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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나꼼수는 끌어안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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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 나꼼수는 끌어안아야 한다

[시민정치시평] 진중권과 나꼼수 그리고 새로운 공중의 탄생

진중권은 '용감한'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대중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별다른 일은 아니지만, 그는 그런 다른 생각을 갖고 대중과 자주 그리고 의식적으로 맞서 싸운다. 정치적으로 활동하는 보통의 많은 지식인들이 혹시라도 대중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하며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그는 스스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특유의 직설적인 어법과 촌철살인의 풍자로 아무 거리낌 없이 대중과 싸운다. 저 멀리 '황우석 사건' 때부터 '디 워' 논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안들에서 대중이 보인 조금은 광기어린 집단주의나 획일주의 그리고 무비판적 순응주의 같은 속성들을 생각해 보면, 그의 싸움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똑 같이 생각한다고 그 생각이 반드시 옳은 건 아닌 법이다.

그런데 최근 진중권이 싸우고 있는 대상이 조금은 특별하다. 바로 <나꼼수(나는꼼수다)>다. "쫄지마, 씨바" 같은 비속어가 상징이 될 정도로 어떤 엄숙함이나 진지함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대중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그 유명한 나꼼수 말이다. 그 대담한 정치 풍자도 박수칠 일이지만,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구속 사건에서부터 서울시장 선거에 이르기까지 나름의 방식으로 대중들, 특히 청년들의 정치적 각성을 불러일으키고 열성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말이지 나꼼수가 우리 사회 민주진보 진영의 최근의 정치적 부활을 위해 기여한 공이 더 없이 크다는 데 대해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중권이 바로 이 나꼼수의 열혈 팬들과 싸우고 있다.

관전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문제는 그 동안 '진보 지식인'을 자처해 온 진중권이 역시 사회 진보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는 나꼼수와 그 열혈 팬들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나꼼수의 선도를 따라 다들 곽노현 교육감을 응원하고 무죄를 주장하는데, 진중권은 심지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비장한 물음과 함께 그의 사퇴를 주장한다. 모두가 정봉주 전 의원에 대한 갑작스러운 대법원의 유죄 판결과 그에 따른 구속이 나꼼수를 견제하고 보복하려는 이 정권의 '음모'라고 주장하는데, 진중권은 왜 사법부의 독립성을 부정하면서 치졸한 음모론 따위를 들먹이냐며 나꼼수 팬들을 타박한다.

▲ ⓒ프레시안(최형락)

온갖 의문이 든다. 진중권은 왜 이렇게 같은 편에게 그처럼 날선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것일까? 나꼼수 팬들이 이른바 '황빠'나 '심빠'처럼 무슨 국수주의에 물든 우익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진중권의 나꼼수 비판은 괜스레 힘겹게 다시 살아난 진보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말지 않을까? 그리하여 그런 비판은 결국 조중동 같은 데서 악용됨으로써 함께 싸워 물리쳐야 할 적을 이롭게 할 뿐이지 않을까?

