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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마저 '좌클릭', 이제는 증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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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마저 '좌클릭', 이제는 증세다

[시민정치시평] 재정적 지속가능성인가, 사회의 지속가능성인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강한 정부", "시장실패가 일어난 분야에서 이를 시정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개입의 확대",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정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하여 경제민주화를 실현". 이것은 한나라당 비대위가 지난 1월 30일 확정해 내놓은 정강 정책 개정안에 나오는 문구들이다. "큰 시장, 작은 정부", "기업하기 좋은 나라", "교육의 수월성과 경쟁력". 이것은 1997년 한나라당 창당 당시의 정강 정책에 나오는 표현들이다. 금석지감(今昔之感)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한나라당, 아니 새누리당의 이런 변화는 "버츠컬리즘"(Butskellism)이란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1954년 2월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Economist)>는 2차대전 이후 형성된 보수당과 노동당의 정책적 합의의 기조를 버츠컬리즘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보수당 정부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버틀러(Rab Butler)와 그의 상대역이라 할 수 있는 노동당 예비내각(새도우 캐비넷)의 재무부장관이었던 게이츠컬(Hugh Gaitskell)의 이름을 합성해 "미스터 버츠컬", "버츠컬리즘"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경제ㆍ노동ㆍ복지 등 모든 분야에서 좌와 우로 입장과 정책을 달리했던 두 당이 케인즈주의와 복지국가를 받아들이고 상당한 정도 정책적 수렴을 한 것이 이런 용어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런 정책적 수렴을 위해서는 보수당의 획기적 좌클릭이 필요했다. 그리고 고급 보수정론을 표방하는 이코노미스트의 희화적 표현이 대변하듯, 이런 보수당의 좌경화는 영국의 정통 보수 세력의 눈엔 마뜩치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수당의 이런 전환은 왜 필요했는가? 그것은 대공황과 2차대전을 통해 표출된 자본주의의 위기, 그리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혼합경제와 복지국가의 필요성에 대한 전 국민적 합의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전쟁과 공황의 경험은 하층계급뿐만 아니라 중간계급에게까지도 시장의 폭력성 앞에 개인의 자구능력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회적 위험에 대한 집단적 대응체제로서의 복지국가 건설을 국민적 합의 사항으로 만들었다. 전쟁과 공황의 경험은 또한 복지국가에 의해 보호받기 위해서는 그것을 떠받치기 위한 광범위한 과세가 불가피하다는 것도 깨닫게 했다. 국가는 중산층에게로, 나아가 노동자들에게로까지 점차 과세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하층이 이럴진대, 상층계급이 사회가 폭발하거나 붕괴하지 않기 위해서는 가진 자들의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받아들였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영국 보수당의 좌클릭은 이런 달라진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보수당은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했고, 그렇게 했다.

