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마감됐습니다^^
섬학교 회원님들이 가장 선호하는 여름 단골 휴가지, 코발트빛 바다가 아름다운 통영 섬 연대도(煙臺島)는 ‘에코아일랜드’란 월계관을 쓰고 있습니다. 태양광, 지열 등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에너지 자립을 이루었기 때문이지요. 그 덕에 연대도는 여름을 가장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섬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머물게 될 숙소인 연대도 에코체험센터는 지열발전으로 시원한 땅속의 냉기를 끌어와 냉방을 하는 까닭에 전기를 쓰지 않고도 내내 시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너른 방이 마치 얼음골처럼 시원합니다.
8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74강은 에코아일랜드 연대도와 이웃 섬 만지도에서 8월 10일(금)부터 12일(일)까지 2박3일간 ‘여름휴가특집’으로 진행됩니다. 숙소 바로 앞 산호빛 백사장이나 몽돌해변에서 물놀이도 하고 섬 둘레를 도는 ‘지갯길’도 걷고 출렁다리로 연결된 만지도까지 산책도 다녀옵니다. 따가운 한낮엔 낮잠이나 책읽기, 낚시 등을 할 수도 있습니다. 또 연대도 앞바다에서 막 건져 올린 생선회와 섬 주민들이 직접 요리해주는 해산물 음식들은 섬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것입니다. 시원하고 한가로운 섬에서의 휴가를 원하는 분들을 여름 통영 섬으로 초대합니다. 여름휴가계획에 참고하시라고 기사를 조금 일찍 올립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통영 앞바다의 호젓한 비경 <연대도와 만지도 여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연대도, 고향처럼 편안한 안식의 섬
‘윷놀이 최고의 고수 서재목, 손재희의 집’
‘목소리 크고 음식솜씨 좋은 아내 손재희. 연대도 개그맨 서재목씨가 달리기를 잘 하는
김동희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
‘전통 어가를 그대로 간직한 백옥수 할머니 집. 영화 <백프로>에 나온 집입니다’
연대도의 집 담벼락에는 아주 특별한 문패가 하나씩 걸려 있다. 집에 사는 주인의 내력이 적힌 나무판자. 모르고 지나가면 그저 그 집이 그 집일뿐인 섬 집들. 담벼락에 적힌 설명으로 인해 그 집들이 살아났다. 어느 한 집 예사로운 집이 없다.
‘노총각 어부가 혼자 사는 집, 화초를 좋아해서 목부작을 잘 만드는 이상동 어촌계장의 집입니다. 말이 없어서 답답할 정도지만 사람 좋은 집’
‘산양 읍내에서 가장 낚시를 잘 하는 어부네 집. 음식솜씨 좋고 동작이 빠른 아내 김혜원과 임중호가 금슬 좋게 사는 집’
‘허우두리 할머니댁. 연대도에서 태어나 연대도로 시집 오셨습니다. 시금치, 마늘, 밭농사를 지으십니다. 젊었을 때 한 미모 하셨답니다’
‘꽃이 있는 풍경, 허정자 할머니. 작은 집 안팎에도 담장과 골목길에도 사시사철 꽃을 키우는 마음 착한 할머니댁’
‘연대도 유일한 담배집, 가장 오래된 밀감나무와 시원한 우물이 있습니다. 백또성아 할머니댁’
경남 통영시 산양읍 연곡리 연대도. 통영시는 2009년 시민단체 <푸른통영21>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대도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연대도를 생태섬, 무공해섬, 화석에너지와 쓰레기 제로의 섬, 에코아일랜드로 만드는 사업을 진행해 2013년 5월 18일 준공식을 가졌다. 외부 자본을 배제하고 섬 개발의 이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을 이루었다. 1단계로 연대도 주민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버려둔 33층의 다랭이밭을 야생화밭으로 조성하고 폐교를 리모델링해 숙박을 겸한 에코체험센터를 가동 중이다. 이들 사업에서 나오는 이익은 주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가 도입되었고 생태탐방로도 조성되었다. 2011년 완공된 150kw 규모의 태양광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기를 사용한다. 가구당 1천원 남짓으로 전기세가 낮아졌다.
