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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향기와 열사의 의기, 반변천 곡류에 그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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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문인의 향기와 열사의 의기, 반변천 곡류에 그윽하다

2018년 7월 고을학교는 <영양고을>

*강의 마감됐습니다^^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57강은 반딧불이 서식하고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청정지역이며 대대로 충의 열사와 문인이 많이 배출된 유서 깊은 선비의 고을, 영양을 찾아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남이장군의 전설이 전해지는 선바위와 남이포Ⓒ영양군

고을학교 제57강은 2018년 7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7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영양-봉감모전오층석탑-선바위-남이포-연당마을(서석지)-벽산생가-검산성-돈간재/주사-주실마을(호은종택/옥천종택/월록서당/조지훈생가)-영양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감천마을(오일도생가/오일도시비/영양측백수림)-남자현생가-두들마을(석계고택/석천서당/주곡고택/유우당/광록정/남악정)-서울의 순입니다.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영양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57강 답사지인 <영양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영양의 진산은 일월산

영양의 지형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낙동정맥이 통고산을 지나 서남쪽으로 흥림지맥을 이루며 일월산을 높이 일구는데 그 남쪽에 기대어 북고남저의 산간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전반적인 해발고도가 경북에서 가장 높습니다. 물줄기는 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읍내를 동과 서로 가르며 흘러 일월면 곡앙에서 상원리를 돌아 대천2리 입구에서 동천과 합류하고 감천리를 지나 입암면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흘러갑니다.

영양의 진산인 일월산(日月山, 1219m)은 동쪽으로는 동해와 울릉도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 부르는데, 정상부에는 일자봉, 월자봉 두 봉우리가 있습니다. 동학의 기본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집필된 곳으로, 해월 최시영 동학교주가 수도한 곳이며 의병활동이 가장 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구세군 총사령관 김해득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또한 음기가 강하여 여산(女山)으로 알려져 있고 그믐날 내림굿을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무속인들로부터 성산(聖山)으로 추앙받는 산으로 천축사라는 절터와 황씨부인당, 용화사, 천화사, 용화선녀탕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영양의 중심 하천인 반변천(半邊川)은 일월산에서 발원하여 청송군 파천면 어천리에서 용전천과 합류하여 임하댐을 이루고, 안동시 길안면 신덕리에서 길안천과 합류하여 서류하다가 안동시 정하동에서 낙동강에 합류하는 하천으로, 길이는 109.4㎞에 이릅니다.

특히 반변천은 남북 방향을 따라 비교적 깊은 협곡을 이루는데, 청송군 진보면 부근에서는 더욱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이루고 하폭이 좁은 골짜기를 만들어 곡강리(曲江里)라는 지명이 생겼으며 영양읍의 북쪽 교외에서는 반변천의 곡류단절에 의하여 생긴 원당지(元塘池), 연지(蓮池), 과대지 등의 하적호(河跡湖)가 삼지동(三池洞)이란 마을이름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재령이씨 집성촌 두들마을Ⓒ영양군

영양은 신라 초 ‘고은’이라 하였다

영양은 신라 초 읍호를 ‘고은’이라 하였다가 말기에 영양이라 하였습니다. 고려시대는 1018년(현종 9) 예주부(영해)에 속했으며 1179년(명종 9) 영양현을 신설하여 감무를 두고 별호를 익양이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는 1413년(태종 13) 행정구역 개편으로 폐현되고 영해부에 편속되었다가 1678년에는 진보현에 이속되었던 것을 1683년 영양현으로 복현되어 현감을 두게 되었습니다.

영양은 본래는 현리에 관아가 있었으나 1358년(공민왕 7) 왜구의 침략으로 현리에 있던 관아가 불 타 없어지고 그 뒤로 약 3백 년 동안이나 관아를 짓지 못하였다가 1676년에 이르러 현재의 군청 자리에 동헌이 들어서자 동부리와 서부리가 중심 지역이 되었는데 3백 년 전부터 서부리에 시장이 들어서 동해안 영해로부터 창수령을 넘어오는 생선장이 크게 번성하였고 아울러 안동, 봉화, 영해를 잇는 길목의 구실도 하였습니다.

영양향교(英陽鄕校)는 1679년(숙종 5)에 창건되었으며 1701년에 현감 한세기와 유림 조시상, 조덕수 등이 협력하여 육영루(育英樓)를 신축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취했으며 정문인 육영루를 시작으로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 교직사, 전사채가 남아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명륜당의 현판은 고려 말의 명필인 한수(韓修)가 쓴 것입니다.

▲항일의병장 김도현이 사재를 들여 쌓은 검산성Ⓒ영양군

영양남씨의 시조인 영의공 남민

여남강당(汝南講堂)은 영양남씨의 발원지로 시조인 영의공 남민(南敏)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향현사(鄕賢祠)로 시작했는데 1830년(순조 30) 여남서원으로 승격되었다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명으로 훼철되어 지금은 강당과 비각만 남아 있습니다.