지금 새누리당의 변신의 몸부림은 역으로 우리 사회의 위기가 얼마나 깊은지를 대변해준다. 2009년께인가, 몇몇 시사주간지들의 기사 제목들을 연결 지어 떠올리다가, 이게 도대체 지속가능한 사회인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초등학생들, 꿈이 없다>라는 특집에는 경쟁에 지쳐 꿈을 잃어버린 어린이들의 얘기가 나왔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아예 꿈이 없다고 답하거나, "편하게 사는 것", "돈 많은 주부"를 꿈으로 들어 어른들을 당혹하게 했다. 몇 주 지나니 <초식남과 건어물녀> 얘기가 나온다. 물불 가리지 않는 정열적 연애는 청춘의 특권이건만 대학에 오기까지 이미 경쟁에 지친데다 등록금ㆍ학점ㆍ스펙 쌓기에 치인 청춘들에겐 연애할 정열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만난 특집 제목이 <사랑은 88만원보다 비싸다>이다. 낙타 바늘 귀 들어가기만큼 어려운 취업, 88만원 임금의 불안정한 직장, 까마득한 전세값... 기다리다가, 돈을 마련하다가, 결국은 타이밍을 놓치고 인연은 어그러진다. 저출산이 사회문제가 된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더니 기어코 '3포세대'란 용어가 등장했다. 연애 ㆍ 결혼ㆍ 출산포기가 우리 시대 젊음의 우울한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OECD 최고라는 노인 자살률이란 또 하나의 타이틀을 더하니 한국사회가 과연 지속가능한 사회인가, 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태어날 기회조차 갖기 힘들고, 운 좋게 태어나면 어린 나이부터 경쟁에 시달리며 꿈 없이 살다가, 연애ㆍ 결혼ㆍ 출산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하기 어려운 나라, 그리고 노인들은 질병과 빈곤을 자살로 해결하는 나라. 온통 사회적 위험으로 점철된 라이프 사이클 속에서 빈곤과 외로움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남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분노와 절망은 높은 자살률, 학교폭력, 가정폭력, 묻지마 방화로 분출되었다.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鼠一 匹)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새누리당까지 좌클릭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작금의 정치상황은 결국 이런 사회적 위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삶의 황폐화가 구미의 대공황과 전쟁기 보다 못하지 않음을 웅변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보편적 복지국가의 건설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시대적 과제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증세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어떤 정치세력이 집권해도 OECD 평균 보다 5%나 부족한 조세부담률, 8%나 부족한 국민부담율, OECD 평균의 40%에 불과한 공공복지지출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삶의 황폐화를 수습할 수 없다. 세금불신의 해소를 위한 지출개혁 및 과세형평성 확보가 먼저 이루어져야하지만, 지금의 "저세입-저지출" 구조를 "적정세입-적정지출" 구조로 전환할 수밖에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목표로 OECD 평균을 우리가 도달해야할 잠정적 목표로 잡는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추가 재정규모는 GDP의 약 10%선이고 이는 금액으로는 약 연 130조원이며 차기정부 5년간 이중 반 정도를 달성한다면 연 65조원이 필요하다. 이 중 재정지출 개혁을 통해 마련할 수 있는 돈이 약 30조원으로 추산되므로 나머지 35조원은 증세를 통해 마련해야 한다.

보수세력들은 그동안 '재정적 지속가능성' 없이는 복지국가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면서 사실상 증세불가론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제 새누리당 조차도, 최소한 부자증세에는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새누리당의 부자증세는 작년 연말 국회에서 단독통과시킨 '과세표준 3억 초과분에 대해 38%의 세율 적용'안에서 보여지듯 거의 면피성에 가깝다. 이 방안에 따라 38%의 세율을 적용받을 사람은 근로소득자 1만명, 종합소득자 2만3천여명 등 전체 소득자 19백만명의 0.2%도 되지 않는다. 또 이로 인한 소득세 추가세입도 국세수입의 0.3%에 불과한 7천억원에 그칠 전망이다. 오랫동안 증세에 망설이던 민주통합당은 이제 실질적인 부자증세로 돌아섰다. 이로써 이제 야당들 사이엔 과세표준 1억2000만원 내지 1억5000만 원 초과 소득에 대해 40% 최고세율을 적용하고 금융소득종합과세의 기준을 완화하여 금융소득에 대한 누진세율을 강화하며, 주식양도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 부과도 확대 적용해야 하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사실상 부자증세만을 가지고는 심각한 우리의 사회적 위기를 수습할 복지국가를 만들기 어렵다. 대부분의 추가재정을 부유층에서 부담하되 중산층 이상 역시 소득수준별로 일정부분을 책임지는 일종의 '능력별 증세'가 필요한 것이다.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특별소비세 등에 등 직접세목에 다시 누진적 부가세율을 적용하는 일종의 목적세로서의 사회복지세 도입(오건호, "복지국가 3대 증세 원칙과 사회복지세 도입 방안" 사회공공연구소 이슈페이퍼)이 그 구체적 해법중 하나가 될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대응이 지체되는 가운데 위기는 점점 깊어져왔다. 히스테리컬하게 공부하라 닦달하는 엄마와 그 엄마를 살해해 옆방에 유기하는 아이, 공감과 연민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장난삼아 친구를 괴롭히다 자살로 내모는 아이들. 여기가 바닥인가 싶으면 다음날 더 무서운 얘기가 신문을 장식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적 지속가능성, 증세불가를 외치고 있을 것인가. 사회 자체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면, 재정적 지속가능성은 도대체 어디에 쓸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시인은 '연민의 나의 힘'이라고 노래했다. 영어 sympathy의 어원은 '함께 고통을 느끼다', '함께 울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함께 울 수 있는 힘을 짜내어 복지국가를 만들고 그 복지국가 안에서 함께 울 줄 아는 사람들을 키워야한다. 그것이 한국사회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2012년, 기회가, 위험과 함께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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