오래된 마을회관 건물을 헐고 마을회관과 경로당, 비지터센터를 지었다. 외부 화석에너지를 사용치 않고 자연에너지(지열, 태양광 등)를 이용해 냉난방을 하는 공공건물 최초의 패시브하우스(Passive house)다. 화석에너지 제로의 섬, 이제 연대도는 외부 전력 공급 없이 태양광, 지열 등 재생가능 에너지만으로 온 섬의 전력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대안에너지 체험교육의 메카로 부상했다. 2011년 여름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100여 명이 참가한 지역에너지학교도 열렸다.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사례다. 향후 대안에너지 체험시설, 전통어가 복원, 연대도 폐총 복원, 허브단지 조성, 대표브랜드 농수산물 개발 등 다양하고 친환경적인 개발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들 모두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사업들이다.
1980년대까지도 충렬사 소작인으로 살았던 섬사람들
과거 연대도 바다에는 전복, 소라, 해삼 등이 지천으로 깔렸었다. 해마다 30명이 넘는 제주도 해녀들이 들어와 물질을 하고 갔다. 그래서 한 때는 돈이 넘친다 해서 '돈섬'으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해산물들은 종적을 감추고 섬은 노인들만 남아 늙어가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섬, 그 덕분에 섬은 개발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다. 섬은 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고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대도 에코아일랜드 사업이 진행되면서 섬은 다시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48세대 82명이 등록되어 있지만 실제는 32세대 59명(2009년)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석기시대 조개무더기에서 어류, 조류, 포유류의 뼈가 출토된 유서깊은 섬이기도 하다. 숙종 44년(1718년) 군창(軍倉)에 속해 있던 연대도의 둔전 30여 마지기 땅이 충무공 사당인 충렬사의 사패지(賜牌地)로 지정되었다. 사패지란 임금이 왕족이나 공신 등 국가에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공신전 등을 내리고 그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문서로 보증해준 땅이다. 사패지인 연대도에서 나오는 곡식으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게 했으니 주민들은 모두가 충렬사의 소작인이었다. 300석 보리농사를 지으면 150석을 공출해 갔다. 무려 5할의 소작료였다. 조선왕조시대에 국왕에 의해 하사된 땅의 지배권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와서도 이어졌다.
1970년대 초 마을에서 돈 20만원을 모아 충렬사에 주고 소작을 영구히 면제해 달라고 청했다. 당시 20만원이면 충렬사 부근 통영시내 토지 1천 평을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1989년에 와서야 주민들은 공지시가대로 땅값을 물고 제 땅을 만들 수 있었다. 자기 땅에 살면서 식민지를 살았던 서러운 삶이 비로소 청산된 것이다.
연대도 주민들은 어류양식과 낚시어업을 하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한다. 옛날에는 쌀, 보리, 고구마, 옥수수 농사를 많이 지었으나 현재는 논농사는 짓지 않고 밭에 마늘, 시금치, 쪽파, 취나물, 방풍나물, 두릅 등을 재배한다. 방풍과 두릅이 많이 난다.
옛날에는 연대도에 주조장도 있었다. 일제 때 사라라는 일본 사람이 연대도에서 오오시키(정치망)어업을 했고 연대도 사람들은 일본으로 가서 머구리(잠수)배를 많이들 탔다. 시모노세키로 굴을 까는 품팔이를 다니기도 했다. 근래까지도 다니러 가곤 했다. 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10여 년 전에도 노인회장의 인솔을 받아 시모노세키로 1주일 동안 굴을 까러 다녀왔다. 아들에게는 여행을 다니러 간다고 거짓으로 일러두고 굴을 까러 갔었다.
해방 후에는 주민들이 일본인들의 머구리배를 구입해서 조업했다. 머구리배가 23척이나 있었고 술집도 7곳이나 됐다. 갈치가 많이 잡히는 갈치어장이었고 바다 속에는 전복, 해삼 등이 지천이었다. 그래서 연대도를 ‘돈섬’이라 했다. 일본말로 ‘카네시마’다.
불교의 다비식을 제외하면 이 땅에의 장례풍습에서 화장은 극히 드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연대도에는 화장의 풍습도 있었다. 섬에는 두 개의 화장터가 있었다. 날이 좋을 때는 어둠골에서 화장을 하고 날씨가 궂을 때는 꼬리섬에서 화장을 했다. 화장터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다. 화장의 풍습이 생긴 것은 농토의 부족 때문이었다. 이상동 어촌계장도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마을 뒤편 어둠골로 가서 직접 화장을 했다 한다.