남민은 원래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으로 이름은 김충(金忠)인데 726년(당나라 현종 14)에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 돌아오던 중 폭풍을 만나 축산도(丑山島, 영덕군)에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경덕왕 14년에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성씨도 받았는데 이때부터 성씨를 ‘남’(南)이라 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쳤으며 그 뒤 영양군(英陽君), 의령군(宜寧君), 고성군(固城君) 등 세 개의 본으로 나누어진 남씨의 영양 입향조가 되었습니다.

돈간재(敦艮齎)는 청계(靑溪) 김진(金進)의 정자입니다. 김진은 청기리의 낙후된 교육을 개탄하여 1577년(선조 10) 영산서당(英山書堂)을 건립하여 학생을 가르쳤으며 그가 죽은 뒤 증손인 김시온(金是穩)이 거처하면서 서당 휴게실로 쓰던 정자에 돈간재라는 현판을 달았습니다.

돈간재는 앞면 3칸, 옆면 1칸이며 마루를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주사(廚舍)는 ㄱ자형 본채와 오른쪽에 있는 헛간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ㄷ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앞면에 있는 사주문을 통해 드나들게 되어 있습니다.

▲영양고을에 남아있는 특이한 오층모전석탑Ⓒ영양군

재령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

영양에는 재령이씨 두들마을, 한양조씨 주실마을, 낙안오씨 감천마을 등 집성촌 마을이 남아 있습니다.

두들마을은 조선시대 광제원(廣濟院)이 있던 곳으로 ‘언덕(두들)에 위치한 원이 있던 마을‘ 이라고 하여 원두들 또는 원리라 부릅니다.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張興孝)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1640년(인종 18)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는데 석계의 넷째 아들 숭일이 선업을 이었고 후손들이 더해져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집성촌이 되었습니다.

마을 옆 둔덕에는 석계와 관련된 석천서당과 석계고택이 남아 있으며, 마을 앞으로 흐르는 화매천(花梅川) 가에 서있는 암석들에는 석계의 넷째 아들인 항재 이숭일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은 석계 선생이 영해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후 크게 문풍이 일었던 곳으로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 등을 배출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갈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하였고, 근세에는 이현규가 의병대장을 지냈으며, 유림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돈호, 이명호, 이상호 등도 이 마을 출신입니다.

장계향은 1598년 아버지 경당 장흥효와 어머니 안동권씨 사이의 외동딸로 안동 검재(금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의 문인으로 당대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는데 퇴계 학풍을 이어 받은 학자답게 '몸을 삼가고' '항상 공경하는 자세'를 제자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장계향도 이러한 집안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10세 정도 되는 나이에 <소학>과 <십구사략>을 깨쳤고, 13세가 되어서는 <백발 늙은이> <몸가짐을 조심하다> <소소한 빗소리>와 같은 주옥같은 시들을 지었습니다. 또한 한국 최초의 한글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도 저술하였습니다.

19세인 1616년 영해 나랏골에 살던 재령이씨 가문의 이시명과 결혼했는데 남편은 이미 광산김씨와 결혼해서 1남 1녀를 둔 27세였으며 재혼 후 6남 2녀를 더 낳아 전부인과 자신의 소생 7남 3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중에서도 둘째 휘일, 셋째 현일, 넷째 숭일은 경상도를 대표하는 학자로 명성을 날렸으며 특히 갈암 이현일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퇴계 이황의 영남학파를 계승하였습니다. 또한 그의 손자 이은, 이재, 외손자 이상정 또한 문명이 높았습니다.

석계고택(石溪古宅)은 이시명이 1640년(인조 18)에 세운 고택으로 ‘一'자형 사랑채와 안채를 ‘二'자형으로 배치하고 토담으로 막아 허실감(虛失感)을 메운 뜰 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석천서당(石川書堂)은 이시명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고 ‘석천서당’이라 하였습니다. 이 서당은 두들산을 배산(背山)으로 하고 남서향으로 향하고 있는데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곡고택(做谷古宅)은 주곡 이도(做谷 李櫂)가 주남리에 건립하였던 것을 후손들이 1830년에 이곳으로 이건하였습니다. ‘ㅁ’자 구조의 이 집에는 수장 공간이 많은데 이는 산지마을의 특성상 곡식의 저장성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유우당(惟于堂)은 1833년(순조 33)에 이상도(李相度)가 주남리에 세운 집인데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한 후손 이돈호(李墩浩)가 이곳으로 이건하였습니다. 항일시인 이병각의 집이기도 한 이 집은 당초 ‘ㅁ’자 형태였으나 이후 기능이 부가되어 ‘날개집’의 형태로 변형되었습니다.