물론 그가 진보 진영의 다수파와 맞선다고 그것이 꼭 그가 다른 진영을 편든다고 볼 일은 아니다. 그는 단순한 '진영 논리'가 아니라 '공익'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단다. 사실 같은 편이라고 반드시 언제나 올바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편 절대 다수가 함께 가진 생각이라도 틀린 생각은 틀린 거고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 건 않는 거다. 적을 이롭게 한다지만, 어설픈 진영 논리를 고수하다가 오히려 더 크게 공격당하는 것보다는 같은 편이라도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서는 것이 정치적으로도 더 유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익이란 것이 혼자만 대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얼핏 보면 이 싸움은 지식인과 대중의 갈등, 또는 무슨 '이성'과 '감성'의 대결처럼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진중권말고도 많은 지식인들이 나꼼수의 경박함과 지나친 대중 영합성을 비판한다. 냉철한 상황 인식과 신중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도 저자거리의 술자리에서나 적합할 어설픈 결기와 농담으로 대중들의 인식을 호도하고 그들의 올바른 정치적 판단을 흐린단다. 급기야 '1등 신문'이라는 <조선일보>의 어느 칼럼은 이런 싸움이 '서울대'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차이 때문에 벌어졌다고 어처구니없는 관전평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올바른 지성과 뜨거운 열정은 사회진보를 위해 절대적으로 불가결한 두 축이다. 지식인들의 사려 깊은 정치적 이성이 대중들의 광범위한 공감과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면 세상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반면 대중들의 정치적 적극성과 자발성은 정치적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이 이끄는 비판적인 성찰의 매개를 거치지 못하면 자칫 위험한 선동에 휘둘려 폭력적 혼란 상황을 낳을 수도 있다. 문제는 양 축의 대립이 아니라 분리다. 진중권과 나꼼수는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를 전혀 다른 지평에서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나꼼수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니다. 그것은 고도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작된 특별한 신생 매체다. 그리고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의 핵심은 단순한 대중적 지지 획득에 있지 않다. 나꼼수의 참된 가치는 '공중(公衆)', 곧 나라의 일을 또한 나의 일로 여기면서 여러 중요한 사회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공동선'에 대한 책임감과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수많은 '각성된 시민들'을 새로이 만들어 내었다는 데 있다. 한 마디로 나꼼수는 지금 한국의 많은 대중들을 바로 그런 의미의 공중으로 전화시키는 데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정확히 평가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내 생각에 진중권은 바로 이 점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중권은 개인적으로 황우석 사건 당시 집단의 광기에 휩싸인 대중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끼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그 트라우마가 그로 하여금 그 동일한 대중이 적절한 계기를 통해 사적 이해관계라는 늪을 빠져 나와 공동선을 함께 생각하고 추구하는 공중이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데 너무 인색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령 근거 없는 음모론에 대한 그의 경계는 확실히 정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사법부가 언제나 공명정대하지만은 않았다는 것도 우리 시민들에 의해 공유된, 그리하여 참된 정의와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시민적 각성의 계기가 된 정치적-역사적 경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음모론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공중들과 함께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협동적 모색을 하기 위한 좋은 계기로 삼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문제의 사안들을 두고 좀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단순한 사법부의 독립성에 대한 옹호보다는 사법부에 대한 시민적 감시와 견제의 강화, 예컨대 '국민참여재판'의 확대나 '배심원제'의 전면 도입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추진해 가는 것이 정의와 공동선에 더 부합하리라 믿는다. 물론 결국 관건은 시민적 합의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꼼수의 성공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대중들의 공중으로의 전화 과정이 불가역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그 질적 성숙의 문제도 있다. 최근의 '비키니 시위' 논란은 나꼼수의 지나친 가벼움이 불러온 한계를 잘 보여준다. 시민들의 각성을 위해서는 나꼼수 같은 매체도 필요하지만 시민들 사이의 평등하고 상호 존중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심층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대화, 논쟁, 토의 또한 결정적이다. 편견과 선입견을 걸러 내고 역지사지하며 새로운 정보와 관점을 검토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표피적인 대중적 여론은 깊은 통찰을 담은 시민적 '공론'이 되고, 또 그 과정에서 공중이 탄생하고 성숙해 갈 수 있다. 여기서 진중권 같이 단순한 진영 논리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공적 지식인의 역할은 단연코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는 비키니 사건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도 단순히 소모적인 감정싸움이나 단순한 시시비비 가리기에 그치지 말고 성숙한 공중의 탄생과 공론의 창출로 이어지길 바란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시민들은 이번 논란을 둘러싼 이런 저런 토론을 통해 지나친 엄숙주의의 극복도 필요하고 표현의 자유도 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여성들의 마초이즘에 대한 경계 또한 너무도 정당하다는 점을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 조금도 모순되지 않음을 하나의 공론으로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민적 연대의식에서 출발하는 이런 방식의 비판적 소통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양성 평등의 확대가 함께 하는 참된 사회 진보를 가능하게 할 성숙한 공중이 탄생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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