연대봉 주위를 따라 섬길이 나 있다. 옛날 나무하러 지게 지고 다니던 길이라 해서 ‘지겟길’이라 이름 했다. 지겟길을 따라 걷다 섬의 뒤 안에서 나그네는 연대봉 산길을 오른다. 그냥 걷기도 쉽지 않은 이런 험한 산길을 예전에는 다들 한 짐 가득 나무를 지고 다녔다. 여자들도 땔나무 한 단씩 머리에 이고 다녔던 고생길. 지금 이 길은 그저 산책길이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생존의 길이었다. 고개 넘어 물 길러 가지 않고 높고 깊은 산까지 나무하러 다니지 않는 것만으로도 노인들은 세상이 천국이 됐다고 말씀하신다. 그 뜻이 어찌 이해되지 않으랴.
봉화불을 올리던 섬
연대도란 이름은 조선시대 삼도수군 통제영에서 왜적의 동향을 알리기 위해 섬 정상(연대봉 220m)에 봉수대를 설치한 데서 비롯됐다. 연대봉의 봉수대는 허물어져 돌들은 뒹굴고 숲은 우거져 바다가 보이지도 않는다. 봉수대(烽燧臺)는 봉화불만을 피워 올리는 곳이 아니다. ‘봉’은 밤에 불을 피워 올리는 것이고 ‘수’는 낮에 연기를 피우는 것을 말한다. 봉화불은 장작이나 화약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많이 사용한 재료는 따로 있다. 승냥이 똥이다. 짐승의 똥이 군수품이었던 셈이다. 승냥이 똥에는 인이 섞여있어 그 불빛이 푸르고 멀리까지 보이기 때문에 봉화불의 재료로 사용됐다.
봉수대 옆에는 섬의 당이 있고 당나무가 있다. 연대도의 신전이다. 신전에서 모시는 신단수는 희귀하게도 물푸레나무다. 신전은 건물이 없고 돌담을 둘렀다. 신전 입구는 새끼줄로 금줄을 처서 이곳이 신성한 영역임을 표시했다. 금줄에는 솔가지가 꽂아져 있다. 부정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당산나무인 물푸레나무와 제단 돌에는 콩짜개 덩굴이 뒤덮여 신령한 푸른빛을 더한다.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주민들은 해마다 직접 솥을 가지고 와서 밥을 지어 올리며 제를 지냈었다. 당제는 정월 초하루에서 5일 사이, 길일을 택해 지냈다.
물을 푸르게 한다 해서 물푸레나무다. 물푸레나무 가지를 꺾어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우러난다. 물푸레나무는 질기고 단단하기로 유명하다. 겨울 물푸레나무는 못도 안 들어간다 할 정도로 단단하다. 그래서 도끼나 망치, 호미, 낮, 괭이 등의 자루로는 최고다. 형벌을 내리던 곤장이나 감옥의 창살로도 이용됐던 나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한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연대도의 당은 두 곳이다. 연대봉의 당은 윗당, 마을 뒤편에도 당이 있으니 아랫당, 혹은 중당이라 한다. 당제를 지낼 때면 윗당산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혼을 달래는 산제를 모시고 아랫당산에서는 장군 휘하의 장졸들의 원혼을 달래는 당제를 모신다. 마지막으로는 마을 한가운데 별신굿 터에서 별신장군제를 지낸다. 옛날에는 무당 불러와 3일간 별신굿을 했지만 지금은 초청해 모셔온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제를 모신다. 우리 섬들을 지켜온 우리 토착신들에 대한 신앙이 남아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연대도는 참으로 소중한 섬이다.
섬학교 제74강 <여름휴가특집-연대도와 만지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8월 10일(금요일)>
07:00 서울 출발(06시 50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4강 여는 모임
-점심식사(통영식백반)
-연대도행 승선
-연대도 도착
-연대도 에코체험센터 숙소에 도착. 방 배정(다인실)
-연대도 ‘지겟길’ 걷기(3km)
에코체험센터→태양광발전소→지겟길→에코체험센터
-자유시간(휴식, 책읽기, 낚시, 숙소 바로 앞 해수욕장이나 몽돌해수욕장에서 물놀이 등)
-참돔회와 매운탕을 곁들인 저녁식사 겸 뒤풀이
-휴식 및 취침
<8월 11일(토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연대도 마을 탐방 및 만지도 출렁다리 걷기
-휴식
-점심식사(섬밥상)
-자유시간(물놀이, 휴식, 낮잠, 책읽기, 낚시, 기타 등등)
-참돔회를 곁들인 저녁식사 겸 뒤풀이
-휴식 및 취침
<8월 12일(일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연대도 산책이나 물놀이
-연대도 출발
-통영 미륵도 도착
-윤이상기념관 관람
-점심식사(통영식 한정식)
-자유시간, 중앙시장 장보기.
-서울 향발. 제74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가급적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8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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