남악정(南岳亭)은 갈암 이현일이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던 곳으로 1674년(현종 15)에 건립되고, 1882년(순조 22)에 중건되었습니다. 기사년(1689) 성균관 사업(司業)의 명과 갑술년(1694) 유배의 명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사주문의 현판 홍도문(弘道門)은 숙종의 어필이고, ‘남악’이란 명칭은 석보면 주남리의 옛 지명 ‘남악곡’에서 따온 것입니다.

광록정(廣麓停)은 이숭일이 강학하였던 곳으로 1884년(고종 21) 유생과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는데 초당에는 선생의 원운과 산택재의 차운이 있으며, 이수영(李秀榮)의 <추건기(追建記)> 등이 남아 있습니다.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동 원림과 함께 한국의 3대 정원에 꼽히는 서석지Ⓒ영양군

조지훈 생가가 있는 주실마을

주실마을은 400여 년이 된 한양조씨 동족마을로 원래 이곳은 주씨가 살았으나 1630년 조선중기 조광조의 친족 후손인 한양인 조전이 사화를 피해 정착하면서 주실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여 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또 느릅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고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숲'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시인의 숲'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시인의 숲'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곳 주실마을이 시인 조지훈 생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실마을은 붓을 닮은 문필봉(文筆峰)이 있어 문필가나 학자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왔는데 조지훈의 생가인 ‘호은종택'도 정면으로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있으며 작은 시골마을인 주실마을에서는 지금까지 14명의 박사가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문필봉이란 풍수학에서 붓의 모양을 닮은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로 문필봉을 마주하고 있는 집이나 마을에서는 훌륭한 학자가 태어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주실마을의 문필봉은 그 봉긋한 생김새도 그렇지만 옆으로 물길까지 끼고 있어 붓에 물이 더해지는 형국이니 최고의 지형으로 꼽힙니다. 그래서 주실마을에서 재물과 사람 그리고 문장은 남에게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호은종택(壺隱宗宅)은 조지훈과 그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곳으로 조선 중기 인조 대에 입향조인 호은 조전의 둘째 아들 정형(廷珩)이 창건했습니다. 경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 집으로 정침과 대문채, 그리고 정자 형식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에는 조지훈의 태실이 있습니다.

옥천종택(玉川宗宅)은 조덕린의 고택으로, 17세기 말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과 글을 읽는 별당인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살림채는 안동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ㅁ'자형 뜰 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고 초당은 서당의 평면 구성을 하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 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합니다. 조덕린은 1671년(숙종 17)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월록서당(月麓書堂)은 1773년(영조 49)에 조덕린의 손자인 조운도가 발의하고 한양조씨(漢陽趙氏), 야성정씨(野城鄭氏), 함양오씨(咸陽吳氏) 등이 추축이 되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서당입니다. 이 서당에서 공부한 이들 가운데 많은 석학과 명현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서당의 현판은 숙종 대 영의정인 채제공(蔡濟恭)의 친필입니다.

낙안오씨 집성촌인 감천마을

감천마을은 맛있는 물이 샘솟고 감나무가 많아 감천이라 불리는데 낙안오씨들이 400여 년을 살아온 집성촌이며 항일 시인 오희병(吳熙秉)이 태어나 자란 곳입니다. 오희병의 고택은 44칸 웅장한 기와집으로 예스러움을 간직한 채 과거의 영화를 대변하고 있으며 생가 주면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산 자락의 측백 수림과 그 아래 흐르는 반변천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서석지(瑞石池)는 정영방(鄭榮邦)이 자연과 인간의 합일사상을 토대로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는 정자와 연못입니다. 못 주위 사우단에는 매난국죽을 심어 선비의 지조를 담았고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원과 함께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을 담은 대표 정원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정영방은 1577년(선조 10) 예천 용궁에서 출생하여 우복 정경세의 우산(愚山)에서 공부하였고, 1605년(선조 38)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으며, 정경세가 그의 학문을 아깝게 여겨 천거하였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였습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이후 넷째 아들인 임천 제(臨川 悌)를 데리고 자양산(紫陽山) 남쪽 기슭인 진보의 임천(현재 입암면 연당1동)으로 이주하여 자연을 벗 삼아 소요자적하였다고 합니다.

선바위와 남이포가 있는데, 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바위를 깎아 세운 듯하나 언뜻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워 놓은 것 같은 바위가 선바위이고, 석벽과 절벽을 끼고 흐르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여 큰 강을 이루는 강을 남이포라 부릅니다.

