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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천안 주민들의 이유 있는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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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천안 주민들의 이유 있는 분노

[안종주의 안전사회] 라돈 침대 사태, '혹부리 영감' 된 정부

정부는 충남 당진항에 야적해놓았던 라돈 침대들을 천안에 본사가 있는 대진침대 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으나 이를 실행에 옮기기가 어렵게 됐다. 정부는 26일부터 침대 이송 작업을 벌이기로 했으나 이번에는 천안에 있는 대진침대 본사 인근 주민들이 당진 주민처럼 반입을 막고 있어 진퇴양난에 놓였다.

대진침대 본사에는 그동안 하루에 적게는 수백 개씩, 많게는 1000여 개의 침대가 반입돼 왔다. 주민 반발도 없었다. 하지만 당진항 사태를 겪으면서 이곳의 주민들도 거세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기존에 반입했던 라돈 침대 해체·제거 작업마저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천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전에 반입된 침대마저 옮겨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정부는 혹을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인 혹부리 영감이 돼 버렸다.

정부는 대통령의 라돈침대 긴급 수거 지시에 따라 지난 16일과 17일 우체국망을 통해 전국 동시 집중수거를 벌였다. 라돈침대를 한 달 넘게 보관하며 불안에 떨던 소비자들의 숙원이던 신속 수거를 위해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좋았다. 문제는 집중보관 처리였다.

정부, 일반인이 위험을 직관·주관적으로 인식하는 사실을 망각

산더미처럼 쌓인 침대를 본 사람이라면 놀라게 마련이다. 문제가 더욱 꼬인 데는 주민과 사전에 협의를 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정부 쪽은 주민과 사전협의를 하면 동의를 해줄 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주민들로서는 자신들도 모르게 군사작전 하듯이 몰래 들여오는 것을 보니 매우 위험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터이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만 대의 침대가 한꺼번에 모이면 위험은 몇백 배가 더 높아질 수 있다고 일반시민들은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사는 곳에는 어떤 위험 시설이나 오염 시설도 들어오면 안 된다는 님비 현상 탓도 있었을 터이다.

일반시민은 전문가와는 달리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으로 위험을 인식하지 않는다. 이들은 직관적이며 주관적으로 위험 인식을 한다. 이런 사실은 위험 인식 전문가들의 오랜 연구 결과이다. 위험 관리 내지는 위험 인식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하지만 라돈 침대 사태를 맞은 정부는 이를 무시한 대책을 내놓아 낭패에 빠져버렸다.

당진주민이든, 천안주민이든 자신들이 사용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동네에서 사용한 것도 아닌데 왜 우리 동네에 아무런 상의나 동의 없이 쌓아놓느냐며 불만을 터트리는 것은 라돈 침대 사태로 국민 모두가 불안해하는 상황에서 이미 예상된 일이다.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것이 외려 이상하다.

지역별 분산 보관이 바람직하다는 조언 듣지 않아


라돈 침대 사태가 불거진 직후인 5월 중순, 즉 한 달 여전부터 필자는 줄곧 중앙정부가 지자체와 손잡고 지역별로 수거해 최종처리 방안이 확정될 때까지 분산해 보관한 뒤 처리장으로 순차적으로 옮겨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칼럼, 토론회, 방송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제시한 바 있다.

자기 지역의 침대를 자기 지역에 보관하는 것이기에, 또 주요 도시 또는 시군별로 보관하면 그 수가 한 장소에 몇백 개로 제한되기 때문에 시민들이 상대적으로 불만과 불안을 덜 느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적으면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수억 마리 등 엄청난 숫자가 되면 콜로니(군집) 형태로 보인다. 그런 상태가 되면 사람들은 경계하기 마련이다. 수백 대의 라돈침대와 수만 대의 라돈침대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위험하게 느낄지는 명약관화하다.

위험인식은 매우 심리적이며 사소한 것이 위험증폭 일으켜

당진항 사태의 원인을 주민들의 과도한 방사선 위험 인식, 실제 위험성이 거의 없는데도 위험한 것으로 오인한 과학적 무지 탓 등으로 돌리고 싶은 정부 관계자가 있을 터이다. 하지만 이들은 위험 인식에는 심리적인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며 사소한 것(디테일)이 위험을 증폭시킨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만약 위험을 분산했더라면 사태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터이다. 당진항 라돈 침대 사태는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다. 다시 물을 병에 쓸어 담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문제가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천안 주민들도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식이 되어 당진항에서처럼 격렬한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진항 사태의 배경에는 위험소통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인 투명성을 무시했기 때문도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사고나 재난 때 이해당사자 또는 시민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시골 주민들이 무시당했다는 생각, 주민들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다고 정부가 생각하고 있다는 판단이 그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위험 소통의 핵심은 신뢰, 경계대상 1호는 분노

