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산업시대 방식의 교육과정은 학생들의 선호도가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한 존중이 없는데 우리 교육현장이라고 다를 수 없다. 하지만 '산업시대가 저물었다'는 틀린 말이다. 산업화 시대는 저물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도 제조업은 기간산업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2차 산업이 경제상장의 중심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자본의 평창과 더불어 서비스업의 비중이 확대되는 등 산업별 비중이 변했을 뿐이다.
자본이 필요로 하는 '신산업분야 기술'은 직업군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어나갈지 명확하지 않다. 미래 담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심각한 오류에 빠져 있다. 향후 10년 후에 신산업이 남아 있을지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존속을 전제로, 존재하지 않는 미래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산업 분야 훈련은 일정 수준의 발달이 끝난 노동자가 산업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직무 활동이다.
또한 '정보화 능력'은 직업계고 학생들만 직업 활동에 필요한 능력으로 배우는 교과내용이 아니라 기초 학습 능력 형성과 더불어 누구나 습득해야 할 능력이다. 정보화 시대라는 이유로 직업계고 학생들이 기본교육을 충실하게 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지 않는다. 직업계고 학생들에게 정보화 관련 교육만을 강조하는 것은 의도적이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일종의 배제 교육, 분리 교육, 계급교육을 강요하는 것이다.
대규모 집단을 하나 공동체를 묶어 운영하는 학교는 순간순간 변화하는 산업기술을 적용하여 운영하는데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한동안 정보화 파고가 학교에 몰려올 때 컴퓨터 부품의 이해와 조립은 매우 유용한 기술이었다. 그러나 모니터와 본체가 통합된 노트북이 일반화 되면서 불과 몇 년 만에 장비구입과 교육 자료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단순한 기술만을 가진 노동자는 자동화 공정으로 대체된다. 기업이 인간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은 이윤을 내지 못하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교육감의 덕목 중 하나는 학교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
과학경영이라는 미명 아래 공장제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은 분 단위로 관리되었다. 노동을 단편적으로 이용하는 관점이 경영에서 교육으로 넘어와서 직무별 교육내용과 방식을 달리하였다. 학교급별 혹은 기술 숙련도 등을 종합해 교육의 등급을 정하는 국가능력표준은 모든 직업교육의 대전제가 되는 '어떤 직무도 구조적 조건이 마련되면 모든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노동의 숙련화'를 부정하고 있다. 이 같은 국가능력표준은 물론 고교학점제의 이면에는 정상교육이 아닌 분리교육 정책이 숨겨져 있다. 이런 정책이 교육의 탈을 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고졸자 직무'라는 개념은 차별적 언어다. 또한 위계를 내면화하는 주관적 표현이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로 필요 노동의 변화가 곧 노동의 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질을 떨어뜨리거나 높이는 것은 노동 형태의 변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적 관념이다. 작업을 '고졸자 직무', '대졸자 직무' 등으로 등급화 하는 것은 경제적 이윤을 높이기 위한 자본의 전략일 뿐이다. 교육은 직무를 등급화하고 인간을 등급화 하는 데 기여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교육은 내재되어 있는 인간의 발달 가능성을 자극하고,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발달 과제를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직업교육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직무능력표준을 교육과정에 적용하는 것은 반교육적인 것이다.
'국가직무능력표준', '기술 인재 개발' 등의 개념은 노동 능력을 단순하게 사회적 관계를 떠난 추상적 개인을 전제로 한 비현실적 개념이다. 인간의 노동 능력은 개인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같은 기술도 노동집단별로 다르게 적용되고 기술축적 방식 또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직업교육이 인간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노동생산에 필요한 직무능력에 비해 노동자는 더 높은 수준의 개별 능력을 형성해야 한다. 그래야 직무수행에 있어서 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능력보다 높은 업무 강도는 노동자를 위험에 내몰리게 한다. 높은 수준의 교육은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해가 없이 국가연구기관의 말을 인용하여 회사 직무의 60%가량은 고졸자 직무라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의심 없이 인용하였다.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자리 미스매칭'의 본말이 혼미하다. 거짓말이 계속 반복되면 어느 순간 진실로 믿게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학교 교육은 인간의 발달에 도움이 되는 것을 교육해야 하며, 노동 활동은 전인적 발달에 기본 기제를 제공하고 있기에 노동교육은 학교교육과정에 포함되어야 한다. 전통시대 노동활동은 인간의 구상력과 실행력을 하나로 묶어 두었다. 기계를 다루는 기본 작업기술과 결합하여 기술공의 경험과 상상력이 창조적 성과물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이는 숙련 노동이 인간에게 주는 만족감은 마치 상상한 것을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뛰어난 화가와 같은 일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시대에 접어들어 노동행위가 인간의 신체발달에 도움을 주는 요소라는 점이 사라지고 있다. 단순하게 노동공정이 단순화, 표준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이렇게 노동의 질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새 시대를 대비하는 기술인 양성이라고 말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성공 경로를 학생들에게 제공한다고 하지만 고졸 성공, 대졸 성공 등은 차별과 계급을 전제로 한 반교육적인 개념일 뿐이다. 현재와 같은 교육감의 교육론은 자본주의 인간자본론과 동일하다. 즉 인간을 수단적 가치로 생각하게 하고 그 생각을 익숙해지도록 하여 자본주의 생산 요소로써 활용하는 논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배경 속에서 나온 진보교육감을 포함한 김지철 교육감의 '직업계고 혁신교육' 방향은 궤도를 변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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