전해오는 설화에 의하면 운룡지(雲龍地)의 지룡의 아들인 아룡과 자룡 형제가 역모를 꾀하여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 남이장군에게 토벌할 것을 명하니 남이장군이 이곳까지 내려와 이들을 물리치고 도적의 무리가 다시 일어날 것 같아 큰 칼로 산맥을 잘라 물길을 돌렸다 하는데 그 마지막 흔적이 선바위라 합니다.

독립운동가 남자현의 파란만장한 삶

영양은 충의 열사들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지경마을은 만주벌판을 달리던 독립운동가 남자현이 태어난 곳으로 사당과 비 그리고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남자현(南慈賢)은 남정한의 둘째 딸로서 1872년(고종 9) 석보면 지경동에서 태어나 3.1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일본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망명 후 김동삼과 함께 광복운동에 참여하여 서로군정서에 적을 두고 길림에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기밀통신과 연락사무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1925년 이청산과 함께 재등총독(齋藤總督)을 암살하기로 모의하고, 귀국하여 서울 시내 혜화동에 잠복하여 있다가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탈출하였습니다. 1928년 안창호, 김동삼 등 37명의 동지가 중국 경찰에 잡히자, 여사는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하고 끝내 석방운동에 성공한 일도 있었습니다.

1933년 관동군 사령관인 일본 육군대장 무등신의(武藤信義)를 만주국 전국일인 3월 1일에 폭살할 계획을 세워 하얼빈에 가서 폭탄을 구하여 치마 밑에 숨기고, 중국인 늙은 거지 차림으로 변장하여 신경의 일본 대사관에 들어가다가 거사 직전에 밀정의 밀고로 경찰에 체포되어 일본 영사과에 구금되어 5개월간 갖은 혹독한 형벌을 당했습니다.

이후 하얼빈감옥으로 옮기게 되자 왜경의 음식 차입을 일체 거절하고 “원수 도적을 토살(討殺)하지 못하고 도리어 적에게 잡혔으니 다만 죽음이 있을 뿐이라”하고 단식투쟁 15일 만에 거의 죽은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 후 끝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어 마침내 하얼빈 시내 조선여관에서 62세의 파란 많은 일생을 마쳤습니다.

옥산마을은 마을 북쪽에 있는 옥산이 마을 이름으로 정착되었는데, 옥산에는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김좌진 장군 휘하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엄순봉(嚴舜奉)이 태어났습니다.

항일의병장이 사재로 쌓은 성

검산성(劍山成)은 항일의병장 벽산 김도현이 사재로 세운 성으로 검산의 정상에서 서쪽과 남쪽에 축벽을 쌓았는데 산성의 규모가 비교적 작고 성벽의 상태도 퇴락되어 있으나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의 축성인 만큼, 비록 축성 연대가 얼마 되지 않고 조잡하더라도 보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김도현(金道鉉)은 김문기의 15세손이며 참봉 김성하의 아들로 1852년 청기면 상청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의 체결, 한일합병 등을 겪으며 의병활동과 옥고를 반복하다 고향땅에 돌아와 사립 영흥학교를 세워 후세를 위한 육영사업에 힘썼습니다. 국권이 강탈당한 이후 부친까지 돌아가시자 나라 잃은 원한과 어버이를 여윈 슬픔이 극에 달해 비장한 시를 남기고 동해바다에 투신하였습니다.

한 바다와 천지간 넓은 세상에(大海天地路)
나의 뒤를 좇는 자 한 사람도 없음이 한스럽구나.(恨無一人從)
구천(九天)에 돌아가서 갚으리라 나의 조국을(歸報祖宗國)
동방에 무궁한 어진 나라 세우리.(無窮建我東)

영양고을의 특이한 모전석탑들

영양에는 특이한 모전석탑이 3기나 남아 있습니다.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英陽 山海里 五層 模塼石塔)은 국보 제187호로 지정되어 반변천 옆 밭 가운데 서 있는데 탑이 위치한 마을 이름이 봉감(鳳甘)이라 달리 봉감탑이라고도 합니다. 밭 주변에는 기와파편과 청자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을 뿐 사찰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이 탑은 주로 붉은색 이암계통의 석재가 사용되었는데 특이한 점은 돌을 작게 다듬지 않고 비교적 큼직큼직하게 다듬어 모전석의 숫자를 최소화하면서 쌓아 올린 점이며 특히 4층 탑신에서 나무기둥의 흔적이 발견되어 목재 심주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는데,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을 수 있어 석탑과 모전석탑 건립기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모전석탑은 재료의 특성상 파손 및 결실이 두드러져 원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 가운데 가장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완전한 해체수리를 통하여 탑 내부와 기단의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고 특히 현이동 모전오층석탑, 삼지동 모전석탑 등 영양 지역에 집중된 지역적 특수성이 한국 탑파사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 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반드시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고을학교'를 찾으시면 7월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와 해외캠프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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