위험과 위기 소통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신뢰이며 분노이다. 방사선 위험은 위험 가운데에서도 분노를 가장 잘 촉발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라돈 침대 사태가 언론 보도로 불거진 뒤 정부, 특히 원자력안전위원회가 보여준 일 처리 방식은 라돈 침대 사용자를 비롯한 시민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누가(어느 기관) 언제 어떤 절차를 거쳐 당진항 집중보관 방식을 결정했는지, 결정 당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에 대한 숙의는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10여 년에 걸쳐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건설과 관련해 엄청난 사회적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당시를 떠올린다면 수만 개의 침대를 한꺼번에 쌓아놓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았을 터이다. 비밀리에 당진항에 침대를 쌓아두고 폐기처분하려던 사고방식은 과거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선정과 관련해 폭동 등 엄청난 비용을 치른 역사적 교훈을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방폐장 선정 놓고 벌어진 폭동 성찰했더라면

1990년 정부는 '서해 과학연구단지'란 이름으로 안면도에 방폐장을 건설하려 했다. 방폐장을 연구소로 위장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안면도 인근 주민들은 경찰서에 불을 지르는 등 폭동에 가까운 과격시위를 벌여 결국 백지화됐다.

이후 1993년 전남 장흥과 경남 고성, 1994년 경북 울진 등에도 방폐장 건설을 추진했지만 모두 주민 반대로 좌절됐다. 결국 정부는 같은 해 말 거주자가 9명에 불과해 주민갈등 소지가 없다고 판단한 인천시 옹진군의 자그마한 섬 굴업도를 낙점하고 방폐장 건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굴업도는 지질조사 결과 방폐장 건설이 불가능한 '활성단층' 지역임이 밝혀져 이 계획마저도 취소됐다.

가장 격렬한 갈등이 있었던 곳은 2003년 전북 부안이었다. 부안에서 멀리 떨어진 섬인 위도 주민들이 2003년 80%의 주민 동의를 받아서 방폐장 유치신청을 했다. 그러나 부안군의회가 이를 부결시켰다.

하지만 부안군수가 의회 결정에 반하여 다시 유치신청을 하면서 갈등이 커졌다. 이후 6개월간 찬반세력으로 나눠져 주민 간 격렬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부안군수가 반대세력에 의해 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결국 부안 방폐장 건립도 이뤄지지 않았다.

부안사태 이후 정부는 2004년 중저준위 폐기물과 고준위폐기물(사용후 핵연료) 처분장을 나누어서 건립하는 것으로 정책 방향을 틀었다. 2005년 3월에는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의 유치지역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주민 찬성률이 가장 높은 경주가 최종후보지로 선정돼 지금의 방폐장이 들어섰다.

한 곳에서 문제가 되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 벌어져

우리나라에서 중저준위 방폐장이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공동체가 두 쪽이 나는 등 엄청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치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여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인 방사능 공포와 지역땅값 하락을 우려한 님비 현상, 그리고 정부의 비밀주의가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방폐장 건설의 역사는 한 곳에서 문제가 되어 추진되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교훈을 주고 있다. 방폐장을 물론이고 2008년 미국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이른바 광우병 반대 광화문 촛불시위 사건에서도 시민들의 불안과 격렬한 반대가 있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시민들이 위험을 과학적으로 인식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규모나 격렬함에서 방폐장 건설과 광우병 파동 때와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는 않지만 매우 유사한 형태로 혼란을 겪고 있다.

라돈 침대 폐기 처리보다 더 중요한 난제들이 눈앞에

더욱 문제인 것은 라돈 침대 폐기 처리를 두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이 라돈 침대 사태와 관련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마지막 과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라돈 침대 사용자들의 보상 요구와 국가 책임을 둘러싼 논란도 매우 중요하고 뜨거운 의제들이다.

이뿐만 아니라 라텍스 베개를 비롯한 각종 라텍스 제품에도 라돈이 다량 검출된다는 주장도 있다. 방사성 물질을 사용한 각종 생활용품·의료기기는 그 종류와 수량이 너무나 다양하고 많아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 그리고 피폭자 조사와 잠재적 피해자들의 추적조사 및 관리라는, 더 큰 산맥이 우리 앞에 우뚝 솟아 있다는 우울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는 염려할 필요가 위험을 파는 주장도 결코 아니며 사소한 위험을 과대포장한 주장도 아니다. 정부가 하루빨리 라돈 침대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내야 할 때이다. 혜안을 가진 사람을 널리 두루 구해야 할 때이다.

▲ 당진항 야적장 입구에 쌓여 있는 대진침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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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 박사는 <한겨레> 보건복지 전문기자를 지냈으며,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위험 사회' '안종주의 건강 사회' '안종주의 위험과 소통' 연재 칼럼을 써왔다. 석면, 가습기 살균제, 메르스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보건 및 환경 보건 위험에 관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며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석면, 침묵의 살인자> <위험 증폭 사회>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코로나 전쟁, 인간과 인간의 싸움> <코로나19와 감염병 보도 비평>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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